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신라

2. 남해왕 (南解王)

오늘의 쉼터 2008. 10. 26. 19:43

 

2. 남해왕 (南解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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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왕 (南解王)


● 생존기간 : (?~ 24)

● 재위기간 : (4~ 24)




◐ 본문설명

신라 2대 왕으로 성은 박씨이며 박혁거세(朴赫居世;재위BC 57 - AD 4년)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알영부인(閼英夫人) 또는 아루부인(阿婁夫人)이라고 한다.

왕비는 운제(雲帝)부인이며 그는 키가 훤칠하고 성품이 곧고 두터웠으며 지략이 많았다.

신라가 정식으로 왕의 칭호를 쓰기 전에는 차차웅(次次雄) ·거서간(居西干) 또는 이사금(尼師今) ·마립간(麻立干) 등의

칭호를 사용하였으므로, 남해차차웅 또는 남해거서간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보면 김대문(金大問)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차차웅은] 방언(方言)에서 무당을 일컫는 말이다.

무당은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드는 까닭에 세상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공경하여 마침내 존장자(尊長者)를 일컬어 자충이라 하였다.>

AD 4년 아버지 박혁거세(朴赫居世;재위BC 57 - AD 4년)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7월에 낙랑(樂浪)의 군사가 쳐들어와서 금성을 겹겹이 에워싸다가 그냥 돌아갔다.

AD 6년 정월에 시조(始祖)의 능을 세웠다. 10월 초하루 병진에 일식이 있었다.

AD 8년 정월 석탈해(昔脫解)가 뛰어난 인물임을 알고 그를 사위로 삼았다.

AD 10년 7월 그를 대보(大輔)에 임명하여 정사를 맡겼다.

AD 11년 봄과 여름에 가물었다.

AD 14년에 왜인들이 1백여 척의 병선으로 쳐들어와 민가를 노략질 하므로 왕은 6촌의 날랜 군사(勁兵)를 뽑아 막게 하였다.

 이 때 낙랑(樂浪)은 금성에 군사가 없을 줄로 알고 급하게 침입해 왔는데, 밤에 유성이 적의 진영으로 떨어졌다.

 적의 무리는 이를 두려워하여 알천 상류로 물러나서 진을 치고 돌무더기 20개를 쌓아 놓은 채 물러갔다.

 이 때 6촌의 군사 1천여 명이 이들을 추격하여 토함산 동쪽으로부터 알천까지 왔다가,

 적이 쌓아 놓은 돌무더기를 보고는 적의 군사가 많은 줄 알고 더 이상 추격하지 않았다.

AD 15년 봄~여름에 대기근 발생하였다.

AD 16년 7월 그믐 무자에 일식이 있었다.

AD 18년 서울에 가뭄이 들었다. 7월에 누리[蝗(황) ;메뚜기]의 재해가 있어 백성들이 굶주렸으므로 창고의 곡식을 풀어 그들을 진휼하였다.

AD 19년 2월에 북명(北溟)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왕(濊王)의 인장을 얻어 [나라에] 바쳤다.

AD 22년 질병이 크게 번져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11월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

AD 23년 가을에 금성[太白]이 태미(太微) [별자리]에 들어갔다.

AD 24년 9월에 누리[蝗(황) ;메뚜기]의 피해가 컸다. 이 해에 왕이 죽어 사릉원(蛇陵園)에 장사지냈다.

 그뒤를 이어 아들이 유리이사금이 되었다.


※ 내용참고 : 두산 백과사전
※ 본문출처 : 차석찬의 역사교실
※ 이미지출처 : http://chungdong.or.kr/middroom/sys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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