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당자리 거지무덤(乞人墳)의 일화
우리나라는 조선조 말엽 1900년부터 일제를 거쳐 8·15해방과 6·25동란을 거치는 1970년까지 70여년 동안
전쟁으로 인한 난시와 매년 홍수와 흉년이 거듭되면서 큰 혼란속에 보리밥과 조밥, 호밀밥, 시레기죽과
피삼죽, 수수풀떼기, 개떡, 감 자와 옥수수 등 초근목피로 연명을 하게 되었다.
전국적으로 집을 잃은 수많은 거 지(乞人)가 속출 남사당패와 각설이, 돌중들이 각 지역으로 돌아다니며
상가집이나, 연자방아간, 움집 등 노숙하면서 수십명씩 몰려 다니며 유랑걸식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끼리 서로 모인 거지이지만 어른 아이 할것 없이 친형제 와 자식같이 예의를 잘 지키며 서로 사랑하고 우정이 두터워 왕초거지가 명령을 하면 아무말 없이 무조건 복종하는 아름다운 미풍이 감도는 가운데 누구하나 신 병으로 신음을 하면 서로 정성껏 치료와 위안을 할뿐 하니라 사망했을 때에는 인근에 다른 거지들과 합세하여 성시성의를 다하여 장례를 치뤄 주었다.
이러한 가운데 어린 거지들은 아침 저녁이 되면 깡통을 손에 들고 집집마다 문전에서 밥을 얻어 가지고 돌아와
전부 모여 둘러앉아 식사를 했고 청장년 거지들은 지팡이를 집거나 손을 들너 메고 병신행세를 하며 시장을 돌아다니며 「각설이 타령」을 하면서 한푼 두푼 구걸을 하여 모은 돈을 모두 왕초거지에게 바치면 일괄공개하고 예금하여 저축을 하게 된다.
또한 견듸자루를 메고 각 부락 큰집을 골라 다니며 슬픈 어조로 각설이타령을 하면서 잡곡을 구걸하여 장에 팔아 돈을 만들어 예치 하는 한편 나이가 지긋한 5,60대 거지들은 옹기장수나 소금장수를 하여 돈을 벌어 왕초거지에게 바친다.
이러한 상황 속에 우리 고장 금촌읍 아동리(안산동) 부락에 연자방앗간이 있어 수십명의 거지들이 정착하여 살았는데 겨울에는 볏짚을 얻어 다가 이엉을 엮어 둘러치고 누더기 옷을 입고 잠을 자는 한편 화로불을 피어 몸을 녹이며 포근한 정을 나누었고 낮에는 실내 빈대와 벼룩을 잡고 이불이나 옷과 머 리에 득실대는 이를 잡았으며
여름과 가을철에는 모기로 인하여 잠을 자지 못하 여 바깥 뜰에 멍석을 피고 모닥불을 피워 잠을 자는 괴로운
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어수선한 세월 속에서도 거지들은 밤이 되면
이러한 이야기, 저러한 이야기로 웃 음바다가 터져 나오기도 한다.
이곳에 있던 조선행이라는 거지는 이곳에서 어린 자식 둘을 데리고 소금장사를 하였는데
1971년 4월 봄날 소금을 지게에 걸머지고 광탄면 발랑리 골짜기에 있는 마을을 두루 찾아다니면서
소금을 팔고 돌아가는 도중 백경수가 흐르는 길목 기슭에 지게를 버티어 놓고 주저앉아 쉬다가 피곤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져 잠이 든채 세상을 떴다.
이 소식을 들은 모든 거지 수 십명이 일제히 달려와 죽은 그 자리에 장례를 지냈다.
조선행의 어린 자식은 성장하여 인천에서 소금장수를 하여 돈을 많이 벌어 결혼을 하고 아들 형제를 두어
큰아들 조장원은 의과대학을 졸업 인천에서 병원을 개설 운영하고 작은 아들 조창원은 미국으로 건너가
장사를 하여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자손들은 아버지 거지 무덤을 생각하고 찾아와 주위 임야 7,000여평을 구입 산소를 잘 복원하고 수호 관리하게 되었으며 명당자리 와복형국(蛙伏形局) 거지무덤으로 널리 알려지는 한편 받들고 있어 매년 봄 가을로 찾아와
정성껏 금초와 제사를 들여 효자들이라고 칭송이 자자하다는 유래가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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