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대한임정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3대 주석 이상룡

오늘의 쉼터 2008. 9. 3. 10:17

 

이상룡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3대 주석
임기 1925년 - 1926년 1월
전임 박은식
후임 이동녕
출생일 1858년 11월 24일(1858-11-24)
출생지 대한제국 조선 경상북도 안동
사망일 1932년 6월 15일(1932-6}-15)
사망지 만주 지린성
사망 원인
종교
자녀
 

30061023222926[2].jpg

이상룡(李相龍, 1858년 음력 11월 24일 ~ 1932년)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1925년 9월 24일부터 1926년 1월까지 제3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반을 역임하였다. 본명은 이상희(李象羲)이나 이계원(李啓元), 이상룡으로 개명했다. 아호는 석주(石洲).

 

[생애]

경상북도 안동의 유림 명문가에서 출생했다.

 생가인 임청각보물 제182호로 지정되어 있는 고택이다

유학자이며 의병장이었던 김흥락의 제자로서 의병 운동에 참가했으나, 50세 무렵인 1907년경부터 교육의 역할을 중시하는 애국계몽운동으로 방향을 전환, 협동학교 설립 및 대한협회 안동지회 창설, 시국 강연 등을 벌였다.

유인식, 김동삼이 이때부터의 동지들이다.

그러나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고 대한협회가 해체되자,

신민회의 해외 독립기지 설치 방침에 동조하여 1911년 일가족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했다.

이상룡의 집안은 이회영, 허위의 가문과 함께 대표적인 독립운동 가문으로, 그를 포함해 두 동생 이상동, 이봉희, 아들 이준형과 손자 이병화, 조카 세명이 독립유공자로 훈장을 수여받았다 외삼촌은 의병장 권세연이며, 처가 역시 소문난 독립운동 가문이다.

이상룡은 이곳에서 독립 운동을 위한 자치기구인 경학사 조직과 부속 교육기관인 신흥강습소 설치에 참여했다.

경학사는 이듬해 부민단으로, 1919년 3·1 운동을 기점으로 한족회로 발전된다. 신흥강습소는 이후 신흥무관학교로 개칭하여 무장 독립 운동가들을 양성하는 기관이 되었다.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는 모두 만주 지역 독립운동의 효시라 할 수 있다.

만주에 군사 기구인 군정부를 설립했다가 상하이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치되자 이를 지지하고 군정부를 서로군정서로 개칭했다.

서로군정서 책임자로서 1921년 남만통일회를 개최하여 서간도 일대의 독립 운동 단체를 통합하여 통군부를 수립했다.

1925년 대통령 이승만이 탄핵으로 물러난 후 박은식이 제2대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나 사퇴하자 1925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첫 국무령이자 제3대 수반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갈등이 계속되고 내각을 조직할만한 세력을 모으지 못하자 1926년 1월 임시정부 수반직을 사임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이후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로 나뉘어 있던 운동 단체 통합을 위해 노력하다가 1932년 지린에서 병사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대구달성공원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고성 이씨의 입향조 형제 조카들은 모두 대단한 학자로 무오·갑자사화에 절개를 지켜 명문으로 기틀을 다졌습니다 이후에도 많은 인물이 나와 안동 양반사회에서 도산서원 원장과 함께 최고의 명예직으로 삼고 있는 안동좌수(座首)를 이 집안에서 가장 많이 배출하였습니다.
애국시인 이육사 형제들은 어려서부터 종고모 집인 읍내의 임청각에 드나들며 함께 지내기도 하였다.
특히 한말 독립운동가 아홉 분이 임청각에서 출생하였습니다.
대표인물로는 금세기 초 상해 임시 정부의 초대 국무령(국가원수)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이 임청각에서 출생하였습니다.

 

 

     

 

1925년 상해임시정부국무령 재직시

석주 이상룡 선생 훈장

 

건국 공로훈장 (석주 이상룡)

석주용장

매화연

 

석주용장 -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이 김규식(金奎植)으로부터 증정 받은 지팡이로 용의 형상과 매우 흡사합니다 이상룡의 손부
                김해허씨(金海許氏 : 허은여사)의 전언에 따르면 이 지팡이는 중국 만수산(萬壽山)의 천연 목으로 제작된 것으로 김규식이
                어느 승려에게 두 개를 구해 하나를 석주에게 준 것이라 합니다. 일생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상룡의 생애를 고려할 때
                이 지팡이 역시 민족항쟁의 숨결이 깃든 유품이라 하겠습니다.

매화연 - 만주에서 독립운동가로 활동할 때 항상 휴대하고 다니면서 각종 문서의 기초(起草)에 사용한 벼루입니다.

             석주의 아들 동구(東邱 : 이준형 李濬衡)와 손자 소파(小坡 :이병화 李炳) 도 대를 이은 독립운동가로 3대가 독립운동가로 서훈을
             받은 몇 안 되는 독립운동 집이며 그 피해는 사람에 이어 건물에 까지 심하게 미쳤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이었던 석주 이상룡 선생이 한일 합방 이듬해인 1911년 정초, 망명의 길 도중 압록강을 건널 때에 비통한 감회를 읊은 시입니다.

가계도

 

 

석주선생은 1858년 경북 안동시 법흥동 임청각에서 유림 명문 이승목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고성(固城)으로 어릴 때 이름은 상희(象義), 호는 석주(石洲)이며,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한 이후 상룡(相龍)으로 개명하였습니다. 평생 부귀를 누릴 수 있는 석주선생이 조국과 종갓집, 조상 산소와 수많은 전답을 남겨 둔 채 삭풍이 휘몰아치는 정월에 만주 땅으로 떠났으니, 그 감회는 창자를 자르는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일찍이 석주선생은 퇴계학 전통을 이은 서산 김흥락(金興落)문하에 들어가서 학문을 익혔다. 1876년 강화도 조약에 충격을 받아서 척사위정(斥邪衛正:사학을 물리치고 정학과 정도를 지킴)활동을 하다가 일제가 을미사변(1895년 일본공사 미우라가 주동이 되어 명성황후를 사해한 만행)을 일으키자. 더 이상 의분을 참지 못하고 책을 덮고 구국 의병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신학문으로 서양의 민주제도에 눈을 뜨자 먼저 당신의 노비문서부터 모두 불살라 버리고 그 동안 거느리던 종들도 모두 해방시켰습니다.

   석주 선생 교육 기념비

 

 

 

1958년 11월 24일

안동시 법흥동 20번지 임청각에서 3남 3녀 중 장남으로 출생

1907년

협동학교설립

1909년 3월

대한협회 안동지회 설립

1911년 1월 6일

50여 가구 인솔 만주로 망명

1911년 4월

해외 최초의 독립운동단체 「경학사(耕學社)」창설 회장으로 취임 부설 신흥경학사 설립

1912년

부민단(扶民團) 창설 (회장취임) - 3·1운동 전후에는 한족회(韓族會)로 개편·발전

1913년

대동역사大東歷史 저술  -신흥학교 교재로 사용

1914년 4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설립 독판(督辦 : 국가원수)취임 (부설 신흥무관학교 설립)
망명 초기에 함께 일하였던 이동녕·이동휘·이시영등이 안창호·이승만(李承晩)등과 상해에 임시정부를 세우고, 여운형을 보내와 대동 통합을 요청하였습니다 군정부에서는 반대 여론이 높았습니다. 하지만 석주선생은 "나 또한 임시정부를 세우기에는 아직 시기가 이르다" 고 생각하지만, 이미 정부를 세웠으니 광복 대도에 분열이 있어서는 안 된다" 라고 대의로써 동지들을 설득시켰다. 그 후 정부라는 호칭을 임시정부에 양보하고 군정부를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총재를 독판(督辦), 독립군을 의용대로 고쳐 부르게 하여 본래의 사업을 지속케 하였습니다.

1918년

무오 독립선언서 채택 서명

1919년

한족회(韓族會) 조직(회장취임)

1920년

북경 '군사 통일회'에 군정서 대표 파견

1922년

서로 군정서, 대한독립군단 등 8단 9회의 단체를 통합 대한통의부를 성립시키고 그 총재에 서로조정서의 참모부장 김동삼을 선임시킴

1925년 9월 25일

상해 임시정부의 개정헌법에 따라 초대 국무령(국가원수)에 선출, 취임

1926년 2월

국무령 사임

1928년

손자 병화, 정의부 간부로 뽑힘

1928년∼1929년

전민족 유일당과 삼부통합의회 개최

1932년 (음력 5월 12일)

75세를 일기로 꿈에도 그리던 조국 광복의 환희를 보지 못한 채 길림성 서란현 소고전자에서 서거(逝去)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추서(追敍)

1973년

고려대학교에서 유고집 간행

1990년

대전 국립묘지로 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