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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도는 역사적 산물이다. 비록 진흥왕 원년에 풍월주가 설치되었지만 그 이전부터 존재한 선도를 바탕으로 화랑도가 편성·운용되었다. 『화랑세기』의 『후기』를 통해 낭정(郎政)의 존재를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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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정의 운용
낭정의 운용과 관련된 국법이 있었다. 『화랑세기』에는 도두 세기의 처 도리를 처벌하는 과정에 양도공이 도리를 잡아다 볼기를 치려할 때 도리가 한 말이 있다. "첩의 죄가 비록 중하나 효장과 유장의 어미입니다. 국법에 선종(仙種)을 낳은 여자가 볼기를 내놓고 매를 맞는 도리는 없습니다" 하였다. 이 말을 통하여 국법에 선종을 낳은 여자에 대한 처벌 규정까지 있었던 것을 말해준다. 당시 신라에는 그 외에 많은 법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지방 낭정
신라 왕경만이 아니라 지방 낭정의 존재를 주목할 수 있다. 흠돌의 난으로 인하여 화랑도를 폐지하고 낭도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모두 병부에 속하게 하고 직을 주었다. 그러나 지방 낭정은 옛날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중 실직(悉直, 현재의 삼척?)이 가장 성하였다고 한다. 그 풍속이 오래지 않아 서울로 퍼졌고 중신들이 오래된 풍속을 바꾸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자의태후는 득도하여 국선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고 한다. 실직에서 성한 지방 낭정은 화랑도의 부활을 가져올 수 있었다. 신라의 화랑도는 왕경만이 아니라 지방에도 있었음이 확인된다. 지방에 화랑도가 있었던 까닭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신라에서는 많은 제사를 지냈는데 그 중에는 지방에서 지내는 제사도 있었다. 그러한 제사를 지방의 화랑도들이 지낸 것일 수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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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도와 관련되었던 성원들이 될 수 있었던 조건을 밝히기로 한다. 『화랑세기』문노 조에는 좌대화랑·우대화랑·전방대화랑·진골화랑·귀방화랑·별방화랑·별문화랑 등 화랑은 12·13살의 빼어난 진골 및 대족의 자제로서 속하기를 원하는 자로써 이를 삼았다고 하였다.
화랑도의 낭정을 장악한 중간집단인 낭두는 입망 법에 의하여 될 수 있었다. 입망 법은 낭두의 처로서 임신한 자들이 선문에 들어가 상선과 상랑의 총애를 받아 그 아들을 마복자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한 상선과 상랑의 마복자가 낭두가 되었던 것이다. 낭두집단은 신라 골품제 사회가 만들어낸 독특한 집단이라 할 수 있다.
『화랑세기』를 통하여 낭도가 될 수 있는 조건도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국초부터 서민의 아들도 준수하면 곧 낭문에 나아가 낭도가 되었다고 한다. 낭도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었다. 풍월주의 부인이 화주가 되었던 것은 앞에서 보았다. 그리고 낭두의 딸들은 모두 선문에 들어가 봉화가 되었다. 서민의 딸들로 빼어나게 아름다운 자들은 낭문에 들어가 유화가 되었고 30살이 되기 전에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여기서 화랑도가 남자들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5세 풍월주 유신공(612-616)이 춘추공에게 지금은 비록 왕자나 전군이라 하더라도 낭도가 없으면 위엄을 세울 수 없다고 한 것을 주목할 수 있다. 이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말이다. 최고 지배세력들이 낭도들을 거느리려 하였던 사정을 쉽게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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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는 스스로 낭도를 거느렸던 화랑들이 있었다. 풍월주가 설치되기 전인 법흥왕 대에 이미 위화랑은 낭도를 거느렸던 것이 분명하다. 지소태후는 그러한 위화랑의 낭도를 원화로 삼으려던 남모에게 소속하게 하였던 것도 볼 수 있다. 4세 풍월주 이화랑 대에 그 부제였던 토함의 동생 사다함은 묘량의 풍모를 가지고 있어 낭도들이 많이 따랐다고 한다. 사다함은 나이가 장년에 이르기도 전에 스스로 낭도를 거느려 자못 국선이라고 이를 만 하다고 하였다. 당시 사다함의 낭도 천명도 충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한다. 그 때 무관랑 또한 인망이 있어 사도(私徒)를 많이 거느렸다. 6세 풍월주 세종은 금지옥엽의 귀한 왕족이었지만, 능히 사다함공의 어루만짐의 도를 이어 낭도를 많이 뽑아 당을 이루었고 도의에 힘써 상하에 두루 미쳤다. 세종이 풍월주의 지위에 오르나 문노의 낭도가 세종에게 속하게 되었다. 이 경우 문노의 낭도들은 문노를 따라 사다함 밑에 갔다가 사다함이 죽자 다시 문노를 따라 세종에게 갔던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한 명의 화랑에 속한 낭도들도 나이가 차면 낭도로서의 활동을 그만두고 낭적에서 이름을 지우는 양명을 하였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나이가 든 화랑들이 낭적에서 양명을 하고 낭도들도 양명을 하였지만새로운 화랑들이 등장하여 화랑도는 계속 유지되어 나갔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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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도간의 애(愛), 형제애
신라 사람들이 사용한 언어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 중 화랑도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그들이 사용한 형제라는 용어의 의미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실이 세종에게 권하여 말하기를 "사다함 종형<종질이다. 그런데 그 때 사람들이 서로 사랑(愛)하면 형제라 하였다. 그러므로 형이라 불렀다>이 나를 사모하여 죽었다. 죽음에 임하여 한 말 한마디를 들어주지 않으면 곧 장부가 아닙니다" 하였다. 당시 신라인들이 서로 사랑하면 형제로 불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화랑과 화랑 사이의 관계를 보면 그와 같은 형제관계가 적지 않게 찾아진다. 그러한 관계는 형제애(兄弟愛)라고 할 수 있다. 이 형제애는 화랑도의 실체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화랑들 사이의 이러한 사랑은 화랑도에서 서로 끌고 밀어주는 관계로 이어졌다. 화랑들 사이에 맺어진 이러한 관계는 단순히 화랑도 안에서 낭계의 승진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화랑도에서 양명하고 난 후 관직을 가졌을 때도 서로 밀고 끌어주었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화랑도에서 맺어진 형제애가 평생을 지속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라 화랑도의 형제애는 '소년애'로 불리는 스파르타의 '파이데라스티아(paiderastia)'와 흡사하다.
평생을 이어간 화랑들의 관계
화랑도는 낭도부곡으로 편제되었다. 화랑과 화랑들은 낭도부곡에 의하여 풍월주-부제-전방화랑 등의 자리를 차지하여야 하였다. 그런데 새로운 풍월주가 세워지면 그를 따르는 자들이 부제-전방화랑의 지위로 승진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 화랑들 사이에 끌고 밀어주는 관계가 있었다. 이러한 풍월주-부제-전방화랑으로 이어지는 관계나 풍월주-부제-우방대화랑-우방화랑으로 이어지는 화랑들의 연결 관계는 신라 화랑도의 한 특징이기도 하다.
불신지신(不臣之臣)과 방외우(方外友)
화랑과 화랑 사이의 관계는 형제애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화공이 (문노)공을 사다함의 스승으로 삼고 낭도로 하여금 공경하여 받들도록 하였다. 지소태후가 이상하게 여겨 물으니, 이화공이 '천자에게도 오히려 불신지신(不臣之臣)이 있는데, 하물며 선도는 지조가 굳고 인격이 결백하고 기품이 높으니 한 가지 법으로 규제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신의 별파유군(別派遊軍)입니다' 하였다. 세종이 6세 풍월주가 되자 친히 문노의 집으로 찾아가 "나는 감히 그대를 신(臣)으로 삼을 수 없소. 청컨대 나의 형이 되어 도와주시오" 하였다. 말이 심히 간절하여, 문노가 굽혀 세종을 섬겼다. 여기서 불신지신 관계 속에서도 사실 형제애가 작동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세종이 설원랑(설화랑)에게 풍월주의 지위를 전하여 주었을 때 금태자(진지왕) 또한 미실과 서로 사귀어 정을 맺는 것을 좋아하여 설원·미생 등과 사귀어 방외우(方外友)가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방외우는 신분을 떠난 친구를 의미한다. 이와 같이 신라 사람들은 골품제 사회에서도 신분을 떠나 벗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신라인들에게 화랑과 화랑의 관계는 형제애와 종·속 관계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하게 된다. 여기서 문노는 어떤 인물이었는지 궁금하여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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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방법으로서 형제애·중망·의리
화랑도를 거느리는 공식적인 방법은 낭도부곡을 통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화랑도를 거느리는 또 다른 방법이 있었다. 실제로 낭도부곡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도 거느렸던 사실이 확인된다. 실제로 화랑도를 거느리는 방법을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화랑이 화랑을 거느리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앞에서 본 형제애라고 할 수 있다. 화랑도는 형제애로 뭉쳤고 형제애로 다스려지는 조직이었던 것이다. 풍월주가 되기 위해서는 중망(衆望)이 있어야 하였다. 화랑 개인의 자질이 화랑도를 거느린 강력한 힘이 되기도 하였다. 화랑에 따라 낭도를 다스린 방법이 달랐다. 사다함은 사람을 사랑함을 자기와 같이 하는 방법으로 낭도를 거느릴 수 있었다. 유신공은 나이가 15살일 때 호림공의 부제가 되었는데 커다란 도량을 가지고 있어 낭도들을 능히 다스렸다고 한다. 사다함은 호협을 좋아하였다고 한다. 화랑도 사이에 의리(義理)가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그런데 화랑도는 호협을 좋아하거나 의협의 인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6세 풍월주 보종공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그는 화랑이 되어 낭두를 아재비(叔)이라고 불렀고 한 번도 그 호칭을 바꾼 적이 없었다. 그는 염장공을 부제로 삼았는데 오히려 형과 같이 섬겼다. 그런가 하면 양도공은 사랑하고 미워함이 심히 치우쳐 마음속에 성이 나면 종신토록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아랫사람들이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것이 신라의 화랑도였다.
행뢰(行賂)와 산재(散財)
때로는 재물이 화랑도를 거느리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7세 풍월주 설화랑과 10세 풍월주 미생랑이 낭도를 거느린 방법은 다른 풍월주들과 차이가 있었다. 그들은 뇌물을 주어 낭도들의 불복을 막을 수 있었다. 미실은 낭도들에게 행뢰(行賂), 즉 뇌물을 주어 미생공의 지위를 일으키니 이해에 밝은 자들이 많이 따랐다고도 한다. 미실은 7세 풍월주 설화랑과 10세 풍월주 미생랑을 위하여 낭도들에게 뇌물을 준 것을 볼 수 있다. 그것도 낭도를 거느리는 한 방법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풍월주 중에는 재물을 주어 낭도들의 우러러봄을 얻은 경우도 있다. 12세 풍월주 보리공과 만룡낭주는 재물을 모두 나누어 주었기에 낭도들이 우러러보기를 부모같이 하였다고 한다. 보리공과 만룡낭주는 무릇 근심과 재난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가서 위로하고 구호하여 주었다. 그 때 사람들이 두 성인이 순행하며 다스리는 것에 비교하였다. 또한 14세 풍월주 호림공은 마음가짐이 청렴하고 곧았으며 재물을 풀어 무리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그 때 사람들이 탈의지장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화랑들에게는 각기 후견세력들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그 밑의 화랑, 낭두들도 일정한 후견세력을 가졌다. 그 중 낭두는 상선과 상랑의 마복자들이 임명되었기에 그들을 마복자로 삼았던 상선과 상랑을 후견 세력으로 가졌던 것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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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도의 승진
화랑도에는 낭계(郎階)가 있었다. 화랑·낭두·낭도 모두 계급이 있었다. 따라서 화랑도의 구성원들은 그가 속한 화랑·낭두·낭도 집단에서 승진을 하는 문제가 있었다. 세 집단 모두에게 승진의 사다리가 따로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화랑들은 묘화랑-소화랑-좌방·우방·전방 화랑-좌방·우방·전방 대화랑-부제-풍월주로 이어지는 승진과정이 있었다. 물론 대화랑-부제-풍월주는 화랑세습 가문이나 왕의 측근세력들이 임명되었던 것을 볼 수 있다. 낭두들은 원래 7단계의 승진과정이 있었는데 22세 풍월주 양도공이 9단계로 늘린 바 있다. 낭도들에게도 승진의 단계는 있었다. 두 가지의 길이 있었다. 하나는 능력에 따른 것이 아니라 나이에 따른 것이었다. 13·14살에 동도(童徒)가 된 낭도는 18·19살이 되면 평도(平徒)가 되었고 다시 23·24살이 되면 대도(大徒)가 되었다. 그리고 30살이 되면 병부에 속하거나 농공(農工)에 종사하는 일로 돌아가거나 향리의 장이 되기도 하였다.
화랑도의 임기
화랑·낭두·낭도에게는 임기가 있었다. 풍월주나 부제의 경우 정해진 임기는 없었다. 그러나 540년에서 681년까지 32명의 풍월주가 있었다는 것은 풍월주들이 일정 기간이 지나면 그 지위를 물려주었던 것을 의미한다. 풍월주 중 가장 오래 재위한 사람은 14세 풍월주 호림공으로 10년간 그 자리에 있었다. 3세 모랑공, 7세 설화랑, 30세 천관이 8년간 재위하였다. 9세 비보랑, 10세 미생랑, 11세 하종. 20세 예원공, 28세 오기공은 3년간 재임하였다. 정해진 임기가 없었지만 풍월주는 대체로 3년간 재위하는 것을 관행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낭두들은 풍월주보다 나이가 많아도 그 지위를 차지하였다. 24세 천광공 대에 대노두 찰인은 60이 넘었는데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천광공은 가야파 찰인을 미워하여 파면시키고, 진골정통의 구두 만덕을 대도두로 삼고, 당두의 아들 대원신통파 당보를 대노두로 삼았다. 천광공은 규칙을 새로이 정하였다. 그에 따르면 대노두는 60살까지, 대도두는 55살까지, 도두는 50살까지, 대두와 상두는 45살까지, 낭두와 대낭두는 40살까지로 한정하였다. 별장은 각기 그 지위에 따르게 하였다고 한다. 낭도들은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13·14살에 낭도가 되어 동도·평도·대도를 거쳐 30살이 되면 화랑도에서 물러났다. 원화도 30살에 이르러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풍월주의 임명과 왕
풍월주의 임명에는 어떤 형태로던 왕이 관련되었다. 풍월주의 임명에 지소태후·미실 등이 힘을 발휘한 바 있다. 그 경우도 비록 왕명은 내리지 않았더라도 왕의 허락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왕의 동의나 허락 없이 풍월주를 임명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풍월주의 퇴임
『화랑세기』에 나오는 32명의 풍월주들은 일정 기간을 재위한 후에는 모두 퇴임을 하였다. 퇴임 이유가 같은 것은 아니었다. 풍월주의 퇴임이유를 크게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3세 모랑과 5세 사다함과 같이 풍월주로 재임하는 중 죽은 경우가 있다. 둘째, 본인의 의사에 의하여 물러나는 예를 들 수 있다. 2세 미진부와 4세 이화랑의 퇴임이 이에 해당한다. 셋째, 누군가의 명에 의하여 물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넷째, 정부의 관직을 차지하게 되며 풍월주의 지위를 물려주는 예들이 있다. 한편 32세 신공은 681년 김흠돌의 난으로 인하여 자의태후가 화랑도를 폐지하게 되며 그 자리를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다른 풍월주들의 퇴임과는 다른 이유로 물러난 것을 의미한다. 32명의 풍월주들은 서로 다른 이유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 부제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것이 보편적인 퇴임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모두는 아니나 부제는 풍월주의 지위를 물려받을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부제에게 풍월주의 지위를 물려주고 퇴임하는 일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고 여겨진다.
풍월주의 임명과 퇴임 절차
풍월주의 임명과 퇴임은 화랑의 법(花郞之法)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 구체적인 내용이 나오고 있다. 화랑의 법에는 후계자가 전주에게 하배(下拜)를 올리고 칭신을 한다. 양위하는 날 미실과 더불어 세종이 수레를 같이 타고 이르렀다. 설원랑이 옷을 갖추어 입고, 인부(印簿)와 검장(劒仗)을 받들어 미실·세종에게 바치고, 미실에게 선배(先拜)하고 세종에게 차배(次拜)를 하고 물러나 섰다. 세종이 미실에게 물어 말하기를 "문노는 설원에게 도맥(道?)으로는 스승이고 통맥(統?)은 아우인데 어느 자리에 앉아 마땅한가?" 하였다. 미실이 말하기를 "설원은 나의 총신이고 또 정통의 형입니다. 문노는 비록 스승이나 정도가 아닙니다. 어찌 절을 하지 않을 것입니까?" 하였다. 세종이 이에 설원에게 명하여 미실의 옆에 앉도록 하였다. 문노가 옷을 갖추고 무릎으로 걸어 나아가서, 미실에게 먼저 절하고, 다음에 세종에게 절하고, 다음에 설원에게 절하고는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고 "자질이 없습니다"하고 사양하였다. 미실이 이에 인부를 주며 "네 형을 욕되게 하지 말라" 하였다. 문노가 …을 받았다. (세종이) … 이에 부서(簿書)를 주며 말하기를 "네 (형)을 욕되게 하지 말라" 하였다. … 설원은 이에 검장을 주며 말하기를 "네 (형)을 욕되게 하지 말라" 하였다. … 옛날에는 반드시 공주 중 혼인하지 않은 자를 택하여 …을 삼아 … 인부를 …(주었)다. 전주(前主)가 검장을 주었다. 이에 이르러 미실이 (天·地·人의) 삼재지법(三才之法)을 처음으로 행하였다. 이 이후 문노는 설원에게 하배를 하고 칭신을 하였다. 풍월주의 퇴임 의식은 장엄하게 이루어진 것이 분명하다. 그 결과 후계자는 전주에게 하배하고 칭신하게 되었다.
낭도의 해산
진흥왕 29년(568) 미실이 원화가 되었다. 그 때 세종이 6세 풍월주로 있었는데 화랑의 우두머리로서 풍월주와 원화가 공존할 수 없었다. 따라서 세종이 풍월주의 지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 때 세종은 그가 거느렸던 낭도를 모두 해산하였다. 세종의 낭도들이 원화 미실의 낭도로 될 수도 있었겠으나 사정은 그렇지 않았다. 진흥왕은 설원과 미생 두 화랑이 낭도의 많은 무리를 통솔하고 조알케 한 것으로 그러한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화랑정신
화랑정신과 관련하여 우리는 두 가지를 떠올릴 것으로 짐작이 간다. 하나는 사다함·관창·김유신과 같이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충성심이다. 다른 하나는 세속5계다. 그런데 이 두 가지로는 화랑정신을 이야기하기 어렵다. 화랑들은 충성심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27세 풍월주 흠돌은 마음이 험악하고 간사한 꾀가 많아 사람들이 모두 꺼렸다고 한다. 681년에는 흠돌이 주동이 되어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화랑들은 충성심으로만 무장된 것은 아니었다. 화랑도를 순국무사로 만들어낸 것은 현대 한국사학이다. 우리는 세속5계를 화랑정신이라고 배워왔다. 화랑정신이라고 여겨온 세속5계도 새롭게 볼 필요가 있다. 세속5계는 화랑도들만이 지켜야 하는 계율이 아닌 신라의 젊은이들이 지켜야할 계율이었다. 특히 중국화가 진행되어 가는 과정에 신국의 도가 아닌 보편적인 계율을 신라인들이 지켜나간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와 같은 계율을 화랑도가 지켰던 것은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속5계를 화랑도의 계율로 만들어낸 것은 근·현대 한국사학일 뿐이다. 화랑정신은 세속5계 정도로 이야기할 수는 없다.
여기서 화랑정신이 무엇이었는지 알아 볼 필요가 있다. 문노 조에 나오는 사풍(士風)을 주목할 수 있다. 사풍은 화랑이 낭도를 사랑하고, 낭도는 화랑을 위하여목숨을 바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화랑정신은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청렴결백한 정조를 들 수 있다. 6세 풍월주 세종의 전기 「찬」에 그를 '화랑의 전형(典型)'이라고 하였다. 청렴결백한 절조를 화랑정신으로 볼 수도 있다.
둘째, 화랑들이 중시한 의리(義理)도 화랑정신으로 들 수 있다.
셋째, 재물과 관련된 화랑정신도 찾을 수 있다. 5세 풍월주 사다함은 561년 가야를 정벌한 공으로 밭을 받게 되자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다함의 처신도 화랑정신의 하나일 수 있다.
넷째, 8세 풍월주 문노를 통하여 화랑정신을 말할 수도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격검을 잘했고 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 결과 문노의 낭도들은 사(武事)를 좋아하였고 호탕한 기질이 많았다고 한다. 이는 현대 한국사학이 만들어낸 화랑정신에 가까운 것이다.
다섯째, 화랑정신에는 불신지신(不臣之臣) 즉 신하로 여기지 않는 신하를 인정하는 것도 있다. 신라인들은 뛰어난 인물을 존중하여줄 줄 아는 정신이 있었다. 그것도 화랑정신의 하나로 보면 어떨까?
여섯째, 『화랑세기』는 아니지만 『삼국사기』에 나오는 검군이라는 낭도를 통하여 화랑정신 한 가지를 더 찾을 수 있다. 검군은 궁중 사인으로 다른 사람들이 도둑질을 하는데 동참하지 않아 죽음에 이르렀다. 이것이 신라인의 정신이고 화랑정신일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검군 전에는 검군이 죽을 곳이 아닌데 죽었으니 태산 같은 귀중한 목숨을 홍모처럼 아주 가볍게 여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고 평하고 있다. 그러한 평은 고려시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한편 화랑정신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화랑들의 여러 가지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우선 화랑도가 왕을 폐위하는데 가담한 것을 볼 수 있다. 579년 진지왕의 폐위하는데 가담한 문노는 골품을 얻을 수 있었고, 문노의 화랑도들은 미천한 사람으로 고관으로 발탁되는 람들이 많게 되었다. 신라의 화랑도는 인간집단이었다. 따라서 왕을 폐위시키는데 가담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는 단순히 세속5계의 사군이충(事君以忠) 조 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풍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화랑정신에 대해서는 앞으로 검토할 문제다. 보다 다양한 화랑정신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다만 근·현대 한국사학이 발명한 순국무사로서의 화랑도를 해체하고, 신라인의 화랑정신, 사풍을 찾아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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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정·낭권 장악
『화랑세기』저술 내용 세 가지 중의 하나가 낭정의 대자(大者) 즉 화랑도 조직과 그 운용에 대한 것이다. 화랑도를 이끌어가는 낭정은 풍월주가 장악하였다. 그런데 풍월주 중에는 낭정을 돌보지 않은 예도 있다. 19세 풍월주 흠순공은 재위 4년 동안 한결같이 낭정을 돌보지 않고 낭도를 거느리고 지방에 머물렀다. 부제 예원공이 낭정을 대행하였다. 낭정이 부제와 낭두들에 의하여 장악되기도 하였다.
화랑도와 조정
화랑도 자체가 조정의 관부로 있었던 것은 아닐 수 있다. 화랑도가 국가의 공식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조정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화랑도가 조정과 무관하게 존재한 것일 수는 없다. 풍월주의 임명에 주도권을 장악한 사람들은 왕권을 등에 업고 있었고, 풍월주들은 왕권을 등에 업고 있는 사람들을 후견인으로 하여 활동을 하였다. 한편 화랑과 낭도는 나이가 차면 조정의 관직을 갖고 활동을 하였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것과 같이 진평왕 대에 검군은 사량궁 사인(舍人)으로 있으며 동시에 화랑도에 속하여 낭도로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문노의 경우 세종의 청으로 진흥왕이 급찬을 주었으나 거절하였고, 미실이 봉사(奉事)로 삼으려 하였으나 승낙하지 않았고, 진지왕의 즉위 후 지도황후가 일을 꾸며 일길찬을 내렸으나 받지 않았다. 후일 진지왕을 폐위하는 일에 가담한 공으로 아찬으로 올라 골품을 얻게 되었다. 문노는 579년 진지왕을 폐위한 후 풍월주가 되었다. 그가 풍월주로 있으며 아찬이 된 것은 조정에서 화랑도에게 일정한 대우를 한 것을 의미한다. 아찬과 같은 관위는 보수를 주는 기준이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화랑도에게 관직을 주어 일을 시키고 관위를 주어 보수를 준 것을 알 수 있다.
폐정(弊政) 개혁
화랑도의 낭정은 시간이 지나며 문제가 생겼고, 필요에 따라 새로운 제도가 만들어지며 역사적 변천과정을 거쳤다. 실제로 낭정의 옛 폐단을 개혁하고 새로운 제도를 만든 풍월주들이 있었다. 8세 풍월주 문노는 낭도부곡을 설치하였다. 12세 풍월주 보리공은 진골정통·대원신통·가야파로 갈라진 3파의 낭두들을 섞어 등용하기 위한 균등의 제도를 만들었다. 13세 풍월주 용춘은 낭도 구습을 고쳤다고 한다. 22세 풍월주 양도공은 낭두 7급을 9급으로 고쳤다. 그리고 낭두를 배출하는 입망의 법을 개혁해 인재를 뽑고 사함의 풍속을 금했다. 양도공은 유화의 폐단도 고쳤다. 화랑도 제는 한번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며 개혁되어 나갔던 것이다.
무너진 낭정
낭정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26세 풍월주 진공 대(652~656)부터였다. 진공은 27세 풍월주 흠돌, 흠돌의 부제였던 흥원 등이 모두 낭도 사병을 거느리고 위에서 낭정을 전횡하였던 것이다. 당시 한번 무너진 낭정을 바로 잡을 수 없는 상황이었던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흠돌의 난을 일으킨 소위 3간들이 낭도 사병을 장악하였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지 않나 한다. 즉 백제·고구려와 전쟁을 치르는 동안 풍월주들이 사병들을 거느리고 활동을 하였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조정에서도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 화랑들이 낭도사병을 거느렸고 그것이 낭정을 무너뜨린 바탕이 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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