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신라

35. 경덕왕(景德王)

오늘의 쉼터 2008. 10. 27. 22:16

35. 경덕왕(景德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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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덕왕(景德王)



※ 생존기간 : (?∼765)


※ 재위기간 : (742∼765)




※ 본문설명

1. 가계·정치제도
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헌영(憲英)으로 알려진다. 성덕왕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소덕왕후(炤德王后)이다.
효성왕의 친동생으로서 효성왕에게 아들이 없어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처음에는 이찬(伊飡) 김순정(金順貞)의 딸을 왕비로 맞았으나,

743년 다시 서불한(舒弗邯) 김의충(金義忠)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경덕왕 때에 이르러 새로운 귀족들이 세력을 확장하여 왕권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에 경덕왕과 행정 책임자였던 '중시'는 왕권강화를 위해 관제정비와 개혁조치를 실시했다.

744년에 이찬 유정(惟正)이 '중시'에 임명된 이후, 대정(大正), 조량(朝良), 김기(金耆), 염상(廉相), 김옹(金邕), 김양상(金良相) 등 7인이 경덕왕 때에 중시를 지냈다.

특히, 747년에 중시의 명칭을 '시중(侍中)'으로 바꾸었으며, 또 국학에 제업박사(諸業博士)와 조교를 두어 유학 교육을 진흥시키고, 748년에는 정찰(貞察) 1명을 두어 관리를 규찰하게 하여, 전제왕권 체제를 유지하려 하였다.

왕권을 유지하려는 경덕왕의 노력은 전제왕권을 안정시킨 성덕왕의 위업을 기리기 위하여 거대한 성덕대왕신종을 조성하기 시작한 데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 밖에도 749년에 천문박사 1명과 누각박사(漏刻博士) 6인을, 758년에는 율령박사 2인을 두었다. 이것은 모두 백성을 생각하는 이상적인 유교정치의 기술적인 분야를 발전시키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덕왕의 개혁적 제도정비는 귀족세력을 견제하면서 전제왕권체제를 강화하려는 일종의 한화정책(漢化政策: 중국의 것을 모방하는 정책)으로 이해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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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도개혁 비판
따라서 한화정책은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745년에 이르러 귀족세력을 대표하여 상대등이 된 김사인(金思仁) 등이 그 비판의 주역이었다.

그는 756년 상소에서, 최근의 빈번한 천재지변을 들어 현실정치의 모순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하고, 시중에 대해서 정치적 책임을 물었다. 이때의 비판내용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경덕왕이 추진한 한화적 개혁정치가 비판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비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김사인은 757년 병을 이유로 하여 상대등에서 물러났고 대신 왕의 측근인 이찬 신충(信忠)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755년에 시중으로 있는 동안 김사인의 비판을 받았던 김기가 757년부터 적극적으로 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즉, 757년에는 지방 9개주의 명칭을 비롯한 군현의 명칭을, 759년에는 중앙관부의 관직명을 모두 중국식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덕왕과 집사부가 추진한 한화적 개혁정치는 성공하지 못했다. 다음의 혜공왕 때에 가서 모두 옛 명칭으로 환원된 것은 이같은 사실을 잘 말해준다. 이것은 다시 혜공왕 때에 귀족세력의 정치적 비중이 왕권보다 높아지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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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외교와 말년의 정치
경덕왕은 당나라와의 외교관계에 있어서는, 전통적 방법인 조공과 하정(賀正)의 사신을 11회나 당나라에 파견함으로써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한편, 일본과의 관계는 그리 원만하지 못하였다. 경덕왕이 즉위하던 해에 일본 사신이 왔으나 받아들이지 않았고, 또한 753년에 다시 왔으나 오만하고 무례하다는 이유로 왕이 접견하지 않고 돌려보냈다는 기록으로 이를 알 수 있다.

757년에 내외관리의 월봉을 혁파하고 다시 녹읍을 부활시켰다. 이것은 새로이 성장하는 귀족세력의 경제적인 욕구가 지금까지 세조(歲租)만 받던 월봉을 혁파하게 하고, 녹읍의 부활을 제도화시킨 것이라 하겠다.

경덕왕 말기에 정치적으로 성장한 귀족세력은 763년에 경덕왕의 측근세력이었던 상대등 신충과 시중 김옹을 면직시켰다. 왕당파인 이들의 면직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기록상에 나타나지 않으나, 왕권에 대한 귀족세력의 반발의 결과로 보인다.

이러한 추측은 김옹이 물러난 뒤 약 4개월의 공백기를 거쳐, 764년 만종(萬宗)과 양상이 각각 상대등과 시중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여기서, 양상은 나중에 상대등으로서 혜공왕을 시해하고 신라 하대의 첫 왕인 선덕왕으로 즉위하는 인물로서, 경덕왕 때에 이미 귀족세력을 대표하고 전제왕권에 도전하는 존재였다.

따라서, 경덕왕 말년의 정치는 왕권과 귀족세력의 정치적 타협 위에서 존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경덕왕은 죽은 후 모지사(牟祗寺)서쪽 언덕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왕릉은 월성군 내납면 부지리에 있다.


※ 본문참고 :


      三國史記
      三國遺事
      新羅政治社會史硏究(李基白, 一潮閣, 1977)
      新羅의 祿邑에 對하여(姜晉哲, 李弘稙博士回甲紀念韓國史論叢, 1969)
      新羅中代王室과 奉德寺(李昊榮, 史學志 8, 1974)
      武烈王權의 成立과 活動(申瀅植, 韓國史論叢 2, 1977).


※ 본문출처 : 엠파스 지식/한국역사/한국의 왕
※ 이미지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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