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신라

16. 흘해이사금(訖解尼師今)

오늘의 쉼터 2008. 10. 26. 20:15

 

 16. 흘해이사금(訖解尼師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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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흘해이사금(訖解尼師今)



□ 생존기간 : (?~356)

    □ 재위기간 : ( 310~356)



◐ 본문설명

신라 16대 왕으로서 원래의 칭호는 흘해이사금(訖解尼師今)이다. 성은 석(昔)이며 내해왕(奈解王;재위196-230년)의 손자이고 각간(角干) 우로(于老)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조분왕(助賁王;재위230-247년)의 딸 명원부인(命元夫人)이다.

310년 기림왕(基臨王;재위298-310년)이 후사(後嗣) 없이 죽자 대신들의 추대로 즉위하였다.

311년 정월에 급리(急利)를 아찬(阿飡;6등급)으로 삼아 정치의 중요한 일을 맡기고 중앙과 지방의 군사 일을 겸하여 맡게 하였다. 2월에 몸소 시조묘에 제사지냈다.

312년 3월 일본과 수교하여 아찬(阿飡;6등급) 급리(急利)의 딸을 일본 왕자에게 출가하게 했다.

313년 7월에 가물었고 누리[蝗(황) ;메뚜기]의 재해가 있었다. 백성이 굶주렸으므로 사자를 보내 그들을 진휼하였다.

314년 정월에 아찬(阿飡;6등급) 급리(急利)를 이찬(;2등급)으로 삼았다. 2월에 궁궐을 다시 수리하다가 비가 내리지 않아 중지하였다.

317년 봄과 여름에 가물었다. 왕이 몸소 죄수의 정상을 살펴 많은 사람을 풀어주었다.

318년 봄 2월에 영을 내렸다.

"지난번에 가뭄의 재해로 농사가 순조롭게 되지 않았다. 지금은 땅이 기름지고 생기가 일어 농사가 바야흐로 시작되었으니 무릇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일은 모두 중지하라."

330년 벽골제(碧骨堤)를 쌓아 농사를 장려했다고 하였으나, 이는 백제의 기록이 잘못 들어온 것 같다.

337년 2월에 백제에 사신을 보내 예방(禮訪)하였다. 3월에 우박이 내렸다. 4월에 서리가 내렸다.

344년 2월 일본이 재차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했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4월에 폭풍이 불어 궁궐 남쪽의 큰 나무가 뽑혔다.

345년 정월에 강세(康世)를 이벌찬(;1등급)으로 삼았다. 2월에 왜왕이 글을 보내와 국교를 끊었다.

346년 왜가 풍도(風島)에 침입, 변방을 약탈하고 금성(金城)을 포위하자 왕이 군사를 내어 상대하여 싸우고자 하였으나 이벌찬(;1등급) 강세(康世)가 말하였다.

"적은 멀리서 왔으므로 그 칼날을 당해낼 수가 없으니, 그것을 늦추었다가 그 군사가 피로해지기를 기다리는 것만 못합니다."

왕이 그렇다고 여겨 문을 닫고 나가지 않으니 적은 식량이 떨어져 장차 물러가려 하였다. 강세에게 명하여 날쌘 기병을 이끌고 추격하여 쫓아 버렸다.

348년 궁궐의 우물 물이 갑자기 넘쳤다.

350년 3월에 황새가 월성 귀퉁이에 집을 지었다. 4월에 큰비가 열흘 동안이나 내려 평지에 물이 서너 자나 되었고, 관청과 민가가 물에 잠기고 떠내려 갔으며 산 13곳이 무너졌다.

356년 4월 왕이 아들없이 죽었다. 그 뒤를 이어 미추이사금(;재위261-284년)의 형제로 알려진 각간(角干) 말구(末仇)의 아들이 내물마립간이 되었다.



※ 본문참고 : 두산대백과사전
※ 본문출처 : 차석찬의 역사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