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신라

36. 혜공왕(惠恭王)

오늘의 쉼터 2008. 10. 27. 22:18

 

36. 혜공왕(惠恭王)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혜공왕(惠恭王)


※ 생존기간 : (756~780)
※ 재위기간 : (765~780)


※ 본문설명

신라 36대 왕으로서 성명은 김건운(金乾運)이고 경덕왕(재위 742-765년)의 큰아들이다.

 어머니는 서불한(舒弗余) 의충(義忠)의 딸 만월부인(滿月夫人) 김씨(金氏)이며 이찬(;2등급) 유성(維誠)의 딸인 신보왕후(新寶王后)가 원비(元妃), 이찬(;2등급) 김장(金璋)의 딸인 창창부인(昌昌夫人)이 차비(次妃)이다.

혜공왕은 태종무열왕의 직계손으로 계승된 신라 중대왕실(中代王室)의 마지막 왕이다.

765년 8세에 즉위하여 한때 태후(太后)가 섭정을 하였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왕이 태학(太學)에 거둥하여 박사들에게 명하여 상서(尙書)를 강의하게 하였다. 당나라와

친교를 맺고 매년 사신을 파견하여 768년 당나라 대종(代宗)으로부터 신라왕에 책봉되었다.

재위 중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나고 흉년이 들어 민심이 흉흉하였는데도, 사치와 음탕한 생활을

일삼아 궁중의 기강이 문란해졌다.

766년 정월에 해가 두 개 나타났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2월에 왕이 몸소 신궁에 제사지냈다. 양리공(良里公)의 집 암소가 다리가 다섯인 송아지를 낳았는데, 다리 하나는 위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강주(康州)에서 땅이 꺼져 못이 되었는데, 길이와 넓이가 50여 자나 되고 물빛은 검푸른 색이었다. 10월에 하늘에서 북치는 것과 같은 소리가 났다.

767년 6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7월에 이찬(伊飡;2등급) 김은거(金隱居)를 당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책봉해 주기를 청하였다. 황제가 자신전(紫宸殿)에 나와 연회를 베풀고 접견하였다. 별 세 개가 왕궁 뜰에 떨어져 서로 맞부딪쳤는데, 그 빛이 불꽃처럼 치솟았다가 흩어졌다. 9월에 김포현(金浦縣)에서 벼이삭이 모두 쌀이 되었다.

768년 봄에 살별[혜성의 옛이름]이 동북쪽에 나타났다. 당나라 대종(代宗)이 창부랑중(倉部郞中) 귀숭경(歸崇敬)에게 어사중승(御史中丞)을 겸직시켜 보내, 부절과 책봉조서를 가지고 와 왕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신라왕(新羅王)으로 책봉하고 아울러 왕의 어머니 김씨를 대비(大妃)로 책봉하였다. 5월에 사형죄 이하의 죄수들을 사면하였다. 6월에 서울에 천둥이 치고 우박이 내려 풀과 나무들이 상하였다. 큰 별이 황룡사 남쪽에 떨어졌는데, 땅이 진동하는 소리가 천둥소리와 같았다. 우물과 샘이 모두 말랐고 호랑이가 궁궐 안에 들어 왔다. 7월에 일길찬(;7등급) 대공(大恭)이 아우 아찬 대렴(大廉)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는데, 무리를 모아 33일간 왕궁을 에워쌌으나 왕의 군사가 이를 쳐서 평정하고 9족(九族)을 목베어 죽였다. 9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10월에 이찬(;2등급) 신유(神猷)를 상대등으로 삼고 이찬 김은거를 시중으로 삼았다. 이 반란은 경덕왕(재위 742-765년)에 이어서 중대의 전제왕권 체제를 유지하려는 혜공왕 초년의 정치적 성격을 부인하려는 최초의 정치적 움직임이었다. 김은거는 이 반란의 진압에 대한 공로로 그 해에 시중에 임명되었으며, 이찬(;2등급) 신유(神猷)는 상대등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769년 3월에 임해전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5월에 누리[메뚜기]의 재해가 있었고 가뭄이 들었다. 백관들에게 명하여 각자 아는 인물들을 천거하게 하였다. 11월에 치악현(雉岳縣)에서 쥐 80여 마리가 평양(平壤)을 향하여 갔다. 눈이 내리지 않았다.

770년 정월에 왕이 서원경(西原京)에 거둥하였는데, 지나는 주와 현의 죄수들의 정상을 살펴 사면하였다. 3월에 흙이 비처럼 내렸다. 4월에 왕이 서원경으로부터 돌아왔다. 5월 11일에 살별[;혜성의 옛이름]이 오거(五車) [별자리] 북쪽에 나타났다가 6월 12일에 이르러서야 없어졌다. 29일에 호랑이가 집사성(執事省)에 들어왔으므로 잡아 죽였다. 8월에 대아찬(大阿飡;5등급) 김융(金融)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목베여 죽임을 당하였다. 11월에 서울에 지진이 일어났다. 12월에 시중 은거(隱居)가 관직에서 물러났으므로 이찬 정문(正門)을 시중으로 삼았다.

772년 정월에 이찬(2등급) 김표석(金標石)을 당나라에 보내 새해를 축하하니, [당나라] 대종(代宗)이 위위원외소경(衛尉員外少卿)의 관작을 주어 돌려 보냈다.

773년 4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새해를 축하하고, 금, 은, 우황, 어아주(魚牙紬), 조하주(朝霞紬) 등의 토산물을 바쳤다. 6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은혜에 감사하니, 대종이 연영전(延英殿)에서 접견하였다.

774년 4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9월에 이찬(;2등급) 김양상(金良相;선덕왕)이 상대등에 임명하였다. 즉, 김양상은 경덕왕대에 시중을 역임하였으나 778년에 있었던 대공의 난에 연루되어 시중직에서 물러나고 왕의 측근인 김은거에게 시중직을 물려주었다. 이로써 보면 김양상은 적어도 친혜공왕적(親惠恭王的)인 인물은 아니었다. 그런데 김양상이 다시 귀족 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은 반혜공왕적인 귀족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였음을 의미하며, 이것은 전제왕권 중심의 중대사회에서 귀족중심의 사회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10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새해를 축하하고 연영전에서 [황제를] 뵈니, 원외위위경(員外衛尉卿)의 관작을 주어 돌려 보냈다.

775년 정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3월에 이찬(;2등급) 김순(金順)을 시중으로 삼았다. 6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회하였다. 이찬(伊飡;2등급) 김은거(金隱居)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목베여 죽임을 당하였다. 8월에 이찬 염상(廉相)이 시중 정문(正門)과 함께 반역을 꾀하다가 목베여 죽임을 당하였다.

776년 정월에 교서를 내려, 관직의 이름을 모두 옛 것으로 회복시켰다. [왕이] 감은사(感恩寺)에 거둥하여 바다에 망제(望祭)를 지냈다. 2월에 국학(國學)에 거둥하여 강의를 들었다. 3월에 창부(倉部)에 사(史) 8인을 더 두었다. 7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회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10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777년 3월에 서울에 지진이 일어났다. 4월에 또 지진이 일어났다. 상대등 김양상(金良相;선덕왕)이 왕에게 글을 올려 시국의 정치를 극론(極論)하였다. 10월에 이찬(;2등급) 주원(周元)을 시중으로 삼았다.

779년 3월에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 백성들의 집이 무너지고 죽은 사람이 100여 명이었다. 금성[太白]이 달에 들어갔다. 백좌법회(百座法會)를 열었다.

780년 정월에 누런 안개가 끼었다. 2월에 흙이 비처럼 내렸다. 왕은 어려서 왕위에 올랐는데, 장성하자 음악과 여자에 빠져 나돌아 다니며 노는 데 절도가 없고 기강이 문란해졌으며,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나고 인심이 등을 돌려 나라가 불안하였다. [이에] 이찬(;2등급) 김지정(金志貞)이 반란을 일으켜 무리를 모아서 궁궐을 에워싸고 침범하였다. 4월에 상대등 김양상(金良相;선덕왕)이 이찬 경신(敬信;원성왕)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김지정 등을 죽였으나, 왕과 왕비는 반란군에게 살해되었다. 양상 등이 왕의 시호를 혜공왕(惠恭王)이라 하였다. 첫째 왕비 신보왕후(新寶王后)는 이찬 유성(維誠)의 딸이고 둘째 왕비는 이찬(;2등급) 김장(金璋)의 딸인데 사서(史書)에는 궁중에 들어온 날짜가 빠져 있다. 그 뒤를 이어 김양상이 선덕왕이 되었다.

※ 이미지설명

경남 사천에서 최근 발견된 8세기 신라 옛 비석에서 신라 제38대 원성왕(785∼798년)의 장인인 ‘신술(神述)’뿐만 아니라 제36대 혜공왕(惠恭王·758∼780년)의 생전 이름이 확인됐다.
나아가 이 비석에서는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자황제인 측천무후(혹은 즉천무후·690∼705) 때 만든 특수문자인 소위 ‘즉천무후자(則天武后字)’도 발견됐다.

이에 따라 이 사천 고비의 건립 연대는 혜공왕이 재위하던 무렵이며, 측천무후 사망과 함께 중국에서는 이미 사용되지 않던 측천무후자가 신라에서 한동안 사용됐음이 밝혀졌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김창겸 선임편수연구원(신라사학회 회장)과 손환일 박사(고려대 서예사 전공)는 4일 비문을 정밀조사하는 과정에서 현존 비문 앞면 두 번째 줄에 적힌 문장을 ‘國主天雲大王上大等’(국주천운대왕상대등)으로 보인다고 발표했다. 이에 앞서 비문발굴자인 경남문화재연구원은 이 문장을 ‘國王(?)流(?)雲(?)大王上大等’ 혹은 ‘國出(?)獵(?)雲(?)大王上大等’으로 읽을 수 있다고 지난달 29일 발표한 바 있다.

김창겸 연구원과 손환일 박사는 ‘國王’(국왕) 혹은 ‘國出’(국출)이 ‘國主’(국주·뜻은 국왕과 같음)이며 ‘流雲’(류운) 혹은 ‘獵雲’(랍운)일 가능성이 있다고 판독이 제시된 대목은 ‘天運’(천운)임을 확인했다. 특히 손 박사는 ‘流雲’ 혹은 ‘獵雲’으로 발표된 문구 중 첫 글자가 ‘天’(천)에 대한 측천무후자임을 밝혀냈다. 이 같은 판독에 따르면 ‘國主天雲大王上大等’이라는 문구는 “(현재의) 국주(국왕)이신 천운(天雲) 대왕(大王)과 상대등(上大等)”으로 파악되며 ‘천운’은 혜공왕의 이름이다. 상대등은 지금의 국무총리에 해당되는 당시 신라의 최고위 관직이다.

김창겸 박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혜공왕은 이름이 ‘건운’(乾運)이었다”면서 “이를 비문의 ‘天雲’과 비교할 때 乾과 天은 모두 ‘하늘’이라는 뜻이며 雲과 運은 음이 같으므로 결국 문헌기록에 나오는 ‘乾運’과 비문에 보이는 ‘天雲’은 같은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김 박사는 이어 “이렇게 될 경우 이 비문은 혜공왕이 생전에 즉위하고 있을 때 건립된 것이 되므로 건립시기는 758∼780년 사이가 된다”면서 “같은 비문에 보이는 원성왕의 장인 ‘神述’(신술)의 활동연대를 미뤄 볼 때도 확실하다”고 덧붙였다.

김 박사는 이와 거의 똑같은 신라시대 표기 방식으로 혜공왕 다다음인 제38대 원성왕(785∼798년) 때 작성된 갈항사(葛項寺) 석탑(원래는 경북 김천에 있었으나 지금은 경복궁 내에 있음)에 새겨진 금석문을 들었다. 원성왕은 생전 이름이 김경신(金敬信)인데, 이 금석문에는 그를 가리켜 ‘敬信太王’(경신태왕)이라고 하고 있다. 이는 이번 사천 고비에 보이는 ‘天雲大王’과 그 표기 방식이 완전히 같다고 김 박사는 말했다. (이미지설명 출처 : 세계일보: 송민섭기자, 연합)



※ 본문참고 : 두산대백과사전
※ 본문출처 : 차석찬의 역사창고
※ 이미지출처 : 연합뉴스

'뿌리와 역사 > 신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38. 원성왕(元聖王)   (0) 2008.10.27
37. 선덕왕(善德王)  (0) 2008.10.27
35. 경덕왕(景德王)  (0) 2008.10.27
34. 효성왕(孝成王)  (0) 2008.10.27
33. 성덕왕(聖德王)   (0) 2008.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