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신라

1. 박혁거세

오늘의 쉼터 2008. 10. 26. 19:42

 

 1. 박혁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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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혁거세 (朴赫居世)



▲생존기간 : (BC 69~AD 4)

▲재위기간 : (BC 57~AD 4)



 ■ 본문설명

신라의 시조이며 전(全) 박씨의 시조이며 휘는 혁거세이다. 왕호(王號)는 거서간(居西干)이며 비(妃)는 알영부인(閼英夫人)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일찍이 고조선의 유민(遺民)이 지금의 경상도 지방 산곡간(山谷間)에 흩어져 살면서, 양산촌(楊山村) ·고허촌(高墟村) ·진지촌(珍支村) ·대수촌(大樹村) ·가리촌(加利村) ·고야촌(高耶村) 등 여섯 마을을 형성하였다.

고허촌장 소벌공(蘇伐公)이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 옆의 숲 사이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앉아 울고 있었으므로 가서 보니 문득 말은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만 있었다.

그것을 쪼개니 어린아이가 나왔으므로 거두어서 길렀다.

 나이가 10여 세에 이르자 남달리 뛰어나고 숙성(夙成)하였다. 6부(部) 사람들은 그 출생이 신비하고 기이하였으므로 그를 받들어 존경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그를 임금으로 삼았다.

진한 사람들[辰人]은 박[瓠]을 박(朴)이라 일컬었는데, 처음에 큰 알이 마치 박과 같았던 까닭에 박(朴)을 성으로 삼았다. 거서간은 진한의 말[辰言]로 왕을 뜻한다. <혹은 존귀한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라고도 하였다.>

그가 13세가 되었을 때 매우 영특하여, 여섯 마을의 왕으로 삼고 국호를 서나벌(徐那伐)이라 하였다.

이 때가 전한(前漢) 효선제[孝宣帝;제9대 황제(재위 BC 74∼BC 49)] 오봉(五鳳) 원년 갑자(BC 57년) 4월 병진 <또는 정월 15일이라고도 하였다>이었다.

BC 54년 4월 초하루 신축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BC 53년 1월 용(龍)이 알영정(閼英井)에 나타나 계집아이를 낳았는데, 우물 이름을 따라서 알영이라 하였다. 알영은 자랄수록 덕기(德氣)가 있으므로, 혁거세가 그녀를 비로 맞이하여 알영부인(閼英夫人)이라 하였다.

BC 50년 왜인(倭人)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변경을 침범하려다가 시조가 거룩한 덕을 지니고 있다는 말을 듣고서 되돌아 갔다.

BC 49년 3월에 살별[;혜성의 옛이름]이 왕량(王良) [별자리]에 나타났다.

BC 44년 4월에 살별[;혜성의 옛이름]이 삼(參) [별자리]에 나타났다.

BC 41년 혁거세가 알영부인(閼英夫人)을 동반, 6부(部)를 순행하면서 백성에게 농잠(農蠶)을 권면하여 생산의 증가에 힘쓰니, 백성들이 이들을 이성(二聖)이라 칭송하였다.

BC 39년 정월에 변한이 나라를 바쳐 항복해 왔다.

BC 37년 서울에 금성(金城)을 쌓았다. 이 해에 고구려의 동명이 왕위에 올랐다.

BC 34년 6월 그믐 임신에 일식이 있었다.

BC 32년 금성에 궁궐을 지었다.

BC 28년 4월 그믐 기해에 일식이 있었다. 낙랑인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침범하려다가 밤에도 집의 문을 잠그지 않고, 노적가리를 들에 그대로 쌓아둔 것을 보고는 서로 말하였다. "이 지방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으니 도(道)가 있는 나라라 할 만하다. 우리들이 몰래 군사를 거느리고 습격한다면 도둑과 다름이 없으니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갔다.

BC 26년 8월 그믐 을묘에 일식이 있었다.

BC 20년 2월에 호공(瓠公)을 마한(馬韓)에 보내 예방(禮訪)하였다. 마한왕이 호공을 꾸짖어 말하였다. "진한과 변한 두 나라는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공물(貢物)을 보내지 않으니,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의가 이와 같은가?" [호공이] 대답하였다. "우리 나라는 두 성인이 일어나서부터 인사(人事)가 잘 다스려지고 천시(天時)가 순조로와, 창고는 가득 차고 백성은 공경하고 겸양할 줄 압니다. 그래서 진한의 유민으로부터 변한 , 낙랑 ,왜인에 이르기까지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임금님은 겸허하게 신하인 저를 보내 안부를 묻게 하였으니, 예가 지나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서는 크게 노하여 군사로써 위협하니 이것이 무슨 마음입니까?" [마한]왕이 격분하여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좌우의 신하들이 간언(諫言)하여 말리니, 이에 돌아갈 것을 허락했다. 이보다 앞서 중국 사람들이 진(秦)나라의 난리를 괴로워하여 동쪽으로 오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 다수가 마한의 동쪽에 터를 잡고 진한 사람들과 더불어 섞여 살았다. 이때 이르러 점점 번성해진 까닭에 마한이 그것을 꺼려서 책망한 것이다. 호공이라는 사람은 그 종족과 성(姓)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본래는 왜인이었다. 처음에 박을 허리에 매고서 바다를 건너온 까닭에 호공(瓠公)이라 불렀다.

BC 19년 마한 왕이 죽었다. 어떤 사람이 임금을 달래어 말하였다. "서한(西韓)의 왕이 지난번에 우리의 사신을 욕보였는데 지금 상을 당하였으니 그 나라를 치면 쉽게 평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임금이 말하기를 "다른 사람의 재난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이다." 하고는 따르지 않고,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BC 18년 백제(百濟)의 시조 온조가 왕위에 올랐다.

BC 15년 2월 그믐 을유에 일식이 있었다.

BC 5년 동옥저 사신이 와서 좋은 말 20필을 바치면서 말하기를 "저희 임금이 남한(南韓)에 성인이 났다는 소문을 듣고 신을 보내 [말을] 바치게 하였습니다."라 하였다.

BC 4년 2월 을유에 살별이 하고(河鼓) [별자리]에 나타났다.

BC 2년 정월 초하루 신축에 일식이 있었다.

AD 2년 9월 그믐 무신에 일식이 있었다.

AD 3년 9월에 두 마리의 용이 금성의 우물 가운데에서 나타났다. 갑자기 천둥이 치고 비가 내렸으며 금성 남문에 벼락이 쳤다.

AD 4년 3월 61세로 죽자 담엄사(曇嚴寺) 북쪽의 사릉(蛇陵)에 장사지냈는데, 지금 위치는 경주시 남천(南川)의 남쪽이다.

그 뒤를 이어 맏아들이 남해차차웅이 되었다.

※ 보충설명

박혁거세의 건국설화

서기전 69년 당시 사로6촌(斯盧六村)의 촌장들이 자제를 거느리고 알천(閼川) 언덕 위에 모여서 임금을 모시어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할 것을 논의하고 있었다.
이때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이라는 우물 근처에 신기한 빛이 하늘에서 땅에 닿도록 비추고 있고, 흰말〔白馬〕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어 가보니 큰 알이 하나 있었다. 말은 하늘로 날아가고, 알을 깨고서 어린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동천(東泉)에 목욕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었다. 이 아이가 박혁거세이다.

알의 크기가 박〔瓠〕과 같다고 하여 성을 박(朴)이라 하였고, 그 광채로 인하여 이름을 혁거세 혹은 불구내(弗矩內)라고 하였다.

고허촌(高墟村) 촌장인 소벌공(蘇伐公, 혹은 蘇伐都利)이 데리고 가 길렀다. 그리고 6촌의 촌장들은 신비롭고 기이하다고 하여 존경하였고, 나이 13세가 되어 이들에 의하여 왕으로 추대되었다.

이때 왕의 칭호는 거서간 또는 거슬한(居瑟邯)이라 하였고, 나라이름을 서나벌(徐那伐), 서라벌(徐羅伐), 서벌(徐伐) 혹은 사라(斯羅),

사로(斯盧)라 하였다.

바로 같은 날 사량리 알영(閼英)이라는 우물가에서는 계룡 한 마리가 나타나 오른편 겨드랑이 갈비뼈 밑으로 여자아이를 낳았다.

얼굴은 유달리 고왔으나 입술이 닭의 부리와 같았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한 할머니가 월성 북쪽 냇가에 가서 목욕을 시켰더니 그 부리가

빠져 너무나 아름다운 여자아이가 되었다.

 아이 이름을 우물의 이름을 따서 "알영(閼英)"이라고 하였다.

서기전 53년에 박혁거세는 알영(閼英)을 비(妃)로 맞아들였다.


※ 본문참고 : 두산 백과사전
※ 본문출처 : 차석찬의 역사창고
※ 보충출처 : http://chungdong.or.kr/middroom/syshim
※ 이미지출처 : http://wooiin.netian.com/b4.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