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신라

34. 효성왕(孝成王)

오늘의 쉼터 2008. 10. 27. 22:13

 

34. 효성왕(孝成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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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성왕(孝成王)



※ 생전기간 : (?∼742)


※ 재위기간 : (737∼742)




※ 본문설명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승경(承慶). 성덕왕의 둘째 아들로 형인 태자 중경(重慶)이 717년에 죽었으므로 724년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성덕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어머니는 성덕왕의 계비(繼妃)인 소덕왕후(炤德王后)이고, 비는 739년에 맞아들인 이찬(伊飡) 김순원(金順元)의 딸 혜명(惠明)이다.

효성왕은 즉위하면서 사정부(司正府)의 승(丞)과 좌우의방부(左右議方府)의 승을 모두 좌(佐)로 바꾸었는데 이것은 ‘승(丞)’자가 왕의 이름에 저촉되기 때문이다.

즉위하던 해(737) 3월에 이찬 정종(貞宗)을 상대등에 임명하여 귀족회의를 관장하게 하고 아찬(阿飡) 의충(義忠)을 집사부(執事部)의 중시(中侍)에 임명하여 행정을 담당하게 하였다.

739년 의충이 죽자 이찬 신충(信忠)을 중시에 임명하고, 왕제(王弟)인 헌영(憲英:뒤의 경덕왕)의 관등을 파진찬(波珍飡)으로 하여 태자로 삼았다.

또, 전 왕인 성덕왕 때에 정상화된 당나라와의 외교적 관계를 한층 강화하는 한편, 외교적 통로를 이용하여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입하였다.

특히 738년에 당나라 사신 형숙(邢璹)이 신라에 올 때 당나라 현종(玄宗)이 그에게 ‘신라는 군자(君子)의 나라’라고 일러준 것을 보아도 당시 신라의 문화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이때 형숙은 《노자도덕경 老子道德經》을 비롯한 서책을 왕에게 바쳤는데, 여기서 신라의 선진문물에 대한 수용자세를 엿볼 수 있다.

740년에는 파진찬 영종(永宗)의 모반사건이 있었으나 모두 평정되었다. 반란의 원인은 영종의 딸이 효성왕의 후궁이 되어 왕의 총애를 받았는데 왕비가 이를 시기하여 그의 족당(族黨)과 더불어 후궁을 모살하였다.

이에 영종이 왕비의 족당을 원망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보면 단순한 여인들의 투기가 정치적 반란을 유발한 것 같으나 실제는 성덕왕대에 전성을 구가하던 중대(中代) 왕실의 전제왕권이 점차 약화되면서부터 그간에 축적되었던 정치적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즉, 이것은 전제왕권 하에서 억압되었던 귀족세력이 왕권의 약화를 틈타 다시 세력을 뻗치기 시작하였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741년에 귀족세력의 대표인 상대등 정종과 경덕왕대에 상대등으로 활동하는 사인(思仁)이 왕을 대신하여 열병(閱兵)한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재위 6년째되던 742년 5월에 죽으매 시호를 효성이라 하고, 유명(遺命)에 따라 법류사(法流寺) 남쪽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뿌렸다.

※ 보충설명

효성왕이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에 현명한 신하 신충과 궁중 뜰의 잣나무 아래서 바둑을 두며 말하였다. "다음 날 내가 결코 그대를 잊지 않을 것을 이 잣나무를 두고 맹세하리다." 하니 신충은 일어나 절을 했다. 몇 달이 지나 왕이 즉위하고 공로가 있는 신하들에게 상을 줄 때 신충을 잊고 차례에 넣지 못했다. 신충이 원망하여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붙였더니 잣나무가 갑자기 누렇게 되었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살펴보도록 하였는데 나무에서 노래를 찾아내어 바쳤다. 왕이 크게 놀라 "일이 너무 복잡하고 바빠서 공신을 잊었구나."하고 불러서 벼슬을 주었다. 나무가 다시 살아났다.


※ 본문설명 : 엠파스지식/한국역사/한국의 왕
※ 보충설명 : www.seelotus.com
※ 이미지출처 : www.seelot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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