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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 1948년 8월 15일 – 1960년 4월 2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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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통령: | 1대 : 이시영 2대 : 김성수 3대 : 함태영 4대 :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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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 1919년 4월 10일 – 1925년 |
내무총장: | 안창호 |
전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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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75년 3월 26일 조선 황해도 해주 |
사망: | 1965년 7월 19일 미국 하와이 |
정당: | 자유당 |
본관: | 전주 |
배우자: | 프란체스카 도너 |
이승만(李承晩, 1875년 3월 26일 ~ 1965년 7월 19일)은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주석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역임하고 주로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벌였으며 1945년 해방 후
귀국하고 분단된 남쪽에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한국 전쟁을 거치고 1960년까지 대통령직을 유지하였으나 정권의 부패와 부정선거로 인해 4·19 혁명이
일어나게 되자 하야하여 망명하였으며 돌아오지 못하고 1965년 망명지인 하와이에서 숨을 거두었다.
[생애]
[생애 초기]
이승만은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해주에서 왕족이며 몰락한 양반 가문인 이경선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명은 승룡(承龍), 호는 우남(雩南).
아버지 이경선(李敬善, 1839년 ~ 1912년), 어머니 김해 김씨(1833년 - 1896년) 사이에 3남 2녀중 막내로 출생
하였으나, 손위의 두 형이 그의 출생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장남 역할을 대신하였고 사실상의 6대 독자가 되었다.
그는 양녕대군(태종의 장남)의 16대손이지만 대군이 세자 자리를 동생 충녕대군(세종)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에
양녕대군파는 조선시대에 별로 빛을 볼 수 없었고 이승만 자신은 가난하게 자랐기 때문에 조선왕조 자체에
대해 극히 비판적이었다.
1877년 그의 가족은 황해도에서 한성으로 이사하여 남대문 밖 염동, 낙동을 거처 도동의 우수현(雩守峴)으로
이사 다녔고, 우수현에서 성장하였다.
그 때문에 그는 지역적으로 서북파보다는 기호파로 분류되는 것이 보통이다.
1879년 퇴직 대신 이건하가 운영하는 낙동서당에 입학하였고, 1885년부터 1894년 이전까지 사간원 대사간을
지냈던 양녕대군의 봉사손 이근수가 운영하는 도동서당에 다니면서 수학하였다.
1895년 4월 2일 신긍우(신흥우의 형)의 권유로 아펜셀러의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계몽운동]
배재학당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다가, 곧 일본의 지배에 반대하는 한국의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한 원수를 갚는다는 계획(춘생문 사건)을 하였다가 계획이 사전에 탄로나 황해도 평산의 누이 집에
3개월간 피신하였다.
이승만은 독립협회의 민중운동시기 즉 1898년 만민공동회 당시 가장 치열하게 앞장선 운동가들 중의 으뜸가는
청년이었으며 활발한 연설가였다.
이후 정치 활동에 참여한 이승만은 1904년 중추원 설립 후 입헌군주제를 추진했다는 혐의로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고 사형 선고까지 받았으나, 외국인 선교사들이 그를 빼내도록 협조를 해줘서
4개월여 만에 풀려나 상동교회의 상동청년회에 속한 상동청년학원을 설립한 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외교 활동]
1904년 8월 출옥한 이승만은 민영환(閔泳煥)을 만나 그의 밀서를 소지하고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11월
도미한다.
1905년 태프트는 테오도르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와 의원 워즈워스을 대동하고 아시아 수행길에 하와이의
호놀룰루를 경유하였다.
이때 이승만은 호놀룰루의 한인 선교부를 책임지던 와드먼 박사를 통해 태프트와 접촉, 그의 추천장을 받아
테오도르 루스벨트를 만났다.
어렵게 테오도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기는 했지만 힘없는 나라의 무명청년의 호소에 귀를 기울일 루스벨트가 아니었다.
뒤에 진실을 알게된 이승만은 미국이 한국을 일본에게 팔아넘겼다고 확신하였고 그후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밀사활동 실패에 실망한 이승만은 미국에 남아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다.
[도미 유학]
1907년에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영어: Bachelor of Arts)를 받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그리고 1910년에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
(영어: Doctor of Philosophy)를 받았다.
학비나 후원자가 없던 이승만은 노동과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하였다.
그의 처지를 알게 된 지도교수가 학교에 요청하여 장학금과 박사학위 출간 비용을 지원받기도 하였다.
(박사 논문 제본 비용 80달러가 없어서 논문은 2년 후인 1912년에 출간된다.)
이승만은 서구적인 교육을 받은 영향으로 그의 이름을 성보다 앞서 사용하는 서양식 이름을 썼다
(Sungman Rhee, 또는 승만이).
당시 박사가 거의 없었던 한국에서 이승만은 '박사'의 대명사가 되었고, 1948년 대통령이 된 뒤에도 사람들은
그를 이승만 대통령보다는 '이승만 박사'라고 불렀다.
1910년 한국으로 돌아가 YMCA에서 교사로서, 그리고 감리교 선교사로서 생활을 하다가 2년 후인
1912년 미국으로 되돌아갔다.
장인환`전명운 의사가 1908년 대한제국의 외교 고문으로 활동하던 친일파 스티븐슨을 저격하여 미국 법정에
서게 되었다.
미주의 한인들은 십시일반하여 이들의 재판을 도왔는데, 그와중의 법정 통역을 이승만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종교 상 이유와 논문작성이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활동]
1919년 3월 러시아령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의 대한인국민회에서 국무총리에 선출되었고 1919년 4월에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혹은 집정관 총재)로 뽑혔다.
3`1운동 이후, 1919년 9월에는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해주의 대한인 국민회, 서울의 한성정부 등이
합쳐저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동휘로 하는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선출되었다.
대통령에 뽑혔지만 여전히 하와이에서 살고 있었고, 1920년 12월에 처음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구로
배를 타고 임병직, 이원순 등을 대동하고 미국에서 상하이로 건너왔다.
배삯이 부족하여 중국인 시신 운반선에 밀항하여 고국으로 운반되는 중국인의 시신들 틈에 숨었다가 상하이로
건너오게 되었다.
그가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되었던 데는 당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이승만이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을 때 총장이었다는 점이 작용하였다.
당시 임시정부는 외교 활동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이루고자 했고, 외교활동의 주된 목표는 민족자결주의를
선포한 미국이었다.
그런데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대통령에 임명되기 전에 당시 임시정부 직제에 없었던 대통령 명함을
사용함으로써 안창호와 대립하였으며, 1921년 이후에는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오지도 않았다.
이승만은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건을 계기로 다수의 독립운동가와 갈등하다가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의 의결로 대통령직에서 탄핵당했다.
같은 시기인 1918년 4월 23일에는 경성에서 한성임시정부가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로 추대했다.
그러자, 이 즈음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워싱턴 D.C.에 집정관 총재 사무실을 열어 재빠르게
대외적으로 대통령 행세를 했다.
그 후 이승만은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의 구미위원회 대표직을 역임하였다.
미국 내의 재미 교포 조직들은 안창호 지지 세력과 이승만 지지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들의 분열은 미국이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미국은 중국 국민당의 강력한 요구에도,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있는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다.
[1930년대에서 40년대 초]
구미위원부에 활동하며 미국, 유럽, 국제연합 등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성명서를 보내는 등의
외교적 활동을 하였다.
1941년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과 태평양 제국가를 식민지로 삼아 유럽,구미 침략을 경고한 일본 내막기를
출간하였다.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을 겪은 미국인에게 일본의 침략을 경고한 일본 내막기는 큰 설득을 얻게 되었다.
1942년 1월 2일 이승만은 국무부를 방문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과 일본을 상대로 한 대일전쟁에
참가하기 위한 무기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미국 국무부의 혼벡과 히스는 현 시점에서 한국의 독립정부를 승인한다면 소련의 반감을 사게 될 것이고, 소련이 대일본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을 할수도 없지만 소련의 관심 또는 이권을 무시할수 없다고 하면서 이승만의 임시정부 승인요청을 거절하였다.
이승만은 그뒤에도 계속 미국에 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승만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측에서는 1882년 체결된 한미수호조약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
한국사람들의 대일본 전쟁에서의 공헌 가능성 등을 설득하며 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미국은
미국대로 임시정부 승인이 불가능한 이유를 여러가지를 들면서 반대하여 양자의 대립은 심화되었다.
[해방 정국]
- 1945년 9월 7일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선임되었다. (조선인민공화국 참조) 그러나 취임을 거절하였다.
- 1945년 8월 하순 이승만은 굿펠로 대령의 도움으로 미 여권국으로부터 여행증서를 받고 군사지역으로 지정되어있던 한국에 입국하려고 극동사령부로부터 입경 허가서를 받아 출발을 서두르게 되었다.
- 미 국무부는 이승만의 허가서에 고급 집정관(High Commissioner)라는 표현이 있음을 문제삼아 정정을 요구했다.
- 문제가 생긴 것은 9월 23일이었다. 이 표현을 삭제한 뒤에야 여행문서를 재발급받았다.
- 1945년 10월 4일 뉴욕, 그 간 미국을 주된 활동 무대로 삼아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해온 이승만이 귀국길에 올랐다.
- 이승만은 하와이와 괌을 거쳐 12일 도쿄에 도착한 뒤 그곳에서 맥아더를 만나 며칠 머문 다음, 미국 군용기를 이용하여 10월16일 오후 5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 이승만의 귀국 경위는 매우 복잡해 아직까지도 학자들 사이에 의견 통일이 돼 있지 않지만, 널리 통용되고 있는 견해는, 미 국무성은 이승만의 귀국을 반대했지만, 미 군정청장 존 하지 중장이 그의 귀국을 원했다는 것이다.
- 그의 귀국은 다른 독립운동지도자보다 이른 것이었다.
- 이승만이 비교적 연합국 측에 잘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 귀국 다음날인 1945년 10월 17일 오전 10시 존 하지의 안내로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존 하지의 대접은 극진했다.
- 저녁 8시 30분에는 서울 중앙 방송국의 전파를 통해 첫 방송을 했는데, 당시 그의 연설 요지는 "나를 따르시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였다.
- 이후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참여하였다.
- 1945년 10월 23일 자신이 소집한 회합에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회장으로 추대되었다.(독립촉성중앙협의회 참조) 이후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 1945년 11월 21일 <공산당에 관한 나의 관념>이란 방송 연설을 통해 공산당에 대해 독설을 퍼부었다.
- 이후, 돈암장에 머물렀다가 거처를 이화장으로 이동했다.
- 1946년 1월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우익세력과 함께 반탁운동을 추진하되 김구가 체포되어 투옥될 정도로 격렬하게 하도록 사전에 말을 맞추었다.
- 그러나 계획은 미군정 첩보망에 걸렸고 이승만은 1월 16일 미국 워싱턴에서 국내에 전문을 보내 김구에게 과격 시위를 중단할 것을 요청하게 되었다.
- 1946년 2월 13일 비상국민회의의 최고정무위원직으로 선출되었다.
- 1946년 2월 14일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 의장에 선출되었다.
- 1946년 3월 19일 민주의원 의장직을 사퇴했다. 표면상 이유는 건강 문제였지만, 사실은 미 군정이 다음날 개최될 1차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두고 철저한 반소(反蘇)주의자이며 신탁통치안을 격렬히 비판해 온 이승만을 정치 일선에서 배제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 1946년, 북한이 공산주의화 되어가자,
- 1946년 6월 3일 전라북도 정읍에서 가진 유세에서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 '단독 정부'라는 말은 쓰지 않았지만 그 내용은 사실상 단독 정부 수립을 역설한 것과 다름없다.
- 1947년 3월 12일 미국의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자,
- 이를 쌍수로 환영하면서 이것이 모든 나라에 서광을 비추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 그는 해리 S. 트루먼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내 한국에 이 정책을 수용케 함으로써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사이에 협조를 이끌어내려는 미군정의 정책을 포기토록 권하였다.
- 또한 '미국 지역 내에서 즉각적인 과도 독립정부를 수립함으로서 공산주의의 진출에 대한 방파제를 구축'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1947년 4월 5일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길에 올랐다.
- 귀국 도중, 일본에서 맥아더를 만났고, 중국에 들러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의 환대를 받았다.
- 1947년 4월 21일 귀국하였다.
- 1947년 4월 23일 귀국성명을 발표하였다.
- 4월 27일 열렬한 환영 속에 열린 귀국 환영대회에서 이승만은 입법위원이 총선거 법안을 만들어 남한 과도정부, 즉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하며 이제 김구와 김규식은 임정법통론과 좌우합작론을 모두 포기하고 나와 같이 보조를 취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 1947년 6월 19일 미소공위 참석 문제를 놓고 제단체 간 이론이 있자,
- 한민당은 '참여하여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공위 협의에 참가할 것을 주장하면서 6월 19일 74개 정당 사회단체로 구성된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를 구성했다.
- 이에 대해 이승만은 '회의에 참가해서 신탁을 반대할수 있다는 말은 우리로서는 해석키 곤란하다. 속이고 들어가서 반대하겠다는 것은 자기의 신의를 무시하는 자'라고 불만을 토로하였다.
- 한국독립당에서도 미소 공위의 참석에 찬성하는 혁신파와 민주파는 한독당을 이탈하여 신한민족당과 민주한독당을 결성하였다.
- 이로 인해 이승만과 김구만 고립되었고, 한민당의 변화에 분노한 이승만과 김구는 공위 협의 청원서 제출 마감일인 1947년 6월 23일 여러 곳에서 반탁 시위가 벌어지게끔 주도하였다.
- 6.23 반탁데모로 전국학련의 반탁시위대가 소련측 공위 대표단에게 돌을 던지는 등의 맹활약을 하였으며 학생시위대 시위가 끝난후 시위대는 이승만을 찾아 경과를 상세히 보고하였다.
- 이승만은 그들을 격려하며 이철승에게 '자네는 건국공신이야 큰일을 해냈어'라 하며 칭찬하였다.
- 미소공위가 결렬되자 1947년 7월 10일~7월 12일 전국에서 올라온 대의원 200여 명을 모아 제1회 한국민족대표자 회의를 개최하여 자신의 단정 노선을 역설하였다.
- 1947년 8월, 미 군정 관계자에게 테러리스트들의 좌익 공격을 금지할 수도 없고, 금지하는 것을 원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 1947년 9월 17일 미군정이 조선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겠다고 발표했다. 소련은 강력 반발하였지만 이승만은 김구, 한민당과 함께 이를 크게 환영하였다.
- 1948년 5월 10일 국회의원 선거에서 동대문구 갑에 단독으로 입후보하여 무투표 당선되었다.
- 1948년 5월 31일 구성된 제헌국회의 이승만을 초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 1948년 7월 20일 1948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제헌 국회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 1949년 미국의 애치슨 라인 선언에 비판적이었다.
[대통령직 수행시]
- 이 부분의 본문은 제1공화국입니다.
이승만은 1948년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2위 김구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48년 8월 15일에 정부수립을 하였으며 1948년 8월 13일부터 1960년 4·19 혁명으로 붕괴되기 전까지의
시기(제1공화국)의 대통령이었다.
초기에 집권 여당은 없었으나 1949년 친이승만계 정당 대한국민당 창당 이후 독립촉성중앙회를 중심으로
이승만의 직계 정당인 자유당이 1952년 창당되었다.
그는 반공·반일적 정치성향으로 일본과의 외교하자는 의견을 묵살하고 반일외교 노선을 지향하였다.
- 이 부분의 본문은 반민족행위처벌법입니다.
반민족행위처벌법은 1948년 9월 22일 법률 제3호로 제정된 법률로 만들어진,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는
친일파들과 결탁한 이승만 정권의 탄압으로 강제해산되었다.
[한국 전쟁]
- 이 부분의 본문은 한국 전쟁입니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6·25 전쟁이 일어나자 이승만은 라디오 연설로 서울시민은 정부를 믿고
동요하지 말라는 방송을 했지만 방송 진행중에 본인은 각료들과 함께 특별열차로 대전으로 피신하는 중이었다.
대전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7월 1일 새벽에 열차편으로 대전을 떠나 이리에 도착하였다.
7월 2일에는 다시 목포에 도착하였고, 배편으로 부산으로 옮긴 뒤 7월 9일 대구로 옮겨갔다.
그러나 국민들이 전혀 모르고 있던 상황에서 북한군이 미아리 고개까지 쳐들어 오자 그 때서야 국민들은
대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부는 북한군이 한강을 넘어서 진격할 것을 우려해 한강에 단 하나 뿐인 다리였던 한강철교를 부섰다. 지금까지도 정부의 이 같은 실책을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자 국민들은 오도가지 못 하게 되었고 조선인민군은 서울을 넘어 부산, 포항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유엔군의 참전과 인천 상륙 작전]
- 이 부분의 본문은 인천 상륙 작전입니다.
한편 대한민국 정부는 전쟁이 일어나자 주미 대사에게 긴급 훈령을 내려 미국 국무성에 사태의 긴급성을
알렸고, 미국은 유엔 안보리를 열어 한국 문제를 건의했다.
이에 따라 UN 안전보장이사회는 6월 26일 오전 4시에 소집되어 "북조선군의 즉각적인 전투 행위 중지와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청하는 미국의 제안을 9대 0으로 가결하였다.(유고슬라비아는 기권)
이러한 결의를 북조선 측에 통고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아 6월 27일 다시 안전 보장 이사회를 열어 "회원국들에게 군사 공격을 격퇴하고, 그 지역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원조를 대한민국에 제공할 것"을
7대 1(기권2)로 결의했으며, 이 날 해리 S. 트루먼은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대한민국에 대한 해,공군의 지원을
즉각 개시하라"고 명령했다.
결국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콜롬비아, 터키 등 16개국의 회원국이 유엔군을 조직하여 한국전에 참전하기에 이르렀다.
그 동안 대전까지 들어온 인민군이 진로를 세 방면으로 나누어 호남, 경북 왜관(낙동강), 영천, 포항 등지로
육박하자,
대전에서 대구로 내려와 있던 대한민국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한편 한국군을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지휘 하에 편입, 대폭 증강하여 낙동강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삼고
반격하였다.
6월 30일 해리 S. 트루먼이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지상군 투입과 38선 이북의 군사 목표를 폭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함에 따라, 7월 1일 미국 육군 제24사단 21연대가 부산에 상륙했다.
이 부대는 대대장인 중령 찰스 스미스의 이름을 따서 스미스 부대로 알려졌다.
스미스 부대는 7월 5일 오산 북쪽 죽미령에서 조선인민군과 첫 교전을 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스미스 부대의 무참한 패배로 미국 지상군의 전선 투입이라는 위세만으로 북한군의 남침이 중단되기를
바랐던 더글러스 맥아더나 윌리엄 딘의 한가닥 기대는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나중에 더글러스 맥아더의 뒤를 이어 유엔군을 지휘하게 되는 매튜 리지웨이는 그의 회고록에서 맥아더는
침공군의 세력을 잘못 판단했으며 인민군 10개 정예사단 앞에 1개 대대를 투입한 것은 맥아더의 지나친
오만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스미스 부대의 참패를 성공이라고 자평했다.
미 지상군 참전에 예기치 않던 인민군이 미군 참전을 직접 목격하고 소련 전법에 따라 일단 전선을 재정비하면서 미군은 10일을 벌었다는 것이다.
7월 1일 영국과 프랑스는 "유엔군사령부의 설치와 유엔 회원국들의 무력 원조를 미국 정부의 단일 지휘 아래 둔다"는 공동결의안을 유엔 안보리에 제출했다.
이 결의안은 7월 7일 7대1(기권3)로 가결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을 비롯하여 오스트레일리아 · 벨기에 · 캐나다 · 콜롬비아 · 프랑스 · 그리스 · 에티오피아 ·
룩셈부르크 · 네덜란드 · 뉴질랜드 · 필리핀 · 태국 · 터키 · 영국 ·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16개국 군대로 유엔군이 편성되었어 남한을 돕게 되었다.
스미스 부대의 패전 이후, 미군은 딘 소장이 이끄는 육군 24사단을 대전에 투입했다.
딘 소장은, 대전에서 적의 선봉을 꺾고, 한강까지 북상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겠다고 장담했다.
그렇지만 미 육군 24사단도 T-34에 대적할 화기가 없었다.
대전을 공격하는 공산군(조선인민군)은 숫자도 많았고, 사기가 높아 T-34를 앞세워 미 육군 24사단을 공격했다. 계속된 공산군의 공격에 상당한 손실을 내던 대전의 미 육군 24사단은 마침내, 7월 20일, 패주하고 말았다.
사방에서는 압도적인 숫자의 조선인민군이 밀려왔고, 지휘계통이 무너진 가운데 미 육군 24사단은 무질서하게 후퇴했다.
그러나 인천 상륙 작전이 시행 됨에 따라 국군과 유엔군은 압록강까지 전진하였다.
[1·4 후퇴와 휴전]
- 이 부분의 본문은 1·4 후퇴입니다.
그러나 1951년 1월 4일에 중화인민공화국이 궁지에 몰린 북조선을 도와주자 예상치 못한 반격에 국군과 유엔군은 50만 중국군을 상대로 후퇴하였다.
이 때 중국군이 다시 서울을 점령하에 따라 전쟁을 원점으로 돌아왔고 유엔군과 이승만 대통령은 북쪽 땅인 원산 등 기타 지역에 폭격이 일어났다.
1월 12일 일본군의 참전설이 나오자 이승만은 이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였다.
2월 38선은 공산군의 남침으로 이미 없어진 것이므로 북진 정지는 부당하다고 선언하였으며 2월 15일 한반도 통일을 전쟁 목표로 분명히 밝히고 미국에도 통보하였다.
3월 24일 한만국경까지 진격하기 전에 정전은 안 된다고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6월 9일 38선 정전의 결사반대를 선언하였고 6월 27일 소련의 정전안을 거부하였다.
9월 20일 휴전수락의 전제조건으로 중공군 철수, 북한 무장해제, 유엔감시 하 총선거를 요청하였다.
2년 동만 이렇다 한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1953년 7월 27일에 판문점에서 휴전 협정이 조인됨으로써
3년 1개월 만에 한국 전쟁 휴전으로 매듭을 지어지자 이승만 대통령은 다시 서울에 올라왔다.
[2선과 3선]
1950년 총선에서 무소속 후보의 대거 당선되고, 거창 양민 학살 사건과 국민 방위군 사건 등으로 이승만 정부는 지지 기반이 약화되어갔다.
1951년 11월 19일 독립촉성중앙회를 기초로 자유당이 창당하고 자유당 총재직을 수락하였다.
그리고 1952년 부산정치파동에서 발췌 개헌을 시도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내,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 될 수 있었다.
그후 1954년 사사 오입 개헌을 통해, 초대 대통령의 3선 제한을 철폐하여 1956년의 3대 정부통령 선거에
대통령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부통령 선거에서는 야당인 장면이 당선되엇고,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당의 대통령 후보인 조봉암이
선전하여 매우 거센 저항에 휩싸였다.
이 저항에 이승만 정부는 진보당 사건을 통해 저항을 타개해 나갔다.
1957년 1월 휴전협정 폐기와 군비강화를 강조하였고, 3월 21일 82회 생일을 맞아 우남장학회를 발족하였다.
1958년 1월 1일 이북동포에게 메시지를 보냈으며, 1월 21일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강조하였다.
2월 23일 유엔군의 철수가 불가하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0월 원자력 연구를 실시하게 하였으며 11월 월남을 순방하고 돌아왔다.
1959년 1월 국가재산의 효율적인 운영을 지시하였고, 1월 26일 일본에게 약탈문화재에 대한 반환을
외신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요구하였다.
2월 일본이 재일동포를 북송하자 추방이라며 강하게 비난하였다.
1959년 9월 2일 국무회의에서 학원(학교)에 잡다한 부과금 등을 근절할 것을 지시하였다.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
1960년 4월,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학생을 중심으로 시작하여, 사회의 전계층으로 확산된 시위인 4·19 혁명이 일어나,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했으며 부통령 당선자 이기붕은 가족과 함께 자살하였다.
4월 23일 시위진압경찰의 발포로 시민들의 사망이 전달되자 애도의 뜻을 발표하였으며 4월 24일 유혈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유당 총재직을 사임하였다.
4·19 혁명은 일본의 민중운동인 안보투쟁에도 영향을 주었고 4월 25일 이승만은 자진 퇴임을 선언하고
국회에 사퇴서를 제출하고 물러났다.
[망명과 죽음]
그는 한국을 떠날 때 영구 망명을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한 달 정도 잠시 피하는 걸로만 생각했다.
하와이에서 이승만은 향수병에 걸렸다.
한국에 돌아오고 싶어 1962년 3월 17일자 비행기표까지 끊어놓고, 3월 16일 '사과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3월 17일 박정희는 특별지시를 통해 이승만의 귀국을 막았다.
3월 18일자 신문들도 사설을 통해 이승만의 귀국을 반대했다.
이후 그 곳에서 조용히 살다가, 1965년 7월 19일 91세의 나이에 병으로 사망했다.
[가족과 친지]
이승만은 태종 이방원의 맏아들인 양녕대군의 후손으로, 그의 다섯째 아들 장평도정 이흔의 15대손이자
6대 독자이다.
아버지는 이경선. 누나가 둘이 있었으나, 해방 전에 세상을 떠났다.
한국에서 혼인한 본처와 헤어지고 후에 오스트리아 국적의 프란체스카와 혼인하였으나, 자식이 없어서,
효령대군의 후손이자 이기붕의 아들인 이강석을 양자로 삼았다.
이우의 아들 이청도 양자 후보에 올랐으나, '왕정복고를 연상시킨다' 하여 거부되었다.
이 후 이강석이 자살하여 대가 끊기게 되자,
이인수는 명지대학교 법정대 학장을 역임한바 있다.
한국 전쟁 뒤, 이승만은 사람들이 순종의 계비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 순정효황후를 존경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녀를 정릉의 수인제(修仁齊)에 가두어 두었다.
이승만은 그가 이씨 왕족과 관련되어 있다는 주장도 하기 시작하였다.
- 아버지 : 이경선(李敬善) (1839년 ~ 1913년)
- 어머니 : 김해김씨(1833년 ~ 1916년)
- 누이 : 황해도 해주의 우씨에게 출가
- 누이 : 황해도 연백의 심씨에게 출가
- 배우자 : 박씨(1891년 결혼, 그뒤 이혼) 1875년 ~ ?
- 배우자 : 프란체스카 도너 (1900년 ~ 1992년 3월 19일)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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