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근대사 중 가장 극적인 인생을 살았던 여성을 나혜석(1896∼1948) 그녀는 수원의 부유한 관료 집안에서 태어나 일제시대에 쉽게 받을 수 없었던 교육을 받은 신여성이었다. 학창 시절 매일신보에 '재원(才媛)'으로 이름이 실렸을 정도인 그녀는 진명여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가 되었다.
화가로서의 명성을 얻기 전 글로써 먼저 이름을 알리기도 한 그녀는 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동경 유학시절 뭇남성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 나혜석은 글 솜씨마저 뛰어나 최승구, 이광수 등과 교류하며 많은 글을 발표했다. 탁월한 문장력을 지닌 그는 이미 18세 때에 독립적 여성을 그린 '이상적인 부인'이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신여자' 제4호(1920년 4월)에 실린 나혜석의 목판화 <김일엽 선생의 가정 생활> 이 여성 잡지를 주재하던 김일엽 선생의 가사 노동과 독서, 집필을 병행하는 바쁜 하루를 경쾌하게 묘사했다. 이 후로도 남존여비의 철폐 등을 지상을 통해 활발하게 피력했다. 일본 유학시절 나혜석은 최승구라는 문학청년과 사랑에 빠졌으나 예술과 생활의 동반자가 되기를 꿈꾸었던 최승구는 폐결핵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빨리 결혼하라는 집안 어른들의 성화 속에서 나혜석은, 예술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아내될 사람이 화가로서 활동하는 것을 적극 후원하�다고 나선 김우영과 결혼하게 된다. 나혜석과 남편 김우영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주시오.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케 하여 주시오."
나혜석이 결혼 당시 요구 조건으로 내세운 위 세 가지 조건은 당시에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나혜석의 표현대로 '선량한 남편'이었던 김우영은 신혼여행으로 죽은 애인인 최승구의 묘를 찾아가 비석까지 세워주었다. 여성을 현모양처로 교육하면, 왜 남성은 현부양부로 교육하지 않느냐고 따져 물을 줄 알았던 나혜석다운 일이었다.
그녀는 외교관인 남편을 따라 세계일주 여행 도중 파리에서 미술 공부를 더 하는 기회까지 얻어 화가, 문필가로서 더욱 입지를 굳히게 된다.
그러나, 순탄대로이던 그녀 일생의 일대 전환기를 맞게되는 사건이 발생하고야 만다. 파리에서 만난 최린과 운명적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다. 나혜석이 구미여행에서 돌아온 어느 날, 김우영은 사교계에 퍼진 소문을 듣고 그녀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나혜석은 어떻게든 남편을 설득하려 했지만, 결국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고 네 아이와 모든 세간을 남겨둔 채 집에서 나와야 했다. "하고 싶으면 합시다. 이러니저러니 여러 말 할 것도 없고, 없는 허물을 잡아낼 것도 없소. 그러나 이 집은 내가 짓고 그림 판 돈도 들었고 돈버는 데 혼자 벌었다고도 할 수 없으 니 전 재산을 반분합시다."
그러나, 재산 분배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혜석은 그야말로 빈 몸으로 나와 새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아이들 또한 볼 수 없게 되었다. ' 자신의 개성을 위하여, 일반 여성의 승리를 위하여' 집을 나왔던 나혜석은 이혼 했다하더라도 그녀의 인생 자체인 그림을 그리고 여성으로서의 글을 쓰며 살아가면 될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제도와 인습의 테두리에 안주하고 있는 사람들이 가정과 사회의 틀 밖으로 나와 버린 나혜석을 파멸로 몰아갔다. 나혜석은 곤궁한 삶을 살아가게 되고, 부정을 저지른 여자라는 이유로 온갖 냉대와 멸시를 받는다. <자화상> <나부>
이혼 후 나혜석은 비난과 질시를 받았음에 반해, 김우영과 최린은 일제 하에서 승승가도를 달렸다. 이에 그녀는 잡지 삼천리에 <이혼고백장>이라는 글을 기고해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혼고백장>이라는 제목의 이 글은 한국 최초의 여성 화가로 잘 알려진 나혜석이 전 남편인 김우영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이다. 여기에는 그녀가 남편과 만나 결혼하기까지의 과정, 결혼생활, 이혼 과정, 그리고 이혼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최린과의 만남에 대한 소감이 낱낱이 적혀 있다. 약혼부터 이혼까지의 내력과 자신의 생각들을 상세히 담은 <이혼 고백장>은 개인의 내밀한 사생활의 고백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가부장제 하의 여성의 결혼 생활과 사랑, 성, 경제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당시 사회에서 억압되어 있던 여성의 목소리를 내었다는 데에 의미가 있었다.
당시의 남성 중심적 사회제도와 인습에 대한 저항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성들의 반응조차 나혜석에게 호의적이지 못했다.
나혜석은 <이혼고백장>에서 정조를 지키지 못했음을 문제삼아 이혼을 강요했던 남편 김우영이 이혼이 성립되기도 전에 다른 여성과 동거에 들어간 사실을 지적하며, 남성 중심의 조선 사회에 대해 통렬히 비판을 가했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상대자의 불품행을 논할진대 자기 자신이 청백할 것이 당연한 일이거늘 남자라는 명목 하에 이성과 놀고 자도 관계없다는 당당한 권리를 가졌으니 사회제도도 제도려니와 몰상 식한 태도에는 웃음이 나왔나이다."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어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이었더니라." 나는 인형이었네, 그네들의 노리개였네. 아아- 소녀들이여 깨어서 뒤 따라 오라, 일어나 힘을 발하여라.. 나혜석의 시 <노라> 中
나혜석은 자신의 사생활을 낱낱이 피력한, 당대로서는 대담한 이 글을 잡지에 발표한 후, 최린에 대해 '정조유린'을 이유로 위자료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여성들의 반응조차 나혜석에게 호의적이지 못했다. 당시 사람들은 가정 안에서 일어난 사적인 일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그녀의 대담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더욱이 결혼한 여자가 외간 남자와 바람피운 것을 창피하게 여기기는 커녕 도리어 당당하게 위자료를 내놓으라고 청구소송을 걸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그러한 고백장을 사회에 적나라하게 발표하는 당신의 태도에 반감과 불쾌감을 느꼈다." "필요 없는 폭로는 악취미요, 병적이다. 사남매의 어머니로서 그 노출증적 광태를 버렸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잡지에 여성들이 독자 투고 형식으로 나혜석에게 쏟아놓은 말들이었다.
나혜석은 이혼 고백장에 대한 이러한 반응에도 반박문을 내지는 않았다. 어떠한 비판에도 무반응으로 일관했던 이유는 이 글이 여성을 대상으로 한 글이라기보다 남성을 상대로 한 글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전남편이었던 김우영과, 한 때의 연애 상대였던 최린이 그 직접적인 대상이었다. 이 둘은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혼 고백장의 내용과 발표 이후의 모든 것들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단지 나혜석의 문제일 뿐이었다. 그 때부터 나혜석은 사회적으로 고립될 수밖에 없었지만, 1938년 잡지 '삼천리'에 <해인사 풍광>이라는 글을 끝으로 그림과 글 모두를 손에 놓게 되기까지 나혜석은 싸워나갔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과의 싸움은 투쟁이라기보다는 발버둥에 가까웠다.
<깡깡>
<금강산 만상정>
<선죽교> 왼쪽부터,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소녀>, <금강산 만상정>, <창가에서> 나혜석이 이혼직후에 발표한 작품들이다.
그러나, 화가로서 재기의 발판을 다지고자 한 전시회는 선입견이 작용했을 혹평과 함께 사람들의 무관심으로 실패했다. 대신 글로써 부단히 자신을,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알리고자 했다. 그러나, 나혜석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녀의 생각을 이해하지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가면서 사회적으로 서서히 매장 당하고 있었던 나혜석에게남은 건 고독과 빈곤뿐이었다. 이혼 직후까지도 주위에 있던 후원자들과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후 돕던 친구들도 남루한 행색의 나혜석을 점차 피했다.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을 정도로 쇠약해진 몸과 마음으로 떠돌아다니던 삶은 오빠 나경석 부부에 의해 양로원에 들어갈 때까지 몇 년간 지속되었다.
마지막 글을 쓸 때까지 빈곤과 고독 속에서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내었지만, 그녀의 존재를 인정하고 달가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 생각건대 내게서 가정의 행복을 가져간 자는 내 예술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이 예술이 없고는 감정을 행복하게 해 줄 아무 것도 없었던 까닭입니다."
수덕사에서 예전에 친했던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던 나혜석은 그녀에게 연민을 느낀 지인들이 얼마씩 보내주는 돈으로 이곳저곳을 유랑하곤 했다. 자식들이 미치도록 보고 싶다며 괴로워하던 나혜석은 극도로 쇠약해진 심신으로 결국 양로원에서 비극적 삶을 마감하고 만다.
한국의 대표적인 신여성이었던 나혜석과 출세한 총독부 관료 김우영,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천도교 신파의 거두였던 최린.
당대의 유명인사였던 이들 사이에서 일어난 스캔들은 세속적 흥미로 가십거리가 되었다. 나혜석은 오늘날도 그녀의 뛰어난 예술 작품 보다는 방종하고 향락적인, 비판받는 신여성의 대표적 인물로 인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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