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대한임정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5대 주석 이동녕

오늘의 쉼터 2008. 9. 3. 10:40

이동녕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5대 주석
임기 1926년 - 1927년
전임 홍진
후임 김구
임기 1939년 - 1940년
전임 김구
후임 김구
출생일 1869년 2월 17일(1869-2-17)
출생지 대한제국 조선 충청남도 천안
사망일 1940년 3월 13일(1940-3}-13)
사망 원인 급성폐렴
종교 대종교
자녀

이동녕(李東寧, 1869년 2월 17일~1940년 3월 13일)은 1926년부터 1927년까지 제4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을 1939년부터 1940년까지 제6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냈으며 한국의 독립운동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대통령대리·주석·국무위원장·국무위원으로 활동했다.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자는 봉소(鳳所), 호는 석오(石吾)·암산(巖山)이다.

 

 

 

 

 

 

 

 

 

 

 

 

 

 

 

 

 

[생애]

 

[어린 시절]

이동녕은 1869년 2월 17일에 태어났다.

그가 17살 때 그의 가족이 한성부로 올라와 종로구에 정착하였다.

1892년에 응제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그가 28살 되던 해에(1896년) 그가 독립협회에 가담하였고,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다음해 만민공동회가 열렸을 때 나라의 잘못된 정치를 탄핵하고 임금께 상소하는 등 국민운동 일선에 나섰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이승만 · 이준과 함께 투옥되었다.

1898년에 출옥을 하고 이종일이 경영하는 제국신문에 사설을 집필하였다.

[독립 운동]

1902년이상재 목사와 손잡고 YMCA운동을 전개하였다.

1904년에는 한일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그는 서울 상동 교회에서 전덕기 · 양기탁 · 신채호 · 조성환과 같이 청년회를 조직한 뒤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김구 · 이회영을 알게 되었다.

 다음 해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그는 동지들과 결사대를 조직하고 이 조약이 체결된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여 2개월간 다시 투옥 생활을 감수하였다.

그가 감옥에서 나오자, 1906년 만주 북간도 으로 망명, 이상설과 함께 한국 최초의 해외 사립학교인 서전의숙을 설립, 한국동포의 2세의 민족교육을 본격적으로 실시함으로써 뒷날 독립운동의 기수들을 길러냈다.

이 때 이상설이 2명의 특사와 함께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가자 한때 귀국하여 안창호 · 전덕기 · 양기탁 · 이동휘 · 이갑 · 유동열 등 동지들을 모아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또한 그는 안창호 · 이회영과 협력하고 전국에 교육단을 조직, 공립협회와 대한매일신보의 조직과 발행을 지원하였다.

 한편 대성학교와 오산학교를 설립함에 있어서도 크게 조력하였고, 상동학교의 교사로 재직한 일도 있었다.

삼원보에 망명하여 이석영 · 이철영 · 이회영 · 이시영 형제 및 이상룡과 함께 한국인 자치기관인 서로군정서를 설립하고 교포들의 신분보장과 독립정신 고취에 앞장섰다.

또한 그는 이상설의 알선으로 러시아의 시베리아 총독 보스타빈이 약속한 한국군관 학교 설립을 추진하다가 발각, 3개월간 투옥 생활로 고초를 겪었다.

1915년 그의 나이 47세때 이상설 · 이동휘 등과 함께 독립운동가의 사업기관으로 권업회를 조직, 대동신문과 해조신문을 발행 보급하였다 그가 49세되던 1917년에는 노령 니콜라에프스크에서 나철이 창시한 대종교 포교 활동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독립의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1918년 11월에는 길림 성에서 대종교 김교헌 외에 조소앙 · 조완구·김좌진·여준 등과 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를 내외에 선포하였다.

1919년 2월 블라디보스톡에서 상하이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마침내 국내에서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4월 10일 임시 의정원의 초대의장으로 선임되었다.

동년 4월 13일 동지들과 임정수립을 내외에 선포하고 이승만이 부임치 않자 국무총리로 취임, 임정의 터줏대감이 되었다.

그해 9월 헌법이 대통령 중심제로 바뀌자 그는 내무총장이 되었다.

1920년 이동휘가 사임하자 그는 국무총리 대리를 맡아 임정의 위기를 극복하였다.

국민대표회의 소집 등 임정 불신이 표면에 나타나자 그는 안창호 · 여운형 · 조소앙 · 이시영 · 차이석 · 홍진 · 노백린 등과 시사책진회를 조직 대동단결을 호소하였다.

1925년 그는 국무총리로 정식 취임하였고 군무총장도 겸임하였으며, 이승만의 장기 궐석으로 대통령 직권을 대행하였다.

이때 조선총독이 한국인을 시켜 그에게 귀화를 권유하였으나 즉석에서 일축, 이로 인해 그 부친이 투옥된 일도 있었다.

1925년에 두 번째로 의정원의장이 되었고, 1926년에는 국무령이 되었다.

이때 58세인 그는 법무총장도 겸임 2차 개헌에 따른 국무령 지도체제를 발전시켜 나갔다.

다음해 그는 임정의 주석이 되어 약화된 임정을 튼튼한 반석위에 올려 놓았다.

1928년에는 김구 등과 같이 한국독립당을 조직, 그 이사장에 추대되었으며, 당 기관지 한보·한성을 발행하였다.

1929년 10월 세 번째로 의정원의장이 되어 임정의 존폐위기를 겨우 극복하고, 두 번째의 임정 주석이 됨으로써 중책을 짊어졌다.

1932년이봉창 · 윤봉길 의거를 김구 · 이유필 등과 지도, 쾌거를 이루었다.

이로인해 민필호 등의 주선에 따라 임정 요인과 같이 절강성 가흥 수륜사창으로 피신하였다.

1937년에는 한국국민당 대표로 대한광복진선을 구축하고 그 진로를 모색하였다.

1939년 그는 임정의 네 번째 주석이 됨으로써 김구와 합심하여 전시 내각을 구성, 서안에 대한국사단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후 반평생을 해외에서 임시정부를 이끌어 조국광복의 일념에 투쟁하던 그는 1940년 3월 13일 사천성기강에서 과로로 영면하였다.

임시정부 국장으로 장례를 치렀으며, 광복후인 1948년 9월 22일 김구의 주선으로 유해를 봉환 사회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