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신라

3.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오늘의 쉼터 2008. 10. 26. 19:45

 

 

3.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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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 생존기간 : (?~ 57)

 □ 재위기간 : (24~ 57)




◐본문설명

신라 3대 왕으로서 성은 박(朴)이고 노례이사금(弩禮尼師今)이라고도 한다.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재위4-24년)·운제부인(雲帝夫人)의 태자(太子)이다.

비(妃)의 이름은 알 수 없고, 일지갈문왕(日知葛文王)의 딸 박씨, 허루갈문왕(許婁葛文王)의 딸 또는 사요왕(辭要王)의 딸이라는

세가지 설이 있으나, 일지갈문왕의 딸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남해차차웅이 죽자 덕망이 높은 매제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양보하다가, 군신(群臣)들의 추대로 24년 즉위하였다.

《삼국사기》에 기록을 보면 김대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사금(尼師今)은 방언으로 잇금을 일컫는 말이다.

옛날에 남해(南解)가 장차 죽을 즈음에 아들 유리(儒理)와 사위 탈해(脫解)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죽은 후에 너희 박(朴), 석(昔)

두 성(姓) 가운데 나이가 많은 사람이 왕위를 이어라.'고 하였다.

그 후에 김씨 성이 또한 일어나 3성(三姓)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이 서로 왕위를 이었던 까닭에 이사금이라 불렀다.

25년 2월에 친히 시조묘(始祖廟)에 제사지내고 크게 사면하였다.

28년 11월에 왕이 나라 안 곳곳을 둘러보다가 나이 많은 할머니가 추위와 굶주림으로 거의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

 "내가 보잘것 없는 몸으로 왕위에 올라서 제대로 백성을 다스리지 못하고 노인과 어린이로 하여금 이처럼 어려움을 겪게 했으니

이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겠소." 하며, 왕은 옷을 벗어 노인을 덮어주고 음식을 배불리 먹게 하였다.

그리고는 관리에게 명하여 곳곳에 있는 홀아비, 홀어미, 고아, 아들없는 사람들을 위문 하고, 먹고 마실 것을 주어 살아가게 하였다.

그러자 이웃나라 사람들이 이 소문을 듣고 많이 찾아오게 되었다. 이 해에 나라가 평안하고 백성들이 모두 행복하게 살아가니,

왕이 도솔가 (兜率歌) 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32년 양산촌은 양부(梁部)로 고치고 성은 이(李)씨, 고허촌은 사량부(沙梁部)로 고치고 성은 최(崔)씨, 대수촌은 점량부(漸梁部)로 고치고

성은 손(孫)씨, 진지촌은 본피부(本彼部)로 고치고 성은 정(鄭)씨, 가리촌은 한기부(漢祈部)로 고치고 성은 배(裵)씨, 명활촌은 습비부(習比部)로 고치고 성은 설(薛)씨로 하였다.

또한 관계(官階)를 17관등으로 제정하는 등 국가체제를 확립하였으며, 왕은 이들 6부(部)를 두 패로 나누어, 공주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6촌의 부녀자 들을 거느리게 편을 짜고, 음력 7월 16일경부터 날마다 아침 일찍 6부의 마당에 모여 밤 늦게까지 길쌈을 겨루게 하였다.

그리고 음력 8월 15일이 되면 길편을 대접하고, 온갖 노래와 춤과 놀이를 펼치니, 이를 가배(한가위)라고 하였다.

이때 진 편에서 한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며 탄식해 말하기를 "회소 회소(會蘇)"라고 하였는데, 그 소리가 슬프고도 아름다워 후대 사람들이 그 소리를 따라서 노래를 지어 부른 노래가 《회소곡(會蘇曲)》이다.

34년 서울[京都]에 땅이 갈라져 샘물이 솟았다. 6월에 홍수가 났다.

36년 8월에 낙랑(樂浪)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朶山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37년 낙랑(樂浪)이 고구려 대무신왕에게 망하여 유민(流民) 5,000여명이 넘어오자, 이를 받아들여 6부(部)에 배치하여 살게 하였다.

40년 화9월에 화려현(華麗縣)과 불내현(不耐縣) 두 현의 사람들이 함께 모의하여 기병을 이끌고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맥국(貊國)의

 우두머리인 거수(渠帥)가 곡하(曲河)의 서쪽에서 군사로써 막아 물리쳤다. 왕이 기뻐하여 맥국과 우호를 맺었다.


42년 8월에 맥국의 우두머리가 사냥하여 얻은 새와 짐승을 바쳤다.

54년 2월에 살별[;혜성의 옛이름]이 자궁(紫宮) [별자리]에 나타났다.

56년 4월에 용이 금성(金城)의 우물에서 나타났는데, 조금 있다가 폭우가 서북쪽에서부터 몰려왔다.

  5월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57년 9월에 왕이 병환이 들자 신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탈해(脫解)는 그 신분이 임금의 친척이고 지위가 재상의 자리에 있으며 여러 번 공명(功名)을 드러내었다.

 짐(朕)의 두 아들은 재주가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내가 죽은 후에 그로 하여금 왕위에 오르게 할 것이니, 나의 유훈을 잊지 말라! 10월에 왕이 죽어 사릉(蛇陵)에 묻혔다.

 그 뒤를 이어 왕의 매제인 탈해(脫解)가 왕이 되었다.


※ 내용참고 : 두산대백과사전
※ 내용출처 : 차석찬의 역사창고
※ 이미지출처 : mahan.wonkwang.ac.kr/ culture/99fall/km.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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