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회화감상

김득신의 고미술

오늘의 쉼터 2008. 10. 5. 13:24

 

 김득신의 고미술

 

 


 
산수도(山水圖)
 
- 김용두(재일교포) 소장 -
 
 

 
추계유금도(秋谿遊禽圖)
 
이 그림의 작자인 이 작품도 김홍도의 짙은 영향을 반영하는 그림이다. 이것은 영모화라고 하나 새와 동물은 작게 등장하고 오히려 배경 산수가 비중있게 다뤄지고 있어, 김득신 산수화의 이해에 크게 일조하는 그림이기도 하다. 수지법이나 바위 처리, 화면 구성 등에서 김홍도와 친연성을 강하게 보여준다. 쌍을 이룬 토끼와 꿩을 그린 것과, 보다 너른 수면을 두어 여러 종류의 새들을 무리지어 나타낸 두 폭 모두 깔끔한 화면 구성과 영모와 배경의 조화 등이 돋보인다. 상단 여백에는 문장과 글씨에서 일가를 이룬 이재학의 팔언절구 찬문이 있다.
 
 


풍속팔곡병 (風俗八曲屛)
 
사대부행락도
 1815년 작품 종이에 담채 94.7 cm x 35.4 cm 호암미술관 소장
 
 


풍속팔곡병 (風俗八曲屛)
 
 


풍속팔곡병 (風俗八曲屛)
 
 
 

풍속팔곡병 (風俗八曲屛)
 
 


추강희압(秋江戱鴨)
 
종이에 채색 25.4*34cm 고려대학교 박물관
 
 
이 그림은 산수와 영모의 복합이라 할 수 있는데 긍재(兢齋)의 작품 중 드물게 보는 소재이다. 그의 낙관이 있고 화면 오른쪽에는 영조(英祖) 때 참관을 지낸 시서화의 명인 자하(紫霞) 신위(申緯)의 칠언시가 씌어 있다. 이 시로 보아 이 그림이 중국 강남(江南)의 가을 풍경임을 알 수 있다. 화면 왼쪽의 큰 바위, 그 옆으로 뻗어 수평으로 자란 나무와 멀리 보이는 물가의 풍경 등이 세 마리 들오리를 위한 아늑한 영역을 만들고 있다. 바위 뒤에서 헤엄쳐 나오는 한 마리는 거의 조감도(鳥瞰圖)로 표현되어서 그 부근 수면이 경사져 보인다.
 
 
 

성하직구(盛夏織구)
 
화첩종이에 담채, 23.5×28㎝, 간송미술관 소장
 
 
 
 명이 야만족인 청에 멸망한 후 청의 정통성을 인정치 않던 조선 지식인들은 끊겨버린 중화 문화의 적통을 조선이 계승해야 한다는 결의와 자부심을 보이게 되었다.여기서 조선이 곧 중화라는 조선중화사상이 조선 성리학을 바탕으로 상하에서 팽배해 가니, 미구에 이런 사상은 모든 예술형식에 조선 고유색을 노정 시키게 되었다.그 결과 그림에서는 동국진경과 풍속화라는 화과가 등장하여 조선 후기 화단을 풍미하게 되었다. 양 화과의 본격적인 융성은 비록 조선 후기에 와서이지만, 모두 그 발생근저를 조선 성리학에 두고 있으므로 자연 그 시원은 훨씬 윗 시대로 올려 잡아 보아야 하는데, 풍속화의 출발은 왕실과 귀족 그리고 사대부들이 일반 백성의 생활사를 알기 위하여 궁중화원들에게 그리게 한 경직도류의 그림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김득신의 풍속화도 이로부터 맥을 이은 것인데, 경직도의 감계화적(鑑戒畵的) 성격에다가 순순회화로서의 감상화적인 성격이 가미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성하직구>는 [대문제경직도]라는 화본에 그 기본 구도를 두고 있는 작품으로 박덩굴이 나무울타리 위로 무성하게 타고 올라가서 큼직한 박을 달아 매놓았으며, 그늘을 드리운 사립문 울타리 아래에 삿자리를 깔아놓고 그 위에서 짚신을 삼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농가의 3대가 한자리에 있으니 노부인 듯한 백발노인은 곰방대를 입에 물고 있고, 손자인 듯한 어린 아이는 할아버지의 등이라도 긁고 있는 듯한 모습인데, 찌는 듯한 삼복더위인지 어른들은 모두 웃통을 벗었고 삽살개조차 혀를 빼문 채 헐떡거리고 있다. 왕실과 사회의 평안과 더불어 대를 이어가는 농가의 평화스러운 모습이 짚신 삼기라는 소재를 빌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파적도 破寂圖( 야묘도추)
18세기 말~19세기 초
종이에 담채, 22.5cm x 27.2cm 간송미술관
 
 
김득신의(파적도)破寂圖 는 따뜻한 봄볕이 내리쬐는 어느 날, 들고양이가 병아리를 물고 달아나는 급박한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여유로운 한낮에 일어난 급작스러운 사태로 적막함이 깨뜨려졌다고 하여 파적(破寂)이라는 제목이 붙기도 하였다. 파적도는 새롭고 신선한 주제의 포착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조용한 봄날 한낮의 정적을 깨는 작은 소동이 이 그림의 주제인데, 고양이가 병아리를 물로 달아나자 어미 닭이 다급히 쫓아가고, 툇마루에 있던 영감 부부가 황급히 뛰어내려오는 장면을 묘사하였다. 벗어진 탕건, 내던져진 자리틀로 보아 상황이 얼마나 급박한지 알 수 있다. 맨발로 뛰어나온 안주인은 병아리보다는 마루에서 떨어지는 남편이 걱정스러운 듯 안절부절이다.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래진 닭이며 혼비백산 달아나는 병아리 등 활동 사진을 보는 듯한 생생한 상황 묘사가 절묘하다. 쫓는 사람과 고양이의 표정이 실제 모습과 똑같을 듯하다.
 
 
 
 
대장간
종이에 담채 22.4*27cm 간송미술관
 
 
 
김득신은 김홍도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화가로 먹선의 쓰임이 김홍도에 비해 가늘고 부드러운 감이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김홍도의 선을 따르고 있다. <대장간>이 바로 그런 그림의 하나다. 먹선은 가늘고 부드러우며 인물의 화면배치 상태나 움직이는 자세 등은 매우 유사한 데가 있다. 그리고 김홍도의 <대장간>에는 배경이 생략되어 있으나, 김득신의 <대장간> 배경에는 배경이 그려져 있다.
 
 
 

투전도 (鬪錢圖)
종이에 담채 22.4*27cm 간송미술관
 
 
 
 투전에 열중하고 있는 남자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이들은 중인(中人)계급의 남자들로 보이는데, 투전에 정신없이 빠져 있는 모습이 각 인물들의 얼굴 표정과 몸짓에서 여실히 느껴지고 있다. 부유한 사람들로 보이긴 하지만, 교양 있는 몸가짐이나 위신은 전혀 찾을 수 없이 도박에 몰입하고 있는 모양새를 보면 이들이 분명 양반 지식인층이 아닌 중인계급의 사람들일 것이다. 당시 여유 있는 중인들이 투전판을 벌리거나 주색잡기에 빠지는 것은 흔히 잇는 일이었다. 김득신이 바로 그러한 풍속의 하나를 그린 것이다. 화면에 그려진 인물들의 형태 표현이 주제에 맞게 자연스럽고 개성미가 있다.
 
 
 
 
주막거리
 
 
<주막거리>는 여러 풍속도를 한 화면에 복합하여 주변 풍경과 섬세하게 조화시킨 작품으로 주막과 대장간, 다리를 건너는 여행객, 논일하는 농부들을 함께 엮었다.주막거리 조선 중기의 시인. 본관 안동(安東). 자 자공(子公). 호 백곡(栢谷)·귀석산인(龜石山人). 음 보(蔭補)로 참봉(參奉)이 되고, 1662년(현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가 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안풍군(安豊君)으로 습봉(襲封)되었다. 후에 화적(火賊)에게 살해되었으며, 당시 시명(詩名)이 있었다. 저서에 《백곡집(栢谷集)》 《종남총지(終南叢志)》 등이 있다. 멀리서 바라본 주막집 풍경이 이채롭다.
 
 
 

귀시도
 
 

 
「노상알현도」, 반상도(班常圖)
 
 
 
고구려의 북한학술조사단이 공개한 김득신 작「노상알현도」이다. 김득신은 각 분야에서 김홍도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화가로 알려져 있다. 특히 풍속도에서는 김홍도의 전통을 이은 대표적 계승자로 꼽힌다. 이 그림에서도 길에서 우연히 상봉한 양반과 상민 부부의 모습을 통해 조선시대의 사회 신분질서를 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자리짜기
 
  양반 내외의 자리짜는 모습이 당시 신분변동의 한 면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김득신은 같은 주제를 그려도 김홍도와 달리 집안 정경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근경에 책읽는 아이를 그리고 열린 문틈으로 얼굴을 빠끔히 내민 고양이를 배치하여 김홍도보다 현장감 나는 생활 풍속을 살려내었다.
 
 
 

 
수하일가도 (樹下一家圖)
 
 
 
한여름 나무 아래서 짚신을 삼고 물레를 돌리는 부부와 갓난아기의 모습이 매우 정겹게 느껴지는 이 작품은 야외에 앉 아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클로즈업하여 배경없이 화면 중앙에 배치하여 일상생활의 한 장면을 강조하고 있다. 짚신을 삼고 있는 사내의 차림새와 자세에서 힘을 들여 일을 하는 것을 정확히 묘사하려는 의도를 알 수 있다. 반면 여자를 묘사하는 필선은 달라 굵고 부드럽게 구사하고 있다. 노동하는 인간을 생활의 중심에 놓는 현실인식과 사실적 표현을 중시하는 표현양식은 당시 풍속화의 경향을 잘 드러낸다.
 
 
 
 
김득신
 
김득신은 조선후기 화단에서 여러 명의 화원을 배출한 개성 김씨 가문 출신이다. 부친은 김홍도의 스승으로 알려진 김응환이며 (김응환의 조카라는 말도 있슴.) 아들은 순조어진제작에 참여한 김하종이다. 동생과 아들도 모두 화원이었다. 조선 후기 풍속화의 내용과 형식에서 김홍도를 가장 충실히 계승한 화가로 평가받는 그는, 김홍도 화풍이 형식화되어가면서 풍속화의 퇴영이 예고하는 출발선상에 놓여졌던 화가이기도 하다. 대표작으로는 간송미술과 소장의 <풍속화첩>과 1815년 62세 때 그린 호암미술과 소장의 8폭 병풍이 알려져 있다. 또 별도로 흩어진 화첩용 그림들이 비교적 여러 점 남아 있는 편이어서 풍속화가로서 김득신의 위치를 충분히 검증케 해준다.
 
 
 
동명이인 독서광 김득신
 
조선 중기의 시인. 본관 안동(安東). 자 자공(子公). 호 백곡(栢谷)·귀석산인(龜石山人). 음 보(蔭補)로 참봉(參奉)이 되고, 1662년(현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가 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안풍군(安豊君)으로 습봉(襲封)되었다. 후에 화적(火賊)에게 살해되었으며, 당시 시명(詩名)이 있었다. 저서에 《백곡집(栢谷集)》 《종남총지(終南叢志)》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