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음택지

朴正熙와 金載圭의 운명을 바꾼 風水

오늘의 쉼터 2008. 5. 13. 23:46

 

 

朴正熙와 金載圭의 운명을 바꾼 風水
 
『金載圭는「선친 묘가 君王之地」라는 자기암시로 朴正熙 대통령 시해 결단』
 
上毛洞(옛 이름 망태골) 朴正熙의 生家(정확하게 말하면 朴正熙의 외갓집)는 金烏山이 꿈틀거리고 흘러 내려오며 형성된 기맥이 마침내 멈추어 강한 氣를 발산하는 진혈 위에 서 있다.

金聖洙 尋穴名堂硏究所長
1935년 구례 화엄사 아랫마을 출생. 호 靈目. 건국대학교를 졸업하고 건설부에서 근무하던 중 뜻한 바 있어 사임하고 나와 사업에 투신하여 성공한 후 세계를 일주하며 동서양 풍수지리학을 섭렵했다. 특히 한국 풍수지리학의 鼻祖인 玉龍子 道詵國師의 비법을 연구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다. 저서로 「名堂」이 있다.
金聖洙 尋穴名堂硏究所長
王이 되고 싶었던 사나이
 1970년대 중반, 金載圭(김재규)가 건설부 장관으로 있을 때 그의 부친이 사망했다. 金載圭는 부친을 좋은 자리에 모시기 위해 유명한 풍수를 이리저리 물색했다가 軍에서 부하였던 사람의 주선으로 張龍得(장용득·1999년 사망)씨를 소개받았다.
 
  金載圭는 張씨에게 『이미 유명 풍수의 의견을 듣고 묏자리를 잡아 놓았으니 가서 吉凶(길흉)을 판단해 달라』고 부탁했다. 대개의 재력가나 권력가들은 선친의 묏자리를 잡거나 옮길 때 한 사람의 풍수 말을 듣고 결정하는 일은 드물다. 여러 풍수를 불러 확인하게 마련이다.
 
  張씨는 소개한 사람과 함께 金載圭의 고향인 慶北 善山으로 내려갔다. 가보니 이미 金載圭의 동생 金恒圭의 지휘로 山役을 하느라 텐트를 치고 일꾼들이 작업을 하고 있었다. 묏자리를 잡아준 유명 풍수는 다름아닌 육관도사 손석우(1998년 작고)였다.
 
  손석우는 金載圭 부인의 부탁을 받고 묏자리를 봐주면서 『이 자리에 묘를 쓰면 君王이 나올 자리』라고 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君王之地(군왕지지)로 최고의 名堂(명당)이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장용득씨는 그 자리를 살펴본 후 솔직하게 말했다.
 
  『이 자리에 묘를 쓰면 3년 안에 장남이 以金致死(총기 등 쇠붙이로 죽거나, 목 매달려 죽는 일) 당합니다. 절대로 이 자리에 쓰면 안 됩니다. 서울 근교에 좋은 자리를 잡아줄 테니 이 자리는 쓰지 마십시오』
 
  金恒圭는 머리를 저었다.
 
  『육관도사가 봐준 자리이고, 형님이 이미 결정한 일입니다. 물릴 수 없으니 다시 한 번 살펴봐 주십시오』
 
  『내가 보기에 이 자리는 절대로 안 됩니다』
  
  
  10·26 이후 보안사 끌려간 풍수 장용득
 
朴正熙 前 대통령의 生家가 있는 상모리 옛 사진. 朴 前 대통령의 生家가 자리한 곳은 사진 가운데 오솔길이 끝나는 산자락이었다.

  그러나 상주 또한 굽히지 않았다. 당대 제일의 大家(대가)가 잡아준 명당(?)을 직업상 시기하고 폄훼하는 것으로 판단했음인지 張씨를 대하는 태도가 싸늘해졌다.
 
  세상에 명당은 많으나 君王地는 흔하지 않다. 현대의 민주사회에서는 「대통령이 나올 자리」라는 뜻이니 보통 吉地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엉뚱한 풍수가 와서 『3년 안에 장남이 비참하게 죽게 된다』고 악담(?)했으니 듣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땠을지 짐작할 수 있다.
 
  장용득씨는 서울에서 선산으로 갈 때는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특별히 마련해 준 자동차로 갔으나 서울로 돌아올 때는 도망치듯 버스를 타고 혼자 돌아와야 했다.
 
  얼마 후 金載圭는 중앙정보부장으로 승진했다. 당시 정보부장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았다. 정보부장은 사석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선친의 묘소를 그 자리에 쓰지 않았으면 어찌 이런 영광이 왔겠는가. 한데 말이야. 장 아무개라는 얼풍수 그자가 「장남이 以金致死한다」는 악담을 했다지? 그자를 잡아다 혼을 내놔야겠어』
 
  金載圭의 이 말이 장용득씨의 귀에 들어갔다. 장씨는 풍수 노릇을 못 한 것은 말할 것 없고, 언제 권력의 손길이 덮칠지 모르는 불안 때문에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떠돌며 피신했다.
 
  1979년 10월26일, 金載圭는 朴正熙前 대통령을 시해했다. 보안사령관 全斗煥에 의해 체포된 金載圭는 법정에 섰다.
 
  피해 다니던 풍수가 장용득씨에게는 제2막의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보안사에서 金載圭의 범행 동기를 수사하던 끝에 『풍수가가 김재규 선친의 묏자리를 잡아 주면서 「君王地」라고 공언한 것이 金載圭로 하여금 권력찬탈의 동기를 만들어 준 것 아니냐』고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보안사에 출두한 장용득씨는 『그 묏자리는 내가 잡아준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잡아준 것이다. 확인해 보면 알 것 아닌가. 나는 그 묏자리가 나쁘다고 말하는 바람에 한때 쫓겨다니는 신세였다』고 해명했다. 결국 보안사 수사팀은 묏자리를 잡아준 사람이 張씨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張씨를 방면했다.
 
  필자는 생전의 장용득씨와 그를 심문했던 보안사 수사관 J씨로부터 이 얘기를 직접 들었다. 張씨와 J씨 모두 『金載圭의 심리적 저변에는 선친 묘소가 君王地라는 자기암시가 자리 잡고 있어 대통령을 제거하려는 결단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닌가』라고 추측했다.
 
 
  氣가 살아 있는 망태골 朴正熙의 生家
 
1960년대 초반 朴正熙 대통령 生家의 모습. 사진 속 인물은 朴대통령의 형 朴東熙.

  2006년 10월 하순의 어느 일요일, 필자는 金載圭의 총탄에 쓰러진 朴正熙 前 대통령의 生家(생가)와 선산을 찾아 경북 구미시 上毛洞(상모동·망태골)으로 갔다. 필자에게는 이것이 두 번째 방문이었다.
 
  수년 전 방문했을 때에 비해 生家와 그 주변은 훨씬 잘 다듬어져 있었다. 주차장에는 관광버스들이 줄 지어 서 있었고, 어린 아들딸의 손을 잡고 온 젊은 부부와 걸음을 겨우 떼어 놓는 늙은 촌로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朴正熙」를 눈으로 확인하고 몸으로 느끼기 위해 몰려들고 있었다.
 
  사람들의 발길을 붙드는 곳은 역시 朴正熙가 태어나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문경보통학교 선생으로 떠나기까지 자라고 공부했던 작은 골방이었다.
 
  朴正熙가 어릴 때 살았던 골방은 한 평이 될까 말까 한, 방이라고 하기에 어려울 정도로 작은 공간이었다. 구석에 놓인 고리짝과 하얀 호롱불 등잔이 이 방의 재산의 전부였다.
 
  바로 그 골방의 옆에는 크기가 조금 더 큰 안방이 있었다. 朴成彬(박성빈·1871~1938)과 白南義(백남의·1872~1949) 내외는 이 방에서 朴正熙를 탄생시켰다. 그 방 한가운데로 강한 氣가 흐르고 있었다. 朴正熙의 혼을 만들어 낸 바로 그 氣였다.
 
  마당에는 1929년 朴正熙(당시 12세)가 어머니 白씨와 함께 심은 감나무 한 그루가 주홍색 감을 주렁주렁 매단 채 서 있었다. 뒷산에서 내려온 강렬한 기맥은 이 감나무 밑을 지나 朴成彬 내외가 마흔줄에 막내 朴正熙를 낳았던 안방 밑으로 관통하고 있었다.
 
 
  사람마다 판단 다르고 길흉 예단 어려워
 
  땅 속의 氣는 살아 있는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맥을 이루며 흐르다가 주먹을 쥐거나 매듭을 엮는 것처럼 어느 지점에서 강한 힘으로 뭉쳐 있다. 이를 穴(혈)이라 한다. 지금까지의 풍수는 좌청룡·우백호가 어떠하고 祖山과 案山이 어떠하며, 물의 들고남이 어떠하고, 방위가 어떻고 하는 식으로 땅의 형세와 모양을 의인화해 판단하거나 거기에 易理(역리)를 가미해 판단하는 것이 주류였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판단이 다르고 길흉과 선악을 제대로 예단하기 어려웠다.
 
  뜨는 권력 金載圭 선친의 묘소를 두고 유명 풍수 두 사람이 각각 다른 의견을 내놓았던 것은 풍수지리학에 있어 구성요소들이 광범하고 번잡하며 현학적인 데 비해 정작 중요한 眞穴(진혈)의 규명에 있어서는 판단 근거가 다분히 자의적인 데에 원인이 있었다. 즉, 형세가 좋고 나쁘다는 것은 상식적인 안목으로 짚을 수 있으나 그런 형세 속에서 정확한 穴이 어디인지 제대로 찾을 수 있는 이론과 실천의 기법이 미흡했다는 얘기다. 만약 기맥과 穴을 정확하게 찾아낸다면 더 이상 「백 명의 풍수가 백 가지 소리를 하는」 오류는 없을 것이다.
 
  朴正熙 前 대통령과 같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의 生家나 선대의 묘소를 찾아가 『과연 명당이로구나』 감탄하고 그 이유를 나름대로 설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정확하게 기맥의 흐름과 진혈을 찾아내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上毛洞(옛 이름 망태골) 朴正熙의 생가(정확하게 말하면 朴正熙의 외갓집)는 金烏山(금오산)이 꿈틀거리고 흘러 내려오며 형성된 기맥이 마침내 멈추어 강한 氣를 발산하는 진혈 위에 서 있었다. 진혈은 외가인 수원 白씨가 살던 안채가 아니라 더부살이로 들어온 朴成彬 내외가 살던 문간방에 머물고 있었다는 점이 알 수 없는 세상 조화의 시발점이라 하겠다.
 
  生家를 둘러싸고 있는 좌청룡·우백호의 형세가 만만치 않았다. 겉에서 보기에는 그저 그런 평범한 산자락이지만 뒤로 들어가 보면 산이 깊고 넓어 예사롭지 않은 기품을 토해 내고 있었다. 바로 그 좌청룡에 해당하는 왼쪽 산자락에 白氏 문중의 선대 묘소가 하나 있었으나 여기에는 氣가 없었다.
 
 
  「명당 중의 명당」을 차지한 사연
 
張澤相 前 국무총리의 祖父묘.

  生家를 지나 朴씨 선대의 묘소를 찾아 금오산 중턱으로 올라갔다. 원래 이 산자락은 선산군의 명문이었던 仁洞 張氏 소유였다. 광복 직후 수도청장으로 건국에 큰 역할을 했고 뒤에 국무총리를 지낸 滄浪 張澤相(창랑 장택상·1893~ 1969)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장택상과 그 부친 張承遠(장승원·경상북도 관찰사)을 발복하게 한 선대(장택상의 할아버지) 묘소는 금오산에서 조금 떨어진 黃嶽山(황악산) 直指寺(직지사) 산문 옆의 운수리에 있는데, 이곳 역시 명당이긴 하나 君王地는 아니었다. 그러면 張씨 소유의 땅에 朴씨가 들어가 「명당 중의 명당」을 차지한 사연은 무엇일까.
 
  朴正熙 前 대통령은 高靈 朴氏 29세손이다. 부친 朴成彬은 칠곡군 약목에 살다가 1916년 처가인 수원 白氏가 살고 있는 상모리로 이사했다. 白氏 문중의 위토답을 경작하여 생계를 잇기 위해서였다. 성빈이 상모리로 이사해 온 그해 성빈의 부친 永奎가 타계했다. 적빈하여 선친의 묘터를 구하기 어려웠던 성빈은 약목에서 가까운 금오산 자락 張씨 소유의 산록에 선친을 안장했다.
 
  당시 가난한 서민들은 先山을 소유하기 어려웠고, 공동묘지도 없던 시절인데다 계절마저 추운 겨울이었으므로 장례를 도운 마을 사람들이 별 생각 없이 張씨 소유의 산록에 박영규의 묏자리를 잡은 것으로 추측된다. 마을 사람들이 처음 땅을 파자 바위가 나왔다. 가까운 곳에 두 번째 땅을 파자 이번에도 바위가 나와 포기하고 세 번째 묏자리를 파고서야 겨우 박영규의 유택을 만들 수 있었다. 세 번이나 땅을 파느라고 시간이 지체되었으나 하관 시각과 좌향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고 우연하게도 세 번째 판 자리가 氣가 살아 있는 진혈이었다. 바로 그곳이 명당이었다.
 
張澤相 前 국무총리.

  영규의 무덤을 쓰고 나서 얼마 안 되어 백남의는 잉태했다. 朴 前 대통령이 쓴 회고록에 따르면, 모친 백남의는 마흔줄(정확하게 박성빈 46세, 백남의 45세)에, 그것도 시집 간 첫째 딸과 같은 해에 해산을 하게 되자 부끄러워 뱃속의 아이를 지우려고 양잿물을 마시고 높은 밭둑에서 뛰어내리는 등 애를 썼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朴正熙는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박영규의 묘소가 있는 이 땅은 君王地로 알려진 金烏啄尸形(금오탁시형)의 명당으로 창랑의 선친 張承遠이 구한말 경상북도 관찰사를 역임할 때 사놓은 땅이었다. 장승원은 젊을 때 적빈하였으나 선친을 직지사 입구에 있는 명당에 모신 후 당대에 만석꾼이 되고 벼슬이 감사에 오르는 등 발복하자 풍수지리에 대한 믿음이 컸다. 이 믿음 때문에 후일 요긴하게 사용하기 위하여 『금오산 자락에 君王地가 있다』는 전설을 믿고 바로 그 산자락을 매입해 놓은 것이었다.
 
  광복 직전인 1945년 4월 張씨 가문에서는 중국에서 유명한 지사(풍수)를 모셔 와서 오래 전에 매입해 놓은 금오산 일대를 답사하게 했다. 중국에서 온 풍수는 산을 돌아본 후 박영규가 안장된 무덤 자리를 가리키며 『이곳이 君王之地인데 이미 아이가 나왔을 것』이라고 했다.
 
 
  張澤相의 杞憂
 
朴正熙 前 대통령의 祖父 朴永奎의 묘.

  1950년 滄浪은 국회 부의장이었다. 금오산의 君王地가 늘 마음속에 남아 있었던지라 朴正熙 집안 사람을 만나 이장비를 주고 『가을에 옮기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이 약속도 그해 여름에 발발한 한국전쟁 때문에 지킬 수 없게 되었다. 『명당은 주인이 따로 있다』거나 『인연이 있는 사람만 명당에 들어간다』는 말은 이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戰後, 나라가 안정된 후 문득 선산에 투장한 朴씨 집안의 일이 궁금해진 장택상은 사람을 시켜 알아보게 했다.
 
  『그 집에 아들이 있던가?』
 
  『아들 다섯, 딸 둘, 칠남매가 있었으나 맏아들(동희)과 둘째(무희)는 평범한 농사꾼이고 셋째 아들(상희)은 좌익 폭동에 가담했다가 경찰에 피살되었고, 넷째(한생)는 좀 모자라는 사람이었는데 열여섯 살에 죽어 별로 볼 것이 없는 집안입니다. 다만 막내아들이 현재 군인으로 복무하고 있습니다』
 
  『군인이라? 계급이 뭔가?』
 
  『육군 준장으로 5사단장입니다』
 
  張澤相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짐짓 5사단(강원도 인제)을 방문했다. 거물 정치인이 방문하자 사단장이 직접 나와 인사를 했다. 만나 보니 가무잡잡한 얼굴에 체구가 작고 볼품없는 사내였다. 張澤相은 「이런 인물이라면」 하고 안심했다. 자신의 불안이 공연한 기우였음을 확인(?)하고 더 이상 移葬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1967년, 야당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경부고속도로 공사가 추진되고 있었다. 당시 건설부 장관이던 朱源(주원) 장관에게 張澤相이 찾아왔다. 고속도로 계획노선이 오태동의 장택상 집을 관통하도록 설계되어 있었기 때문에 노선을 변경해 줄 것을 요청하기 위함이었다.
 
  『朱장관, 고속도로 때문에 애쓰는 건 잘 아는데… 만약 집이 헐린다면 우리 집안 사람들에게 내가 죽일 놈이 되지 않겠소?』
 
  『직접 각하께 찾아가 말씀하시지요』
 
  『朱장관이 알아서 해주시오』
 
  당시 경부고속도로의 기본 노선은 朴正熙 대통령이 직접 결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朱장관은 이 부분에 대해서만은 朴대통령의 결재를 받지 않고 滄浪의 요청대로 장관 임의로 변경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朴대통령은 아무 말이 없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당시 창랑이 금오산 자락 金烏啄尸形 임야(朴正熙의 조부 박영규의 묘소가 있는 땅)의 이전등기 서류를 가지고 와서 고속도로 노선 변경과 교환했다고도 한다. 어쨌든 이로써 朴正熙 대통령은 지난날 선친 박성빈이 張씨 가문에 졌던 빚을 갚은 셈이었다.
  
  
  一字文星의 안산
 
  朴正熙 前 대통령의 조부 영규 내외와 선친 성빈 내외, 그리고 맏형인 동희 내외가 안장된 선산으로 가는 길은 최근 진입로 공사를 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朴正熙의 맏형인 東熙의 아들 朴在鴻 前 의원의 이름으로 된 묘소 안내 팻말이 있었다.
 
  朴正熙 선대 묘소는 금오산 중턱 제법 높은 지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요즘 같으면 토목공사 장비가 발달해 산길 하나 만드는 것쯤 일도 아니지만 1910년대에는 가난한 서민이 이만한 높이에 장례를 치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묘소는 위로부터 朴正熙의 조부인 영규 내외, 중간에 성빈 내외, 그리고 맨 아래쪽에 동희 내외로 모두 6基의 분묘가 자리 잡고 있었다. 금오산의 용맥이 꿈틀거리며 흘러와 백호의 형상으로 앞을 감싸고 멀리 구미 시가지를 가로질러 바라보이는 안산은 전형적인 一字文星(이런 안산을 두고 있으면 「나무꾼도 벼슬한다」는 말이 있다)으로 나라에 귀하게 쓰일 人材를 배출하는 형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중 朴正熙의 조부인 영규의 묘소에 氣가 있었다. 朴正熙를 낳은 조상의 음덕은 바로 조부의 묘소가 지닌 氣 때문이었다. 그러나 성빈의 음택은 수맥 위에 있어 명당과는 거리가 멀었다.
 
  현재의 묘소 바로 전면에 氣가 있는 진혈이 있는데 윗대의 묘소 바로 아래에 자리를 잡은 것은 장례의 관습일 뿐만 아니라 풍수지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의 하나이다. 게다가 성빈의 묘소 바로 앞에는 옥새형의 바위가 있었는데 어떤 풍수로부터 무슨 말을 들었는지 바위를 깨뜨려 날카로운 조각들이 흉하게 방치되어 있었다. 굳이 바위를 깰 수밖에 없었다면 흙으로 덮어 주변을 부드럽게 정비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었다.
 
朴正熙 前 대통령의 아버지 朴成彬(원 안)의 묘.

 
  자신의 安危와 자손의 榮達보다 국가를 먼저 생각했던 朴正熙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있는 朴正熙 前 대통령 부부의 묘.

  여기서 풍수의 상식 하나를 짚고 넘어가자. 명당에 묘를 썼다는 것은 氣가 있는 진혈에 무덤을 쓰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명당(진혈) 이웃에는 대개 또 다른 穴(길이 여섯 자, 넓이 한 자 정도의 氣가 응축된 장소)이 발견되는 일이 흔하다. 어떤 경우에는 포도 넝쿨처럼 여러 개의 穴이 운집해 있는 경우가 있고 가까운 곳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는 경우가 있다.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內에 있는 昌嬪 安氏 묘역 부근, 장군묘역 앞과 우측의 야산에는 氣가 살아 있는 명당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었다. 물론 사용하지 않은 「비어 있는 명당」이다.
 
  湖巖 李秉喆(호암 이병철)을 발복하게 한 경남 의령군 유곡면 마두리의 마두산 중턱 호암의 증조모 광산 김씨 묘역 주변에 비슷한 현상이 있었다. 주변에 이런 명당을 두고도 진혈을 찾지 못해 시간을 낭비하며 헤매는 사람이나, 엉뚱한 수맥 위에 조상을 묻어 두고 『명당에 모셨다』고 착각하고 있는 후손들이 뜻밖에 많았다.
 
  국립현충원에 있는 朴正熙와 육영수 내외의 묘소는 어떠한가. 한마디로 수맥이었다. 풍수를 무시한 행정편의에 따른 터잡기의 결과였다. 朴正熙 前 대통령은 육영수 여사의 무덤이 나쁜 자리라는 사실을 몰랐을까? 알고 있었다.
 
  5·16 후 朴正熙가 최고회의 의장직을 맡아 있을 때 대구사범 동기생인 權尙河(권상하)는 최고회의 민정담당이었다. 최고회의 의장의 첫 월급을 받아든 朴의장은 그것을 봉투째 권상하에게 주었다. 『구미에 있는 선친의 무덤을 돌아보고 정비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朴正熙가 선친의 묘소 관리와 풍수에 관심이 없지 않았다는 증거다.
 
  권상하는 풍수에 조예가 깊었다. 1974년 육영수 여사가 비명에 타계하고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후 그 자리가 수맥이어서 좋지 않다는 풍수가들의 의견에 따라 권상하는 이를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풍수가 장용득과 함께 경기도 금곡에 새 묏자리를 잡아 놓았다. 그러나 朴正熙 대통령이 반대했다.
 
  『내 아내의 묏자리가 나쁘다고 하여 이장하면 국립묘지에 묻혀 있는 그 수많은 영현들은 다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 이유였다. 그리고 5년 뒤 자신도 아내 옆에 묻혔다. 최고의 권력을 쥔 신분으로 자신의 안위와 후손의 번영보다 국가와 국민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 자세, 이는 살신성인의 덕행에 다름 아니다.
 
  반대로 용인의 삼성공원묘지에 있는 金載圭의 묘소는 명당이었다. 비석에 새겨진 글자는 군데군데 파내어 흉하게 훼손되어 있었으나 氣가 살아 있는 명당이 분명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運命은 정해져 있다?
 
  서양철학에서의 運命論(운명론)은 決定論(결정론)이다. 인간의 의지와 노력에 상관없이 초인간적인 어떤 힘에 의하여 운명이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동양의 易學(역학) 역시 이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豫定造化論(예정조화론)」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할 일은 없는 것일까? 재벌이 될 팔자,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될 팔자, 장성이나 고급관리가 될 팔자, 가난뱅이나 거지가 될 팔자를 모두 타고나서 고칠 수 없다면 굳이 힘들여 공부하고 고생을 감수하며 애쓸 필요가 있는가? 가만 있어도 팔자 소관으로 저절로 될 일인데….
 
  운명은 정해져 있다. 이건 사실이다. 인간이 태어날 때 이미 운명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을 타고난다는 것이다. 명리학에서는 이를 四柱(사주)라 한다. 사주는 인간이 아무리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발버둥쳐도 도망가거나 버릴 수 없는 태생적 존재의 조건이다.
 
  그 다음 인간의 운명을 결정짓는 요소는 태어나 살고 있는 집과 조상의 무덤이다. 집에도 氣가 있는 집이 있고 氣가 없는 집이 있다. 조상의 무덤에도 氣가 있어 후손들에게 긍정적인 同氣感應(동기감응)을 일으키는 무덤이 있고, 부정적인 동기감응을 불러오는 무덤이 있다.
 
  사주가 좋아도 조상의 무덤이 나쁘거나 살고 있는 집이 나쁘면 일마다 실패하거나 병들고 일찍 죽는 흉사가 일어난다. 다른 조건들이 나빠도 최소한 살고 있는 집에 氣가 살아 있으면 「人廢(인폐)」, 즉 다치거나 감옥 가거나 죽는 등의 흉사는 면한다는 말이 있다. 朴正熙의 경우 군인 시절에 살면서 군사혁명을 숙의했던 신당동 옛 집에는 氣가 있었다. 즉 그 집은 명당이었다.
 
 
  運命은 바꿀 수 있다
 
  이처럼 집과 조상의 무덤을 잘 선택하여 흉사를 면하고 대길을 불러오는 것을 改天運(개천운)이라 한다. 하늘이 내린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바꾸겠다는 인간의 의지를 실천하는 것, 이것이 풍수지리학의 요체이다. 조상의 무덤을 명당에 앉혀놓고 하늘에서 복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수동적 祈福思想(기복사상)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운명을 바꾸려는 능동적 자세가 곧 풍수지리학의 골간이다.
 
  그러면 좋은 사주를 타고나, 氣가 살아 있는 집에 살면서 조상의 음택을 명당에 모시면 그만인가? 그렇지 않다. 선인들은 앞에 열거한 그 어떤 조건을 다 갖추는 것보다 「德(덕)을 쌓는 것이 먼저」라고 말한다. 德이라고 한마디로 표현했으나 그것을 분석해 보면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 이를 실천하며 지혜롭고 노력하는 인간이어야 한다는 등의 수많은 덕목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뒤집어 보면 德을 쌓아야만 좋은 집(호화로운 집이 아니라 氣가 살아 있는 집)에 살 수 있고, 조상을 명당에 모실 수 있다는 뜻도 된다. 비천한 신분이거나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도 덕행을 한 나머지 조상의 음택을 잘 골라 후손이 크게 발복한 사례는 역사 속에서나 현실 속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