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신라

17. 내물마립간(柰勿麻立干)

오늘의 쉼터 2008. 10. 26. 20:17

 

 17. 내물마립간(柰勿麻立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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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물마립간(柰勿麻立干)



□ 생존기간 : (?~402)

   □ 재위기간 : (356~402)




※ 본문설명

신라 17대 왕으로서 성은 김씨이며 나밀(那密)이라고도 한다. 구도(仇道) 갈문왕의 손자이며, 각간(角干) 말구(末仇)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휴례부인(休禮夫人) 김씨, 비(妃)는 13대 미추이사금(;재위261-284년)의 딸인 보반부인(保反夫人) 김씨이다. 아버지 말구는 13대 미추이사금(;재위261-284년)의 동생이다.

한편, 왕이라는 칭호 대신에 《삼국사기》에는 [이사금(尼師今)]으로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에는 [마립간]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 내물왕 때에 [마립간]의 왕호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이해하여 《삼국유사》의 설을 따르고 있다. 마립간은 수석장(首席長) 또는 후세의 군장(君長)에 대한 존칭어인 상감(上監)에 해당하는 왕호로 짐작되고 있다. 이와함께 내물마립간은 신라의 귀족들인 대등(大等)으로 구성되는 귀족회의가 중앙정청 (中央政廳)으로서의 성격을 가지는, [남당(南堂)]에서 주재하는 명실상부한 최고 통치자로서 군림하게 되었다. 또한 내물마립간 이후부터는 박(朴), 석(昔), 김(金)의 삼성(三姓)이 왕위를 교대로 계승하는 현상이 없어지고, 김씨에 의한 왕위의 독점적 세습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현상도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하여 가능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356년 흘해이사금(;재위310-356년)이 후사 없이 죽었으므로 그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357년 봄에 왕이 신하들을 곳곳에 보내어 홀아비와 홀어미, 부모 없는 아이들, 아들 없는 넑은이들을 위로하고 곡식을 나누어 주게 하였다. 또한 형제간에 우애가 두텁고 효심이 뛰어난 사람에게는 벼슬을 주었다.

358년 2월에 몸소 시조묘에 제사지냈다. 자주색 구름이 묘당(廟堂) 위에 둥글게 서렸고 신비스러운 새[神雀]들이 시조묘(始祖廟)의 뜰에 모여들었다.

362년 4월에 시조묘 뜰에 있는 나뭇가지가 다른 나뭇가지와 이어져 하나가 되었다.

364년 4월에 왜병의 큰 무리가 쳐들어오자 초우인(草偶人:풀로 만든 허수아비) 수천을 만들어 옷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 토함산(吐含山) 기슭에 벌여 세우고, 용사 1,000명을 따로 부현(斧峴) 동쪽에 매복시켰다가 왜병을 전멸시켰다.

366년 월에 백제인이 와서 예방하였다. 여름 4월에 홍수가 나서 산 13곳이 무너졌다.

368년 봄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좋은 말 두필을 바쳤다.

372년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었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려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사자를 보내 창고를 열어 그들을 진휼하였다.

373년에는 백제의 독산성주(禿山城主)가 남녀 300명을 이끌고 투항하자 이들을 받아들여 6부(部)에 분거(分居)하고, 이들을 돌려보내라는 백제왕의 요청을 일축하였다. 그리고 5월에 서울에 물고기가 비에 섞여 떨어졌다.

376년 7월에 부사군(夫沙郡)에서 뿔이 하나 달린 사슴을 바쳤다. 크게 풍년이 들었다.

379년 4월에 양산(楊山)에서 작은 참새가 큰 새를 낳았다.

381년에 봄과 여름에 가물었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렸다. 그리고 전진에 사신으로 파견된 위두(衛頭)와 전진의 왕 부견 사이의 대화는 당시 신라의 사정을 살피는 데 있어서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태평어람 太平御覽》에 인용되어 있는 《진서 秦書》의 기사에 의하면 [그대가 말하는 해동(海東-新羅)의 일이 예와 같지 않으니 어찌된일인가.]라는 부견의 질문에 대하여 위두는 [중국에서 시대가 달라지고 명호(名號)가 바뀌는 것과 같으니 지금 어찌 같을 수 있으리오.]라고 대답하고 있다.이것은 중국사회에 변화가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라사회의 변화도 당연하다는 것으로서 신라의 고대국가체제 정비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388년 4월에 도성에 지진이 있었다. 6월에도 지진이 있었으며, 겨울에도 얼음이 얼지 아니하였다.

389년 정월에 서울에 돌림병이 크게 번졌다. 2월에 흙이 비처럼 내렸다. 7월에 누리의 재해가 있었고 곡식이 여물지 않았다.

392년에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위력에 눌려 사신과 함께 이찬(伊飡;2등급)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을 볼모로 보냈다.

393년 5월에 왜인이 와서 금성(金城)을 에워싸고 5일 동안 풀지 않았다.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나가 싸우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지금 적들은 배를 버리고 [육지] 깊숙이 들어와 사지(死地)에 있으니 그 칼날을 당할 수 없다'고 말하고 성문을 닫았다. 적이 아무 성과없이 물러가자 왕이 용맹한 기병 200명을 먼저 보내 돌아가는 길을 막고, 보병 1천 명을 보내 독산(獨山)까지 추격하여 양쪽에서 공격하여 크게 쳐부수었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395년에는 말갈(靺鞨)이 침입하자 이를 실직(悉直)에서 격파하였다.

397년 7월에 북쪽 변방 하슬라(何瑟羅)에 가뭄이 들고 누리[蝗(황) ;메뚜기]의 재해가 있어 흉년이 들었으며 백성들이 굶주렸다. 죄수를 살펴서 사면하고[曲赦] 1년의 조(租)와 조(調)를 면제해 주었다.

399년 7월에 누리[蝗(황) ;메뚜기]가 날아와 들판을 덮었다.

400년 8월에 살별[;혜성의 옛이름]이 동쪽에 나타났다. 10월에 왕이 탔던 내구마(內구馬)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었다.

그리고 광개토대왕비[사진]에 보면 "400년 광개토대왕이 보기병 5만 병사를 보내어 신라를 구원토록 하였는데 종남거성(從男居城)을 지나 신라도읍에 이르러 왜적을 패퇴시켰다. 도망가는 왜구를 따라서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발성(拔城)까지 쫓아가니 임나가라는 항복하였다. 이후 고구려 본토 출신 안라인(安羅人) 사람으로 신라를 지키게 하고 돌아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401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있었다. 7월에는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던 실성이 돌아왔다.

402년 2월 왕이 승하하였다. 왕의 태자가 어려 실성마립간이 왕이 되었다.

한편, 내물마립간대에 와서 신라가 고대국가 체제를 완성하게 된 이유는, 백제 근초고왕이 마한을 정복하고 낙동강 유역으로 진출하자 신라가 자극을받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백제는 왜(倭)와 연합한 다음 왜병을 끌어들여 364년과 393년 등여러 차례에 걸쳐 신라를 침범하였다. 신라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내부를 통합할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졌고, 그 결과로 체제정비가 이루어진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 본문참고 : 두산대백과사전
※ 본문출처 : 차석찬의 역사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