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고조선

단군 색불루 녹산 아사달 부여 문화

오늘의 쉼터 2008. 9. 7. 17:06

철기시대

 

단군 색불루 녹산 아사달 부여 문화 bc1285~bc1112

 
22세 색불루, 23세 아흘, 24세 연나, 25세 솔나 단군

 

 


후단군시대 강역과 주변도

 

단군 조선 개국후 1000년이 지나서 신시 지역 북쪽에 있던 개사원(蓋斯原)의 욕살 고등(高登)이 은나라와

싸워 이기니 고조선의 서북 땅을 다 차지하고 스스로 우현왕(右賢王) 두막루(豆莫婁)라고 불렀다.
바햐흐로 철기시대가 시작되고 전쟁이 더욱 활발해졌다.
이집트 투탕카멘의 고분에서 기원전 14세기에 철검이 발굴되었다.

히타이트에서는 기원전 13세기에는 철검이 보편화되었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1400년에 하북(河北) 고성(藁城)과 북경(北京) 평곡(平谷)에서

철날을 박아서 만든 구리 도끼(鐵刃銅鉞)가 각각 발굴되었다. (지도참조)
이 철은 단조된 것이었으나 재료는 운석에서 얻어진 철로 분석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고성 유적지에서는 철광석을 야철하던 유적지와 철찌꺼끼가 발굴되었다.

운석과 관련되지 않은 철광석에 의한 야철이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색불루 단군 때에 남이(藍夷)의 남국(藍國)이 강성하여 남쪽으로 이동하여 은나라와 가까운

엄독홀(掩瀆忽)에 있었는데 지금의 석가장시(石家庄市)로 고려된다. 

석가장 동남 난성(栾城)이 바로 남국 위치로 고려되며 그 북쪽 고성(藁城)의 묘자리에서

철인동월이 나온 것이다.

남이국은 본래 북경시 동북 난하(灤河)의 난평(灤平)에 있다가 남쪽 석가장 난성(栾城)으로 

이동하였을 것이다.석가장 서북 영수현(靈壽縣)=(지도표시)의 고성에는 훗날 주나라 때에

마물 단군과 왕실끼리 결혼하면서

적족(翟族)의 중산국(中山國)이 세워졌다.


 
                                                        고성시 출토 청동인월과 청동제기

 


홍산옥기

여기서 철인동월과 함께 나온 유물을 살펴보면 색불루시대의 문화 양상을 알 수 있다.

의료기로서 외과수술용 돌칼이 나왔다.

이는 수술 뿐 아니라 침구 치료가 이미 발달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세계 최초 비단이 나왔고, 마직품(麻織品)이 나왔다.

홍산문화 옥조각 중에도 누에를 신처럼 모시는 여인상들이 보인다. 그리고 술을 빚기 위한 양조용 효모가 대량으로 나왔다.
고성이 은나라와 가까우니 은나라 문화일 것이며,
단군 문화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은나라 문화라면 은나라 유적지 전반에서 저와같은 유물들이 나왔을 것이다. 

단군 동이족 문화이기에 중국 땅 안에서 외로운 섬처럼 세계 최초의 선진 문명이 나타나는 것이다.

 

 부여 지역에 나타난 최초 대형 청동기물은 떡을 만드는 시루다. 신석기시대에는 쌀로 밥을 하지 못하고 떡을 만들어 먹었다. 이 지역에서 조나 보리를 주로 농사하였을 것인데, 역시 떡을 만들어 먹었을 것으로 고려된다.  이 떡 시루는 시라무렌강 부근인 천보동(天寶洞)에서 발굴되었다. 따라서 단군 왕검이 그 아들 부여를 보냈던 부여성은 바로 이곳으로 확정된다.천보동 동남쪽 10여km 지점에 용두산 석성터가 있는데 제사터가 발굴되었다. 이곳 고분에서는 청동도끼, 청동검 등이 묻혀 있어서 천년간 대대로 전해져온 부여왕권을 상징한다. 천보동 지역은 시라무렌강 상류로서 보통 해발 1000m인데, 이 강변은 해발 700m다. 즉 부여지역에서 일정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다. 부여성은 당시에 시라무렌강 북부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시라무렌강에 성 중앙을 관통당했다. 요나라는 이곳에 요주성(饒州城)을 세웠다.

 


                                                             전단군시대 부여성


 

이곳 부여성에서 태백산까지 백분하 계곡이 있다. 백분하 계곡은 100리 화랑이라고도 하는데 암각화로

유명하다. 음산암각화도 여기서 퍼져나간 것이다.

부여성이 있던 천보동(天寶洞)에서는 상(商)나라 때의 청동기물이 4점 발굴되었다.

청동솥, 추(錘), 부(斧) 등이다.

용두산은 토성자진 6km 남쪽으로서 동으로는 위당하가 있어 옹고트 빈수(濱水)와 이웃하고

남쪽에 용두산이 있다. 용두산 유적지 규모는 600m x 400m 규모로서 해발 900m이다.

제단 유적지를 비롯해 많은 유물이 나왔고 묘장은 토갱수혈묘제였다.

1기 유적지에서는 연병동부(連柄銅斧)=(도끼 자루를 도끼 머리 양쪽에 매는 것)가 나왔는데 상(商)나라

형식과 같고 러시아의 바이칼 북쪽 앙가라고원과 예니세이강까지 퍼졌다고 한다.

공병식 직도검(空柄式直刀劍)과 넓고 둥근 청동 화살촉(銅鏃)과 가늘고 긴 두 종류의 화살촉이 나왔고,

동포(銅泡), 연주(連珠) 장식, 대식(帶飾) 등 청동 장식품도 다수 나오는데 주조용(鑄造用) 석범(石范)까지

발견되어 자체 제작한 것이 된다.연대는 bc1250년경이다.
용두산의 제단은 전방후원 모양으로서 40 x 40m 규모다.

이곳에서 사슴 문양 동패식(銅鹿)이 나왔다.
2기 유적지에서는 흑룡강 백금보유지의 영향을 받은 기하문 도기들이 많이 나왔다.

이는 단군 왕검 시대 전파된 것이다.
기타 제사갱(祭祀坑)이 7개, 순장갱 2개, 그외 72갱이 나오고 별도의 묘장은 4개가 발굴되었다.

부여 지역에 있던 개사원(蓋斯原)의 욕살 고등(高登)이 은나라와 싸우면서 은나라 서북 귀방,

지금의 오르도스 고원을 다 차지하고, 스스로 우현왕 두막루(右賢王 豆莫婁)라고 불렀으며,

고등의 손자 색불루(索弗婁)가 우현왕을 세습하였다.
이때 상장 서우여(徐于餘)가 탕지산의 번한(番韓) 소정(小丁)을 암살하였다.

21세 단군 소태(蘇台)는 살수 땅을 주면서 서우여에게 양위하려 하였다.


b.c. 1285년 우현왕 색불루가 부여신궁(夫餘新宮)에서 스스로 단군으로 즉위하고 쳐들어왔다.

서우여가 맞서 싸우다가 패퇴하고, 마한(馬韓) 아라사(阿羅斯)도 참전하여 전사하고, 단군 소태는 물러났다.

색불루는 구월산 장당경(藏唐京)={개원시(開原市) 창도현(昌圖縣) 천두진(泉頭鎭), =졸본성}에서

22세 단군으로 다시 즉위하였고, 다시 녹산(鹿山)에 수도를 정하고 역시 아사달이라고 불렀다.
이로서 예맥구려 중심의 전단군시대 소밀랑 백악산 아사달은 막을 내렸다.

당시 개사원은 흥안령산맥 최고봉인 황강량(黃岡梁), 2029m 에서 시작되어 서요하로
들어가는

임서현(林西縣) 가사태하(嗄斯汰河)로 고려된다.

임서현에는 하늘산에서 자칸무렌강(査干沐淪)강도 흘러내려와 가사태하와 만나서 서요하로 들어간다.

자칸무렌강(査干沐淪江) 서안 대정(大井)에서는 청동기시대 구리광산이 발굴되었다.

고대 동광이 있는 대정에서 자칸무렌강 상류에 올라가면 상류가 둘로 갈라진다.

동쪽가지 끝에는 소부리카(索博日嗄)라는 마을이 있는데, 요나라가 평지에 경주(慶州)성을 세웠다.

소부리카는 단군 색불루와 관련되는 것으로 고려된다.

소부리카 서남쪽 자칸무렌강변에 조양성(朝陽)이라는 지명이 있다.

 


 

서로 마주보는 두 개의 산성이 보이는데 훗날 흉노에게 망하여 피신하여왔던 오환선비족의 성터였을

수도 있다. 혹은 색불루 이전 우현왕 고등의 성이었을 수도 있다.

따라서 오환선비는 색불루의 직계 후손일 수도 있다.

자칸무렌은 흑수(黑水)라고도 하고 새한산(塞罕山), 즉 한산(罕山)에서 유래한 말이다.
자칸무렌의 서쪽가지는 파이태하(巴爾汰河)고 하는데 바로 녹산아사달에서 흘러나온다. 

녹산은 흥안령산맥의 최고봉인 황강량(黃岡梁)=,2029m 이다.

 황강량의 북쪽 고원 지역인 아시하도(阿斯哈图)는 과거에 목엽산(木葉山)이라 불렀다. 

즉 백악산이나 같다. 
황강량이 부여의 주산으로서 녹산이라 했는데 녹산의 녹(鹿)은 우리말로 노루산, 누루산을 거쳐 

누루 황자를 써서 황산(黃山)으로 변할 수 있다.

고주몽의 도읍 졸본성이 다른말로 눌현(訥峴)이었는데 고국원왕 때 황성(黃城)이라 불리는 것과 같다. 
황강량 북쪽 목엽산 아시하도가 단군 색불루의 녹산 아사달로 고려된다. 

지금 천합원(天哈園)이라는 곳인데 해발 1600m 고지대이며 서쪽 전자구(展子溝)가 궁성터로 고려된다. 


  

서쪽에 아사달 석림이 있다. 빙하시대 만들어진 자연조각이다.


 
 

 

현재 아사달이라는 이름과 무엽산이란 옛이름으로 보아서 천합영은 색불루 시대 수도성 녹산 아사달이다. 

영고탑 천도 후에는 <단군세기> 31세 단군 등올 때에 기린이 와서 놀던 상원(上苑)이 변하여

오늘날 천합원이라고 할 수도 있다.

케스케덴(克什克騰旗) 동북쪽 25km의 대청산 남쪽 상점 유지에서는

패독(貝禿)과 채도, 활석 팔찌, 마노(瑪瑙) 고리, 와환(蝸環), 골주(骨珠) 등이 발굴되었다.

하가점문화와 다른 소하연문화(小河沿文化)로 분류하는데 옹고트 석붕산 문화와 비슷하다.

이는 녹산아사달의 남쪽이다.

색불루는 마한에 여원흥을 임명하고 번한에는 개천령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서우여가 다시 좌원에서 군대를 일으켜서 스스로 기자조선이라 하였는데 기자는 태양왕이라는 뜻이다.
이에 맞서던 번한 개천령은 전사하였고, 마한 여원흥은 한반도 대동강에서 물러나와 고리국지인 궁홀산에 

살며 막조선(莫朝鮮)이라고 하였다.
본래 대동강 마한은 번한과 함께 기자국으로 통일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여원흥의 후손으로 이루어진 <마한세가 하>는 한반도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 요하 서쪽의 막조선의 기록이다.

 

본래 대동강마한은 서우여 기자국의 일원으로 진마(辰馬), 금마(金馬)라고도 하였다.
막한이 뒤에 말갈족으로 변한 것이고 그래서 말갈족은 혈통적으로 구려예맥족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최치원이 마한이 곧 고구려라한 것은 이 막한일 것이다.

한편 
색불루가 서남쪽에서 은나라와 전쟁을 하고 돌아온 와중에 후방에서 변방장수 신독의 반란으로

수도 녹산 아사달을 빼앗기기도 하였다.


색불루 단군은 잠시 영고탑으로 피난하였고 이때부터 영고탑이 북방 대성이 되었다.
다음 단군인 태자 아흘이 녹산 아사달에 돌아와 반란을 토벌하였다.

 

아흘단군은 은나라를 쳐서 산동 지방에 제후들을 임명하였다.

색불루 단군은 쫓아냈던 서우여를 비왕으로 삼아서 번한으로 책봉하였다.
한편 마한과 번한을 통합한 서우여는 좀더 독립적인 이름으로 기자조선을 세웠다.
그후 서우여로 부터 3대인 솔귀 번한 때에 bc1122년경

(죽서기년과 80년의 차이가 있는데 전통적인 것을 따른다.)

 

은나라가 망하여 bc1120년에 은나라 왕자 기자(箕子)가 요서(遼西)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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