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중심부에 위치한 이 가옥은 안채, 중 사랑채, 큰 고방채, 작은 고방채, 큰 사랑채, 사당, 대문채 등 7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남향으로 자리한 대문채를 들어서면 좌측 편에 남향한 큰 사랑채가, 우측으로 별곽(別廓)을 이루어 사당이 위치하고 대문채와 마주 보고 있는 중 사랑채가 안채와 2동의 고방채와 더불어 튼 'ㅁ'자의 몸채를 이루고 서북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가옥배치 및 공간구성의 특징으로는, 몸채의 방향이 지형조건 상 남향을 할 수 있음에도 건축 환경적으로 불리한 서북향을 하고 있는 점, 큰 사랑채가 대문채에서 중 사랑채에 이르는 출입동선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배치된 점, 안채로의 출입은 중 사랑채 좌측 칸의 중문을 통해서만 가능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는 왕을 모시는 내관(內官)으로 청도의 서북쪽에 위치하는 궁궐을 향한 단심(丹心)과 일반 반가(班家)보다 더 엄격하게 내부공간인 안채의 노출을 꺼리고 출입을 통제하며 여성의 동선을 제한하려는 주인의 의도가 건축적으로 표현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내관가(內官家)의 연구에 상당한 정보를 제공하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 위 문화재는 일반적으로 관람이 가능하나, 소유주 등의 개인적 사정으로 관람이 제한될 수도 있습니다.
전문설명
청도 임당리 김씨고가는 대대로 내시가 살았던 내관가(內官家)로 가옥의 실측조사 시 별묘(別廟)에서 발견된 「내시부 통정김일준가세계(內侍付 通政金馹俊家世係)」에는 시조부터 15세(世)까지의 실직(實職)과 이름 및 본관, 산소의 위치와 좌향 (坐向)등이 소상히 기록되어 시조가 이곳에 입향(入鄕), 정착한 시기(1500年代)와 이성독자(異姓獨子)로 상속되어 이어온 내시가계의 내력을 소상하게 알려주고 있으며 가첩(家牒)의 주인인 16세 김일준(金馹俊 1863~1954)은 그 벼슬이 정3품인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기도 하였다.
현재 사당의 지붕에 얹어진 여러 장의 막새에는 '강희이십오년병인윤사월(康熙二十五年丙寅閏四月)’(1686)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어 집을 처음지은 것이 오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나 건물의 구조수법이나 양식으로 볼 때 1800년대에 현재와 같은 규모와 형태로 확장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집 건물들의 배치를 보면 5간(間) 대문간채가 마을 전체의 지세에 어울리게 서남서향으로 자리 잡았고, 어간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마당의 좌측에는 큰 사랑채가 남향으로 배치되어 대문간과 사랑마당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하였고 사랑마당의 우측에는 토담으로 별곽(別廓)을 구성하여 사당을 서북향으로 배치하였다. 사랑마당의 정면에는 중문간이 좌측간에 배치되어 있는 중사랑채가 대문채와 대향(對向)으로 배치되어 있고 그 뒤쪽으로 안채와 두채의 고방채가 중사랑채와 함께 튼'ㅁ'자형(子形)의 몸채를 이루고 있다.
튼'ㅁ'자형(子形)의 몸채에서 안채를 중심으로 안마당과 뒷마당등의 외부공간은 건물들과 높은 토담들로 폐쇄되어 있고 안채로의 출입도 중문을 통해야만 가능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는 반가(班家)에서 중문외에도 별도의 일각문들이 출입동선을 갖는 것과 비교할 때 보다 강한 폐쇄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사랑대청에서 대문채와 중문간을 마주보게 배치하여 부녀자들의 출입을 반가(班家)에 비해 보다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음을 볼수 있는데 주인이 내시(內侍) 인만큼 항상 부녀자의 안위를 고려함과 동시에 출입이나 행동을 규제할 목적에서 의도된 것으로 보여져 내관가 배치의 한 전형이라 할 수 있겠다.
전경
큰사랑 온돌방 내부
큰사랑채 대청 상부가구
큰사랑채 대청 내부
중사랑 온돌방 내부
사랑채전면
사랑채배면
사랑채내부
중사랑채
안채전면
큰고방채
작은고방채
중사랑채배면및내정
큰고방채및내정
사당
사당막새
연지
대문간채
사당
사당으로 가는 문
사랑채 뒷면
사랑채
솟을 대문
아래 사랑채와 중문
안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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