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고조선

단군 솔나 영고탑 문화

오늘의 쉼터 2008. 9. 7. 17:16

철기시대

 

단군 솔나 영고탑 문화bc1112~bc795


25세 솔나, 26세 추로, 27세 두밀, 28세 해모, 29세 마휴, 30세 내휴, 31세 등올, 32세 추밀, 33세 감물 단군

 

 

bc1583년 16세 위나 단군 때에 구환(九桓)이 영고탑(寧古塔)에 모여 제사지냈다.

경을 읽으며 마당을 밟는 창경답정(唱經踏庭)을 5일간 하였다.

이때 등불을 들고 애한가(愛桓歌)를 부르면서 불함산(不咸山)의 붉은 꽃을 노래한다.

여기서 불함산은 곧 태백산, 도태산, 현재 대광정자산이다.

bc1345년 20세 고홀 단군 때에 영고탑을 개축하고 별궁을 지었다.

bc1285년 녹산 아사달에 정도한 색불루 단군은 bc1250년 변방 장수 신독의 침략으로 녹산 아사달이 함락되니

색불루 단군이 영고탑으로 피했다.

이후 bc1237년 아흘 단군 원년에 비로소 신독을 주살하고, 녹산 아사달을 수복하여 76년을 녹산아사달에서

다스렸다.

이후 bc1112년, 25세 솔나(率那) 단군은 영고탑으로 천도하였다.

1981년 옹고트(翁牛特旗) 동남쪽 오동화진(梧桐花鎭) 해방영자(解放營子) 오포산(敖包山)에서

2건의 대형 청동솥(靑銅鼎)과 한건의 청동시루(甗)이 발견되었다.

 

“옹고트(翁牛特) =ONGOT”은 신성하다는 뜻이며 부여의 천신 제사인 영고(迎鼓)와 발음이 통한다.

이중에서 청동시루에는 두 개의 원시 한자가 새겨졌는데 하나는 고대 금문(金文)에서 녕(寧)의 약자인 녕宁이라는 글자였고, 또 하나는 아亞 모양인데 성곽의 곽(郭)자의 상형자가 가로, 세로로 한번더 포개진 글자다.

허진웅(許進雄)의 [중국고대사회]에 의하면 좌측의 것이 곽(郭)의 고자이며 이것이 포개져도 역시 곽(郭)의 옛 글자다.

그러나 영고탑의 고(古) 발음과 같은 고(固)이거나, 그 뜻은 성(城) 또는 나라 국(國)과 같은 뜻일 수도 있다.

여기 청동시루에 새겨진 영(寧)자는 바로 우리가 찾는 영고탑(寧古塔)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 지역의

옛 지명에도 사용되었다.

금나라는 옹고트에 전녕로(全寧路)를 두었고, 원나라는 전녕부(全寧府)라고 했었으니 영(寧)이

본래 지명자인 것이다.
옹고트(翁牛特旗) 치소(治所)인 오란진(烏丹鎭) 고성이 있는데 금나라, 원나라 전녕로(全寧路) 성이었다.

북부여왕 해모수 때에 북막(北漠), 즉 흉노에 약탈당한 영주(寧州)이기도 하다.

 

한편 33세 단군 감물(甘勿)은 영고탑 서문밖 감물산에 삼성사(三聖祠)를 세웠다.

단군묘라고도 했다.

한편 옹고트 북쪽 삼성타라(三星塔羅)에서 대형 옥룡이 발굴되었다.

중국 옹우특기현의 상징이 되었는데 길이 26cm이었다.

 

 

삼성사였던 삼성타라 옥룡과 영고탑성이었던 해방영자 봉황 그릇

(봉황은 bc4800년전 조보구 문화 시대 작품이다.)

삼성사가 옹구트기 북쪽이고(지도에서 별표) 영고탑은 옹우특기 동남쪽이다.

월명구와 조양구 사이가 단군 솔나시대 영고탑성이 있던 곳으로 고려된다.

그 왼쪽의 성터는 전단군 20세 고홀 때지은 영고탑성일 수 있다.

 

 

옹고트 오란진 북쪽에 조격온도소목(朝格温都苏木)이 있는데 그곳에 원석산(圓石山)이 있다.

우리말 온달-보름달, 둥근돌이 한어로 원석인 것이다.

오라산(烏拉山)이라고도 한다.

 이 원석산 중에는 신비한 동굴이 있는데 그 안에 작은 등불의 빛이 시간대별로 남색, 홍색, 백색으로

변한다고 한다.

그 산 꼭대기에는 탑 받침이 남아있다.

이는 당나라 장수 위지경덕(尉迟敬德)이 산의 동굴에서 나오는 요기(妖氣)를 막기 위해 쌓은 탑이라고

전해지는데 이미 탑이 무너진지 오래다.

1971년 조격온도소목 서쪽 삼성타라(三星他拉)에서 40cm에 이르는 대형 옥룡(玉龍)이 출토되어서

이후로 옹고트를 중화제일룡이 나타난 옥룡의 고향이라고 하는데 이 삼성타라가 삼성사(三聖祠)였을 것이다.

최근에 삼성타라 부근에서도 암각화가 발견되었다고 전한다.

한편 옹고트에는 태백산(=대광정자산)으로부터 등롱하(燈籠河)가 흐른다.

등롱하 발원지에 신령스러운 등불이 있어서 매년 제야의 밤에 두 개의 신불(燈)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내려오는데 대석문(大石門)에 이르러서 두 등불이 합치면 길하다고 했다.

이를 몽고말로 등노리(登努日) 혹은 등노리고리(登努日高勒)라고 했다는데

그냥 우리말로 “등(燈)놀이”, “등놀이 골”로 생각된다.

조격온도소목 북쪽에 포리돈(布日敦)이라고 하는 호수(沙湖)가 있다.

밝은달, 발달을 몽고어로 보리돈이라고 적는다.

경치가 빼어난데다가 호수가 C자 형으로서 용 모양이라고 하고 호수 북쪽 언덕에는 몽고족이 매년

제사지내는 제단이 남아있다.
조격온도소목의 여러 전설은 후단군의 영고탑 천도 이전의 전단군시대 16세 위나 단군 때에

창경답정하던 영고탑이었을 것으로추측하게 한다.

 

옹고트 동남쪽 오한기(敖漢旗) 고로판호(古魯板蒿) 북쪽 마을인 주가지(周家地)

묘지는 노합하 중류의 홍산 저수지(紅山水庫) 끝지점 동안(東岸)이다.

이곳에서는 하가점 상층문화에 해당하는 54좌 묘장이 있는데, 토갱수혈묘이며 목곽장이다.

부장품은 남산근과 같은 피혁도초(刀鞘)와 청동도 3건인데 동물문 병도(柄刀)와 철치병도(凸齒柄刀) 등이 있다.

철치병도는 검자루 부분에 톱니 모양이 있는 것으로서 나무 자루에 매다는 것이다.

그외 구리송곳, 귀걸이, 연주(聯珠)형식, 동포, 원포, 쌍련포(雙連泡), 방구(方 ), 쌍미동식(雙尾銅飾),

조형식(鳥形飾), 고동목걸이(箕形蝸器), 녹송석, 마포(麻布) 등이 보인다. 
이것이 영고탑 시대의 묘장이다.

 

주가지로부터 노합하 반대쪽인 서북쪽의 옹고트 대포자(大泡子) 유지에서는 공병식 청동단검 2개가

부장된 묘가 발굴되었고 특히 흑룡강(黑龍江) 조원시(肇源市) 백금보(白金寶) 유지 형식의 도기가 나왔다.

백금보유지는 기하문(幾何紋)으로 유명하다.

옹고트 서남쪽 적봉시 하가점의 상층문화 유적지에서 나온 유물들이 영고탑 시대의 유물이다.

 


                             적봉시 하가점 상층문화유물

 

이곳에서 나오는 청동검은 북방식 청동검 중군 형식이라고 하는데  주로 창에 끼우는 것이다.

공병식( 柄式)= (구멍에 끼우는 형)이라 한다.

주로 노합하 영성 남산근에서 나오고 극시극등기, 파림좌기, 옹우특기, 우하량 북쪽까지 나온다.

영고탑 시대 유물로 보면 된다.

 

 

 

이때 후단군조선의 영고탑 천도는 요서의 기자와 더 가까워진 것이니,

중국인 기자가 인접해 왔으므로 단군조선이 중국쪽에서 후퇴했을 것이라는 일연一然의 추측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다. 

 영고탑은 발해 안원부(安遠府) 부주(府州)인 영주(寧州)였다.

해모수 북부여시대에 영주가 북막 추장에게 약탈당한 적이 있다.

마지막 단제 고열가는 영품리왕(寧稟離王)=(단기고사에서는 고열가 단군의 시호였다.)으로 격하되었다.

영품리왕의 시비가 낳은 딸이 동명왕이라는 전설이 [삼국유사]에 있고, 졸본부여의 고두막한 동명왕은

고열가의 후손이라는 설이 [한단고기]에 있다.

<후한서> 부여전에서는 색리왕의 시비가 낳은 아들이 동명왕인데 도망쳐서 부여에 가서 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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