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음택지

광산 김문의 근원을 찾아서, 유성 전민동 묘역

오늘의 쉼터 2008. 6. 4. 12:58

 

광산 김문의 근원을 찾아서, 유성 전민동 묘역

 

대제학의 품계는 판서와 동등한 정2품이지만, “열 정승이 한명의 대제학만 못다”는
말이 의미하듯 문치주의를 표방한 조선시대에는 선비 중 최고의 영예로운 벼슬로
서 정승·판서보다 높이 우대하였다
조선시대에 5명 이상의 대제학을 배출한 가문을 살펴보면

7명 : 전주이씨, 연안이씨, 광산김씨
6명 : 달성서씨, 안동김씨, 의령남씨
5명 : 덕수이씨

특이한 것은 연안이씨 중에서도 이석형의 후손에서만 3대 대제학을 비롯하여 7명의 대제학이 나왔으며,

광산김씨는 김장생의 아홉 아들 중 오직 셋째인 金 槃의 자손에서만 역시 3대 대제학과 7명의 대제학이

배출되었다  따라서 이석형과 김 반, 두 가문이 조선조 최고의 명문가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표1]




 


[표2], 김호---김계휘---김장생






위의 족보에서 보듯이 유독 김장생의 셋째아들 金 槃의 후손에서만 집중적으로 7명의 대제학을

배출하고 있다
그런데 앞선 두 회에서 살펴보았듯이 김장생의 묘는 풍수의 이론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또 金 鎬 묘가 명당이어서 김장생과 김 집 父子를 文廟에 배향케 했다 할지라도,

독 曾孫 김 반의 후손에서만 대제학이 배출된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대제학의 등장은 김 반 묘소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만약 김 반 묘가 穴이고 明堂임을 학술적으로 밝힐 수 있다면 풍수의 發福과 同氣感應에
대해서 회의적인 인식을 불식시키는데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金 槃 (이조참판) : 1580 ~ 1640, 壬坐 丙破
묘소위치 : 대전시 유성구 전민동

<1>, 반듯한 주산에서 시작되는 용이 40m 가량의 긴 과협을 지나면서 3개의 泡를 만들고

점점이 石脈으로 이끌고 있는데, 이것이 홀연히 두 갈래로 나누어지고 있다
이때 어느 것이 主龍인지의 여부는 가지가 있고 없음을 살피면 된다고 말한 바 있



두 능선을 걸어보면 A는 곧고 길게 형성되었고, 반면 김반의 묘로 향하는 B는 짧지만 좌우에 가지가

생성되었다 그렇다면 김 반 묘로 향하는 맥이 本身이며, A는 護從砂가 된다 
이러한 형태는 용인의 이석형 묘소와 매우 흡사한데, 이석형의 묘에서는 좌우로 가지를 볼 수 있었으나

포은 선생 묘에서는 가지가 없었다.


극히 미세한 이 차이는 훗날 엄청난 차이가 나게 된다. 


                             사진의 좌측이 포은 정몽주 묘소, 우측은 이석형 묘소

참고로 조선시대 전체 연안이씨 중에서 이석형의 후손을 조사해 보았다
判   書 : 54명 중 이석형 후손 42명
政   丞 : 9명 중 ″ 8명
大提學 : 7명 중 ″ 6명
正一品 : 24명 중 ″ 20명

묘 하나가 가문의 위상을 높이는데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2>, 묘소까지 이어지는 용의 변화가 급하게 내려오다가 묘 직전부터 두 세 마디의 가지를 뻗으면서

       속도를 조절하고 있으니, 기맥이 머물고자 하는 징표인 것이다

<3>, 위에 있는 김익겸의 묘는 당판을 형성하지 못하였지만 정상적인 맥을 받은 곳이며, 김 반 묘와

      동일한 山水를 공유하고 있다 
대수롭지 않게 넘어 갈 수 있는 이 부분은 후에 正穴 + 알파가 되어 6형제 중 김익겸의 후손이 가장

월등하게 된다. 
 
이곳에서 또 한 가지 유심히 볼 것은 아래 묘소의 입수지점은 훼손하지 않고 묘를 조성했다는 사실이다 
매우 세심하게 공을 들였음을 알 수 있다

<4>, 그리고는 마침내 산 끝에서 고밀도로 농축된 형태를 띠고 있으니, 전형적인 乳穴의 모습이다 






<5>, 물의 형태는 右水인데 청룡이 길게 감아줌으로서 물을 거둬 주고 있다

<6>, 조산의 많은 봉우리들이 나열해 있으며 편안한 시야를 확보하고 있다



<7>, 6명의 대제학이 나온 이석형 묘소와 매우 흡사한 공통점이 있다

<8>, 자식의 묘를 먼저 위쪽에 쓴 것으로 보아 아래는 이미 자신의 신후지지로 미리부터 준비해

       두었던 모양이다


[표3]·····김장생 9子의 후손들 정밀조사


















<위 표의 구분이 모호하여 다시 분류함>
김 집 2子 : 익형, 익연
金 槃 6子 : 익렬, 익희, 익견, 익훈, 익후, 익경
김 영 4子 : 익황, 익정, 익견, 익성
김 경 2子 : 익수, 익훤
김 고 1子 : 익문
김 구 2子 : 익돈, 익후
김 규 2子 : 익O, 익현
김 비 4子 : 익O, 익위, 익숙, 익현

[표1·2·3]을 종합해 보면 29世 까지는 김 호 묘의 바람으로 (益字돌림) 많은 인재를 골고루

배출했으나 30세 부터는 현격한 차이가 나고 있다
그렇다면 김 호 묘는 高孫까지 영향력이 미쳤으며, 그 후부터는 자신들의 조부 묘로 인해

새롭게 명암이 갈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두 묘의 좌향은 壬坐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족보의 표기와는 달리 실제로는 앞쪽의 가장 특출한 봉우리에 초점을 정하였기 때문에 壬子坐가 된다
이렇듯 안대를 보고 좌향을 정하는 방법을 擇其特達이라 한다

이곳의 산세를 당시 유행하던 호순신의 법에 대입해 보면, 산이 壬方에서 오므로 火山
파구는 丙方이므로 武曲破가 되어 매우 불길한 지세가 된다

따라서 이곳은 地理新法에 의하면 전혀 쓸모없는 땅이지만, 이를 배격하고 자연스럽게 향을 정하였다.
패철에 의한 좌향론을 무시하고 형세론에 입각하여 묘를 썼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요즈음은 위와 같은 壬子坐를 空亡이라 하여 불길한 좌향으로 여기지만,

이곳에서 보듯 전혀 문제가 없음을 볼 수 있다.
이미 땅이 고유의 성정을 타고 났는데 좌향 분금 1~2도에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 없으며, 좀 더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다 하겠다. 
이곳에서 10년 전 순창 김극뉵 묘에서 시작된 기나긴 의문의 여정에 비로소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이곳 묘는 초보자도 감탄할 정도로 龍眞穴的砂秀한 곳이니,

광산김문에서 유독 김반 후손에서만 인물이 집중적으로 배출되고 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 현상은 풍수적 설명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인재는 본인 스스로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땅의 도움 또한 절실히 필요함을 보여주는 사례라하겠다.
또 혈과 명당은 관념속의 허상이 아니라 실재하는 것이며, 미신으로 치부되었던 동기감응과 발복

또한 거짓이 아님을 입증할 수 있었다


우리의 조상들이 일평생을 바쳐 가며 명당을 찾고자 했고,

또 지금의 우리가 그토록 혈을 알고자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인 것이다


다음은 본인의 글 “희망과 미래의 풍수”에서 발췌한 글이다
·····
穴(明堂)은 위대한 인물을 배출하는 선천적 요인 중 하나이다.
국가와 가문의 흥망이 사람에 달려있다면, 인재양성 측면에서라도 혈은 보호되고 보존되며

또 개발되어야한다

 
이기적이고 타락한 풍수라는 비난과 손가락질보다는 좀 더 거시적인 안목에서 전세계적으로 희귀한

혈의 실체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지난 과거를 돌이켜 볼 것 같으면 주변 강대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잦은 외침과 수탈로 민족의

자존심은 형편없이 전락하고 만다.
이제 더 이상의 참담한 역사를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부끄러운 일은 없어야 하며, 구겨지고 망가진

자존심을 회복하고 경쟁력 있는 일류국가를 지향하기 위해서 미래를 책임질 인재 양성에 투자해야 한다

학문적으로도 풍수의 사상과 이론, 방법과 기술 등의 변천과정에서 지나온 과거를 모르고서

미래를 논할 수 없겠지만, 언제까지나 과거에 집착하여 정체하고 있을 수 만은 없다
이제부터의 풍수는 과거를 회상하는 관점에서 탈피해서 미래지향적이고 희망적이며 긍정적인 학문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김 반
1580~1640.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왕을 호종하고, 그 공으로 가선대부가 되었다.
그 뒤 대사성·대사헌·한성부우윤·대사간·이조참판 등을 두루 역임했다.
죽은 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김익겸
1614~1636.
할아버지는 장생(長生)이고, 아버지는 참판 반(槃)이다.
형 익희(益熙)와 함께 수학했고, 1635년(인조 13) 생원시에 장원급제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인조가 피난한 남한산성마저 청군에게 포위되어
삼전도에서 항복을 하자 강화로 가서 항전을 계속했다.
성이 함락되려 하자 유도대장(留都大將) 김상용(金尙容) 등을 따라 남문에 올라가 분신 자결했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광원부원군에 추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