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고조선

단군 오루문 낙랑 문화

오늘의 쉼터 2008. 9. 7. 17:26

철기시대

 

단군 오루문 낙랑 문화bc795~bc430


34세 오루문, 35세 사벌, 36세 매륵, 37세 마물, 38세 다물, 

39세 두홀, 40세 달음, 41세 음차, 42세 을우지, 43세 물리 단군

 

1. 낙랑문화    

                              

2. 오르도스, 임호 등 주변문화

 

 

 

1. 낙랑문화

 

<규원사화>에서 34세 오루문(奧婁門) 단군은 낙랑홀(樂浪忽)로 천도한다.

부여신궁에서 봉기한 색불루 우현왕이 22세 단군이 되어서 조선의 중심인 녹산 아사달로 천도해 옮겨갔는데,
이때 장자 아흘에게 단군위를 주고, 
차자인 고불가에게 낙랑홀을 맡겼었다.  
43세 단군 물리 때에 우화충의 반란으로 낙랑 도성을 빼앗겨 단군 물리가 종묘 사직을 싣고서 배를 타고

해두(海頭)로 피난하는데 해두는 강평현(康平縣) 동북쪽의 해주(海洲)로 고려된다.
이후 단군 구물에 의해 낙랑 도성이 수복될 때에 낙랑성에 큰 홍수가 있었으니 낙랑홀은 강변이다.
한편 37세 단군 마물(麻勿) 때에 성 북쪽에 샘이 솟아서 배를 띄울 정도였다고 한다.

낙랑홀의 물로 추정되는 요락수(饒樂水)가 있었다.

왕망 때에 낙랑(樂浪)은 토지가 좋고 인민이 요락(饒樂)하다고 기록하였으니 낙랑은 요락수와 깊은 관련이 있다.

<통전>에서 요락수는 영주 유성 관할인데 지금의 노합하(老哈河)다.
당나라가 거란 땅에 송막도독부(松漠都督府)와 요락도독부(饒樂都督府)를 같이 설치했다.

요락도독부는 시라무렌강 북쪽인 임서현에 있었는데 시라무렌강이나 노합하나 모두 요락수라고 부른 것이다.
47세 고열가 단군이 북부여에게 패망할 때에 진조선(眞朝鮮)이 진시황에게 복속했다고 전한다. 

 

43세 구물단군은 이미 다른 진조선(辰朝鮮)인 장당경으로 옮겨갔으므로 진시황 정에게 복속당한 

진조선(眞朝鮮)은 낙랑이 된다.

이 낙랑이 진시황의 만리장성 안쪽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는 bc221년 연나라 진개의 동호 인질 생활과 동호 정벌과 관련된다.

이때 낙랑이 물러나 부여쪽으로 옮겼다가 bc201년에는 흉노의 침략으로 동호가 멸망한 것이다.

오루문 단군의 수도 낙랑의 위치는 우북평군의 치소인 평강현(平岡縣)이다.
평강현 고성은 흑성자에 있는데 그 북쪽에 남산근 유적지가 있고 이를 포함한 낙랑성이 있었다.

 

 

 

노합하(老哈河)의 상류에 많은 청동기 고대 묘장이 나타난다.

적봉시 영성현(寧城縣) 팔리한(八里罕) 고성의 남산근(南山根) 유적지는 곤도하(坤都河)=(노합하 지류)

연안으로서 대형 석곽묘 2기 등 분묘 9좌가 발굴되고, 무려 500여건의 청동기물이 나왔다.

기물의 연대는 대략 상(商)~은(殷)나라 후반부터 춘추전국시대까지다.
남산근에 발굴된 청동기물을 내용적으로 보면 청동도가 9건, 청동부가 8건,
청동검이 7건, 칼집이 4건,

투구 1건, 원형 방패 1건, 청동과 3건, 청동모 3건, 등 무기와 말과 마차 기물 6건에, 짐승형 패식 14건이 있다.

그외 각문골판(刻文骨板)을 보면 쌍기(雙騎) 수레 두 대가 새겨져 있다.

이는 음산 암각화에 나오는 수레와 같은 것이고,같은 도법(圖法)이다.

투구 쓴 단군이 청동검 들고 말만 타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위풍당당하게 대초원에서 수레를 타고

다녔던 것이다.

후단군조서 오루문 단군 낙랑시대 낙랑성 (녕성 남산근)의 청동기 유물은 아래와 같다.

 

 

 

 

남산근 유물들. 제기 등 맨 아래는 갑골에 새겨진 쌍마 수레 이 무렵에 나오는 청동검은 

북방식청동검 2식이라고 한다.

주로 영성 남산근과 난하에서 나온다.

청동검 끝에 동물무늬 장식을 한 것으로서 남산근과 하북, 융화 등 난하 유역에서 나오는데

수병식(獸柄式)이라 한다.

 

 

bc195년에 낙랑왕 최숭이 배를 타고 이주하여 마한의 왕검성으로 건너가서 정착하였다가

bc169년에는 해성에 곡식 300섬을 받쳤다.

해성이 가까운 마한(馬韓) 왕검성은 마한이 아니라 막한(莫韓)의 오기다.

즉 막한 고리국지를 한사군 설치 때에 낙랑이라고 부르게 된 연유다.
195년 최숭이 낙랑에서 배를 타고 떠나왔는데 이는 201년 흉노 묵돌가한의 동호 침략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동호(東胡)는 흉노와 못쓰는 땅 천리를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 이는 달리호 주변으로 고려된다.
조무령왕에게 망하여 양성을 빼앗긴 임호가 후퇴하여 동호로 있다가 부여성에서 최후를 마치고

선비산(하늘산)으로 올라가서 오환선비가 되었다.
뒤에 다시 적봉으로 내려왔다.

 

2. 오르도스, 임호 등 주변문화

 

오르도스 주개구 문화

 

색불루가 녹산에서 즉위하기 3년전에 조부 우현왕 고등이 귀방(오르도스)을 멸망시켰다고 했다.

부여 군대가 은나라 서북방에 살던 귀방을 멸망시키고 부여인으로 나라를 세웠던 곳이,

은나라 역사인 은기(殷紀) 중의 녹방(鹿方)이다.

 

 춘추시대에는 악방(鄂方)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오르도스 고원이다.

섬서성(陝西城)의 녹주(鹿州)는 지금 부현(富縣)이 되었는데 bc7세기에 백적인(白翟人)들이 살던 곳이다.

백적은 흰옷을 입어서 생긴 별명이며 섬서성(陜西城) 연안(延安)에 있다가 하북성 중산국(中山國)으로

동천하였다.

녹주(鹿州)는 연안(延安)의 남쪽 마을이었다.

이 백적인들이 bc637년에 주(周)나라와 통혼까지 하였고 주나라를 위해 정나라와 싸웠고 춘추말,

bc476년 이전에는 하북성에 중산국을 세웠다.

통혼의 결과는 단군 마물의 배필이 된 주나라 공주와 주나라 황비가 된 적후(翟后)였다.

그런데 적녀(翟女)는 귀씨(鬼氏)였다고도 전하니, 색불루 부여군에게 복종하게 된 귀방인(鬼方人)들이다.

오르도스(鄂爾多斯)문화의 중심인 나린탑(納林塔) 주개구문화(朱開溝文化)가 있다.

 

<단군세기>에서 23세 단군 아흘 때에 주개(周愷)에서 여러 제후들이 회합했는데 혹시 주개구일 수도 있다.

나린탑은 오르도스 고원의 동부로서 황하와 가까우며 고대에는 하남(河南)이라고도 하였다.

탑(塔)은 오르도스 고원에서 마을을 의미한다.

 

    

오르도스 문화 스키타이 장식 ; 신수도, 씨름도 청동패, 와각식 청동검 등


이 오르도스 지역에서 나오는 청동검을 북방식 서군 양식이라고 하는데 위와 같다.

단 왼쪽의 방울장식, 사슴머리 장식, 오른쪽의 고리 장식 등은 요녕성의 법고시 정가방 만류가

유적지와 요녕성 흥성시 양가향 유적지, 하북성 청룡현 초도구 유적지에서도 보이는 것이다.

와각식 청동검은 길림시에도 나타난다. 즉 후기의 것이다.

 

나린탑을 비롯하여 주변에 석불탑, 백가탑(白家塔), 장가탑(張家塔), 백초탑(白草塔) 등 탑으로

끝나는 지명이 나린탑 주위로 모여 있다.

영고는 만주말로 여섯, 육(六)을 의미하는데 부여는 왕실과 오가제로서 육가를 이루었었고,

탑이나 타라란 이름의 마을들이 지어진 것은 부여의 흔적이다.

오르도스 고원의 신석기문화는 옥기도 전혀 없고 낙후되어 있었으므로 오르도스 청동기가

오르도스 고원에서 자생한 것이 아니다.

오르도스 고원은 부여의 서쪽에 살던 알유(猰猶)였는데 상당히 낙후되었던 알유,

즉 오르도스가 이 무렵에 부여인들에 의해 개발되는 신천지가 되었다.

나린탑에는 고성이 있었다.

 성둘레는 410m x 360m 정도다.

오르도스 청동기 시대에 해당하는 주개구 문화는 중가리아(准格爾旗)의 나린탑북쪽 10km에서

발굴되었는데, 용산문화와 앙소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다시 스키타이scythay식 야수문(野獸文)을

받아들여 동방의 서요하(西遼河)로 전파한 것으로 해석하여왔다.

그러나 오르도스고원의 도기는 용산문화의 도기와 다르게 사문(蛇文),

즉 지자문(之字文)에서 비롯되는 토기 형식이 발전하여서 용산문화의 채도문 도기와 큰 차이를 보인다.

또한 후기에는 남문(藍文) 토기가 우세해진다.

 이는 빗살무늬토기가 유행한 내몽고 동부로부터 토기가 직접 전래되었던 것이다.


스키타이 양식이라고 여겨졌던 그리스 금속 동물 공예품도 오르도스에 전파되어 오기 전에 이미 오르도스식

청동 예술이 적봉시 극시극등기나 적봉시 영성에 존재하고 있었다.

즉 스키타이 예술의 씨가 나온 곳은 서요하이며 토기와 함께 오르도스 고원에 전래되어 열매를 맺은 것이다.

또한 한반도의 스키타이양식 금속공예도 그리스에서 시베리아를 돌아온 것이 아니라

서요하에서 발원한 것이 직수입 된 것이다.

그리고 스키타이 양식의 전래가 내몽고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라 내몽고 자체에서 발생하여 스키타이로

흘러간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 동쪽에 살았던 스키타이인이 내몽고에서부터 그리스 연안으로 진입해 들어갔을 것으로

고려되기도 한다.


주개구문화지는 bc18세기에 구리 팔찌, 귀걸이, 구리환 등이 보이며 청동기가 시작되고 bc15세기에

사문격(蛇文隔)=(빗살무늬 종류)과 단검, 동도가 나타난다.

그런데 이미 이때부터 묘를 쓸 때에 양을 희생하여 매장하였으므로 목축민족이었다.

bc13세기에는 양, 말, 사슴, 뱀, 용을 장식한 청동도가 출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b.c11세기에는 용이 사라지고 대신 새머리가 장식되고 춘추시기에는

쌍오회수(雙烏回首) 와각식(蝸角式)=(칼 자루 끝 장식이 둘로 갈라져서 서로 마주 보는 것) 단검이 출현한다.

그외 아주 다양한 장식과 문양, 야수문 패식이 절정을 이루어가는 것이 춘추시기다.


오르도스 고원에서 나오는 북방식 청동검은 서군형(西群形)으로 분류되는데 적봉시 영성(寧城)으로부터

하북성을 따라서 오르도스 고원까지 분포한다.

나린탑(納林塔)은 우리말로 내린 탑이다.

하투(河套) 북쪽 포두시(包頭市) 성곽에서는 선우천강(單于天降) 와전 벽돌이 나오는데 이 강(降)이

하늘로부터 신인의 강림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린탑은 춘추시대에 악방이며, 알유의 땅이며 이제말로 오르도스다.

두막루는 우현왕에 해당하는 관직 이름이었지만 후에는 부족명이 된다.

[북사] [위서] [신당서] 등에 나오는데 [동북역사지도집]에서 제제하얼의 송눈평원(松嫩平原)으로 비정하였다.

금나라 대에는 포여로(蒲與路0라고 하였는데, 역시 “부여로(夫餘路)”에서 비롯된 지역명이다.

바로 이 지역은 기하문토기의 원향(原鄕)인 흑룡강가 백금보문화(白金堡文化)를 모태로 한다. 

또한 [수서]의 두막루는 스스로 북부여의 후손이라고 말한다.

색불루 이후 천년 뒤에 장당경에 대부여가 건국되고 다시 기백년 후에 옛 부여 도성에서 해모수의 북부여가

세워졌었다.

이들이 한무제의 침략 이후 궐기한 졸본부여에 의해 동북으로 이동하여 가섭원 부여라 했는데

다른 말로 동부여라고도 했다.


양성 노호산 문화 / 임호


내몽고 양성(凉城)의 노호산(老虎山)에서는 고대 성곽이 발굴되고, 또 양성 서남쪽의 오포량(敖包梁)에서

23개의 석퇴(石堆)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제단이다.

석퇴의 연장 길이는 60m인데 그중 중앙 1개의 돌은 길이가 10m, 높이가 2m이고,

그 중앙에 3개의 구멍을 뚫어서 제사를 지낸 흔적이 있고, 양 옆으로 각기 11개의 석퇴가 펼쳐진 것이다.

22개의 석퇴에도 각기 중앙에 한 구멍씩 뚫려 있다.


양성(凉城)에는 적적인(赤翟人)들이 살았다.

춘추시대말에 적적인들은 하북성 무안(武安)에 옮겨갔다.

이 뒤에 양성에 남아서 살던 사람들이 임호(林胡)다.

전국시대 bc300년경 백적인(白翟人)의 중산국(中山國), 하북성(靈壽) 고성을 멸망시킨

조무령왕(趙武靈王)에게 임호까지도 이 양성을 빼앗겼다.

임호족은 동쪽 케스케덴 토성자 천보동 부근으로 들어온 것으로 고려된다.

일부는 남천하여 하북성 난하(灤河) 상류인 난평(灤平)으로 옮겨갔다.

이때 임호, 동호의 별칭이 산융(山戎)이다.

연나라 때에 난하 동쪽 하북성 노룡(盧龍)의 고죽국(孤竹國)의 북쪽에 산융이 있었고 고죽국은

산융국의 제후국이었다.

그 산융국은 단군의 제후국이었다.

 

난평에는 본래 남국(藍國)이 있었고 남국 때문에 강 이름도 난하(灤河)인 것이다.

 

[한서-지리지]에서 어양군(魚陽郡) 백단현(白壇縣)이었던 난평은 약 10개의 북방형 청동검이

발굴된 곳이며 왕묘가 남아 있다.

남국은 단군 초기부터 제후국이었고 산서성의 려국(黎國) 등을 세우기도 했다.

 

 음산 암각화 문화

 

        

음산 암각화 모음

 

부여족이 활약했던 내몽고 음산(陰山) 산맥의 남쪽은 하투(河套)라고도 하는데 황하의 최북단으로서

산서성과 섬서성의 북단이 교차한다.

음산문화(陰山文化)는 암각화(巖刻畵) 문화다.

음산에는 수없이 많은 암각화가 그려져 있는데 경상남도 울주군 천전리 암각화도 그 파생품이다.

암각 인물화의 특징은 부엉이형 조두(鳥頭) 얼굴이 있다.

호두구 문화 옥기에 다량의 부엉이 옥장식이 있었는데 이 부엉이가 부여족과도 관련 있어 보인다.


부엉이형 얼굴을 태양신의 얼굴로도 해석한다.

천명현조(天命玄鳥) 항이생상(降以生商)라는 상나라의 전설과도 이어지며,

상나라의 청동기물 중에 부엉이잔(鵂尊)으로 이어진다.

상인商人을 조이(鳥夷)로 보아서, 특히 상인의 시조신은 요순시대 순(舜)이고 순은 동이인이라고 주장하는데

굴원(屈原)의 [천문(天問)]을 사료로 들었다.

그리하여 태양신 숭배의 전통이 일치한다고 하였는데 음산암화의 태양도와 강소성 연운항의 태양제단

태양석의 암화가 일치하며, 이것이 동경(銅鏡)의 태양문, 기하문 동경으로 발전하고 옹고트의 卍자 부호로

이어진다.

 

엄주, 서주 등

[단군세기]에서 23세 단군 아홀(阿忽) 때에 박고씨(博古氏)를 청주淸州에 봉하여 엄국(淹國)을 세우고

영고씨(盈古氏)를 서주(徐州)에 봉하여 서국(徐國)을 세우고 방고씨(邦古氏)를 회(淮) 땅에 봉하였다고 한다.

 

[규원사화]에서는 박고씨를 포고씨라고 하였다. 

중국은 퉁구스족이 발해를 거쳐서, 산동반도 아래 강소성 연운항까지 내려온  결과로 해석하기도 하며

그들이 상나라를 세웠다고 해석한다.

 

 

'뿌리와 역사 > 고조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물 장당경문화  (0) 2008.09.08
기후 객현한 객좌 문화  (0) 2008.09.08
서우여 기자 험독성 문화  (0) 2008.09.07
단군 솔나 영고탑 문화  (0) 2008.09.07
단군 색불루 녹산 아사달 부여 문화  (0) 2008.0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