[지눌(知訥)]
생몰 : 1158-1210
시대 : 고려
별칭 : 보조국사
분야 : 종교 > 불교인 > 고승
1158(의종 12)∼1210(희종 6). 고려 중기의 고승(高僧)이자 선종(禪宗)의 중흥조. 성은 정씨(鄭氏). 자호는 목우자(牧牛子). 황해도 서흥(瑞興) 출신. 아버지는 국학(國學)의 학정(學正)을 지낸 광우(光遇), 어머니는 개흥군(開興郡)출신의 조씨(趙氏)이다.
태어날 때부터 허약하고 병이 잦아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썼으나 효험이 없자, 아버지는 불전에 기도를 올려 병만 낳으면 자식을 부처에게 바치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뒤 병이 깨끗이 나았으므로 8세 때 부모가 정해준 대로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사굴산파(闍堀山派)에 속하였던 종휘(宗暉)에게 나아가 승려가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 특별한 스승은 없었다. 자기가 배우지 못한 것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모두가 스승이었고, 올바른 길을 교시해주는 이는 모두가 은사가 되었다. 따라서, 당시 불교사회의 종파대립적인 교육보다는 파벌을 지양하고 자유롭게 공부하였다.
당시 불교계는 의식의 극대화로 말미암아 재정의 궁핍과 승려의 타락상 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선종과 교종의 대립은 극심한 것이었다. 그는 교종의 가르침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선종의 가르침을 섭렵하였고, 그 합일점과 조화를 모색하였다.
꾸준한 구도 끝에 1182년(명종 12) 승과(僧科)에 급제하였다. 곧 이어 보제사(普濟寺)의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석하였고, 그곳에 모인 승려들과 함께 정혜결사(定慧結社)를 맺어 명리를 멀리하고 습정균혜(習定均慧)의 수행을 기약하였다. 결사를 뒷날로 미루고 용맹정진을 위하여 평창군(전라남도 나주) 청량사(淸凉寺)로 들어갔다.
이때 강당에서 《육조단경 六祖壇經》을 열람하다가 “진여자성(眞如自性)이 생각을 일으키매 육근(六根)이 보고 듣고 깨달아 알지만, 그 진여자성은 바깥 경계들 때문에 물들어 더럽혀지는 것이 아니며 항상 자유롭고 자재하다.”는 구절에 이르러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다.
이때의 기쁨을 가눌 길 없어 불전을 수없이 돌면서 감사를 드렸다. 이것을 지눌의 제1차 심기일전(心機一轉)이라 하는데, 이때 심성(心性)의 본바탕을 발견한 것이다.
그뒤 평생 동안 《육조단경》을 지은 육조혜능(六祖慧能)을 사모하여 스승으로 모셨고, 만년에 송광산 길상사(吉祥寺)를 중창한 뒤 송광산을 육조혜능이 머물렀던 조계(曹溪) 보림사(寶林寺)의 ‘曹溪’를 따서 조계산으로 고쳤다.
그러나 이 전기가 있은 뒤에도 그의 대표적인 정혜쌍수(定慧雙修)·선교일치(禪敎一致)의 사상을 확립한 것은 아니었다.
1185년 다시 예천의 하가산(下柯山) 보문사(普門寺)로 옮겨 ‘마음이 곧 부처(卽心卽佛)’라는 선종의 종지(宗旨)에 의지하여 수행을 계속하는 한편, 교종의 해탈방법을 알고자 노력하였다.당시의 불교계는 선종과 교종의 대립이 심각하여, 선종에서는 교 밖에 따로 전하는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심법(心法)을 주장하면서 경전의 문자와 이론을 무시하였고, 교종에서는 경전법문만이 부처의 참된 가르침일 뿐 선은 중국에 와서 성립된 한 종파에 불과하다고 하여 정통불교로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양측은 서로의 우열을 논하면서 시비만을 일삼았다.이에 그는 선과 교가 모두 부처로부터 비롯된 것인데 어찌 서로 담을 쌓고만 있는가를 의심한 나머지, 이원화된 선과 교의 근원을 밝히기 위하여 화엄종장(華嚴宗匠)들을 방문하여 교종의 수행방법을 물었으나 모두가 교리를 관하는 방편만을 말할 뿐 ‘마음이 곧 부처’라는 선지(禪旨)와는 매우 거리가 있어 마음으로 수긍을 할 수 없었다.
이에 스스로 대장경을 열람하며 교학과 선법이 합치하는 말을 찾고자 3년동안 노력한 끝에 《화엄경》의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에서 “여래의 지혜가 중생의 몸 가운데 있건만 어리석은 범부는 스스로 알지 못하도다.”라는 구절과, 이통현(李通玄)의 《화엄신론 華嚴新論》을 열람하다가 “보살은 십신위(十信位)에서 자기 성품 중에 있는 근본부동지(根本不動智)·보광명지(普光明智)를 깨달아 십주초위(十住初位)에 들어간다. ”는 구절에 이르러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또, “몸은 지혜의 그림자요 국토 또한 그러하다. 지혜가 깨끗하면 그림자도 맑아 크고 작은 것이 서로 용납됨이 인타라망(因陀羅網)과 같다. ”고 한 문구에 이르러 책을 덮어두고 탄식하기를, “부처의 말씀이 교가 되고 조사(祖師)께서 마음으로 전한 것이 선이 되었으니, 부처나 조사의 마음과 말씀이 서로 어긋나지 않거늘 어찌 근원을 추구하지 않고 각기 익힌 것에 집착하여 부질없이 쟁론을 일으키며 헛되이 세월만 소비할 것인가. ” 하였다.
이때 그는 선교일원(禪敎一元)의 원리를 발견하였고, 이에 입각하여 인도적인 교와 중국적인 선을 함께 회통함으로써 새로운 지도체계를 세웠고, 말법학도(末法學徒)를 위한 원돈관문(圓頓觀門)의 지침을 확립한 것이다.
또한, 그는 부처와 조사의 마음과 말씀이 둘이 없는 원칙에서 선교불이(禪敎不二)의 원리를 발견하고, 또 당나라 규봉종밀(圭峰宗密)의 저술인 《선원제전집도서 禪源諸詮集都序》에서 선교합일의 이론을 정립하여, 마치 원수처럼 등을 지고 있던 종래의 선교양종에 대하여 선교합일 회교귀선(會敎歸禪)이라는 우리나라 불교의 특수한 종지를 창도하기에 이르렀다.
그뒤 이때의 깨달음을 근본으로 삼아 《원돈성불론 圓頓成佛論》을 저술하였고, 실천의 방면에서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을 베풀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합일융화라는 전통을 남기게 되었다.
1188년 봄, 이전의 담선법회에서 결사를 약속하였던 득재선백(得才禪伯)이 팔공산 거조사(居祖寺)에서 전날의 약속을 잊지 않고 사람을 시켜 청하였으나 응하지 않다가, 1190년 몽선화상(夢船和尙)과 함께 거조사로 옮겼다. 결사를 약속한 동지를 모은 뒤 사명(社名)을 ‘정혜(定慧)’라 하고, 《권수정혜결사문 勸修定慧結社文》이라는 장편의 취지문을 지어 선포하였다.이 결사문에서 마음을 바로 닦음으로써 미혹한 중생이 부처로 전환될 수 있음을 천명하였고, 그 방법은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에 있다고 하였다.
이 정과 혜의 두가지는 일심 위에 통일되어 늘 균형을 지녀야 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성적등지(惺寂等持)라는 표현을 많이 쓰기도 하였다. 이것은 한 부처의 가르침이 선교양종·정혜이파(定慧二派)로 분열되어, 정과 혜가 한마음 위에 통일될 때 온전한 불교공부가 된다는 것을 망각한 채 시비를 일삼고 적을 삼아왔던 당시 불교계 수행법에 대한 깊은 자각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결사운동은 정법불교에로의 복귀작업이었고, 결사문은 부패하고 타락된 당시의 불교현장을 이념적 또는 형태적으로 혁신하고 재건하기 위한 일대 선언서였다. 정혜결사를 시작한 지 8년째 되던 1197년 왕족 및 관리를 비롯하여 승려 수백명이 결사에 참여하여 함께 수도하였다.
그러나 그 많은 대중들 중, 엄격한 절제생활을 기피하면서 시비를 일으키는 한 무리가 있어 그는 이들을 교화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자기의 도덕과 법력의 부족이라 생각하며 물러나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숨어서 홀로 선정을 닦기로 작정하고 대중의 교화 및 사람들과의 교제 등을 피하고 오직 생각도 없고 집착도 없는 적정삼매(寂靜三昧)의 경지에 안주하여 마음의 근원을 궁구하였다.
그때 송나라 대혜종고(大慧宗杲)의 《어록 語錄》을 열람하다가, “선은 고요한 곳에도 있지 않고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으며, 날마다 객관과 상응하는 곳에도 있지 않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않다.그러나 고요한 곳, 시끄러운 곳, 일상 인연에 따르는 곳,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을 여의치 않고 참구해야만 한다. ”라는 문구에 이르러 홀연히 눈이 열리면서 본분(本分)을 활연히 체득하였다.
이때의 심경을, “내가 보문사 이래로 10여년 동안, 일찍이 방심한 일 없이 마음에 만족한 수행을 하여왔건만 오히려 정견(情見)을 놓아버리지 못한 채 한 물건이 가슴에 걸려 원수와 함께 있는 것 같았다. 지리산에서 《대혜어록》을 보다가 홀연히 눈이 열리어 당장에 안락하여졌다. ”고 뒷날 술회하였다. 이로써 그는 세번째의 심기일전을 한 것이다.
그뒤 그의 도력을 좇아 모여드는 수행인들이 차츰 많아지자, 새로운 결사의 도량을 구하고자 제자 수우(守愚)로 하여금 낙동강 이남의 절을 찾아보게 하였다.이때부터 머무른 절이 송광사(松廣寺)이다.
1205년(희종 1) 지리산에서 송광사로 와서 조정의 뜻에 따라 120일 동안 큰 법회를 베풀었다.
이때 《대혜어록》 30권을 강설하였고, 대중의 지도는 주로 대혜선사의 간화선법(看話禪法)으로써 하였다.
1109년 당나라 규봉종밀이 찬술한 《법집별행록 法集別行錄》을 절요(節要)하고 사기(私記)를 부연하여 《법집별행록병입사기 法集別行錄竝入私記》 1권을 저술하였다. 이것은 불법을 공부하는 자가 먼저 부처와 조사의 진실한 가르침에 의하여 올바른 지견을 선택한 다음, 그 이론과 지식을 놓아버리고 자기 마음을 반조하여 안심입명(安心立命)의 길을 찾으면 헛되이 시간을 허비하지 않을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즉, 교와 선을 따로 나누어 보지 말고 부처와 조사의 말씀과 가르침을 바로 이해하여 참선하면 그 요령을 얻게 된다는 선교상자론(禪敎相資論)을 펴고 있으며, 문자에 사로잡히는 사람들은 간화선법을 취하라고 가르쳤다. 이 글은 지눌이 수행자들을 위하여 남긴 최후의 수행지침서이기도 하다.
10여년 동안 송광사를 중심으로 새로운 선풍을 일으키다가 1210년 3월 27일 대중들과 함께 선법당(善法堂)에서 문답을 끝낸 뒤 주장자로 법상(法床)을 두세번 치고, “천가지 만가지가 모두 이 속에 있다. ”는 말을 남긴 다음 법상에 앉아 입적하였다.
7일 후 화장을 하여 오색사리 수백개를 거두어 수선사 북쪽에 탑을 세우고 봉안하였다. 문인에는 천진(天眞)·확연(廓然)·수우·인민(仁敏)·가혜(可慧)·혜심(慧諶) 등 수백명이 있다.
저서로는 《권수정혜결사문》 1권, 《수심결 修心訣》 1권, 《진심직설 眞心直說》 1권, 《계초심학인문 誡初心學人文》 1권, 《원돈성불론》 1권, 《화엄론절요 華嚴論節要》 3권,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1권, 《간화결의론 看話決疑論》 1권, 《염불요문 念佛要門》 1권, 《상당록 上堂錄》 1권, 《법어가송 法語歌頌》 1권 등이 있다. 국사(國師)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불일보조(佛日普照), 탑호(塔號)는 감로(甘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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