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대한임정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4대주석 홍진

오늘의 쉼터 2008. 9. 3. 10:31

 

홍진(洪震/洪鎭, 1877년 음력8월27일- 1946년9월9일)

                       서울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을 지냈다.

[생애]

  • 1877년 음력 8월 27일 서울 서소문에서 아버지 한재식과 어머니 한수동의 차남으로 태어남.   
  • 본명은 면희(冕熹), 아명은 봉근(鳳根) 또는 우봉(又鳳).
  • 1896년 의령 남씨 남숙희의 차녀 남상복(南相福)과 혼인.
  • 1903년 2월 법관양성소 입학.
  • 1904년 7월 21일 법관양성소 졸업.
  • 7월 26일 법관양성소 박사에 임명되었으나, 이틀 뒤 의원면직.
  • 1906년 2월 한성평리원 주사.
  • 12월 5일 법관전고소 시험에 합격.
  • 12월 10일 충청북도 재판소 검사로 발령.
  • 1908년 5월 14일 의병 사건의 논고를 거부하고 검사직을 의원면직.
  • 5월 29일 대한제국 법부로부터 변호사 인가장을 받음.
  • 1909년 7월 14일 평양지방재판소 검사국에 변호사로 등록하고, 평양에서 개업.
  • 1919년 3월 3·1 운동에 참여. 충북 청주군 연락책임자.
  • 3월 17일 한성오의 집에서 한성정부를 조직.
  • 4월 15일 이규갑과 함께 한성정부의 각원 명단과 문건을 가지고 상하이로 망명.
  • 압록강을 건너며 이름을 홍진(洪鎭)으로 바꿈.
  • 9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직됨. 취임을 미루던 국무총리 이동휘를 찾아가 취임을 종용.
  • 11월 임시정부 국내조사위원 및 임시의정원 충청도 선거위원장에 임명.
  • 1920년 3월 19일 임시의정원 상임위원회 제4분과 위원.
  • 3월 30일 임시의정원 정무조사특별위원회 위원.
  • 1921년 4월 6일 임시의정원 전원위원장에 당선.
  • 4월 20일 상해대한교민단장에 선임.
  • 5월 6일 임시의정원 제3대 의장에 선출.
  • 5월 20일 교민단장 면직.
  • 8월 13일 상해교민단 사무소에서 대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를 발족하고 임시회장으로 선출.
  • 8월 26일 대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 공식출범에 따라 대표인 간사장을 맡음.
  • 1922년 4월 3일 태평양회의에 대한 책임으로 국무원이 총사직, 임시의정원 의장직에서 면직.
  • 1924년 5월 임시의정원 내에서 개헌 문제로 분란이 일자 사임후 장쑤성 전장에서 은거.
  • 1926년 7월 7일 임시의정원에서 국무령으로 선출. 이름을 홍진(洪震)으로 바꿈.
  • 7월 8일 국무령에 취임.
  • 8월 30일 정부를 구성하고, 홍진 정부가 공식 출범.
  • 12월 9일 유일당운동에 주력하기 위하여 국무령을 사직.
  • 1930년 7월 26일 한국독립당 창당, 중앙위원장으로 선출.
  • 1934년 2월 25일 난징에서 신익희의 한국혁명당과 통합하여 신한독립당 창당, 중앙위원장으로 선출.
  • 1935년 7월 5일 독립 계열 단일 정당 민족혁명당 창당, 중앙검사위원.
  • 1937년 8월 17일 미주지역 6개 단체를 참여시킨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
  • 1939년 10월 15일 임시의정원 충청도 위원으로 선출.
  • 10월 16일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선출(두번째).
  • 10월 23일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선임.
  • 10월 25일 임시정부 내무장으로 선임.
  • 11월 5일 임시의정원 의장과 국무위원 불겸직안에 따라 의장직 사임.
  • 1940년 5월 9일 한국독립당 창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
  • 10월 8일 임시정부 고문으로 추대.
  • 1942년 10월 26일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선출(세번째).
  • 1943년 10월 9일 제35차 임시의정원 회의 개최, 국무위원 숫자와 선출 방법을 둘러싸고 여야가 대립.
  • 1944년 1월 3일 국무위원 선출방식을 위한 투표에서 여야 동수가 되자,

             ⊙의장으로 야당 측이 주장한 무기명 투표안에 찬성.

             ⊙이 일을 계기로 부의장 최동오와 함께 한국독립당을 탈당.

  • 1945년 2월 9일 신한민주당을 창당, 유동렬·김붕준과 함께 주석단에 선출.
  • 11월 5일 한국 해방에 따라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 29명과 함께 충칭을 떠나 상하이에 도착.
  • 12월 1일 임시정부 제2진으로 22명과 상하이를 출발, 폭설로 김포가 아닌 군산비행장에 도착.
  • 1946년 2월 1일 명동성당에서 비상국민회의 창립대회를 개최하고, 의장에 선출됨.
  • 7월 심장천식으로 입원, 입원 중 남상철의 권고로 영세를 받음(세례명 안드레아).
  • 9월 9일 향년 70세로 사거.
  • 9월 13일 명동성당에서 장례위원장 김구 집례로 장례미사, 인천시 관교동에 안장.
  • 1984년 12월 15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
  • 1994년 10월 6일 국립묘지 임시정부요인 묘역 내 임정수반 묘소로 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