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 | 중대 | 하대 | ||||
3시기 구분은 '삼국사기'에 의함 |
제37대 선덕왕(宣德王) |
재위기간 | 780 ~ 785 | 성(性) | 金氏 |
부(父) | 해찬(海飡) 효방(孝芳) | 모(母) | 사소부인(四炤夫人 金氏, 聖德王의 딸) |
비(妃) | 구족부인(具足夫人, 角干 良品의 딸) | 휘(諱) | 양상(良相) |
선덕왕(宣德王)의 휘(諱)는 양상(良相)이며, 내물왕(奈勿王)의 10세손(世孫)이다. 780년 혜공왕(惠恭王)이 성색(聲色)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자 이찬(伊飡) 김지정(金志貞)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상대등(上大等)으로 있던 양상이 김경신(金敬信)과 함께 김지정의 난을 진압하였다. 이 난 중에 혜공왕이 죽자 양상이 즉위하였다. 즉위 6년(785)에 당나라에 조공을 바쳤으며, 당의 덕종(德宗)이 검교대위계림주자사영해군사신라왕(檢校大尉鷄林州刺史寧海軍使新羅王)의 봉작을 주었다. 이 해에 왕이 병으로 누웠는데 증세가 점점 심해지므로 글을 써서 알리기를 "과인은 본질이 워낙 얇아 왕위에 야심이 없었고 추대를 도피치 못하여 부득이 즉위를 하였던 것인데 즉위 이래로 일이 순성(順成)치 못하고 민생이 곤궁하니 이는 다 나의 덕이 백성의 바램에 맞지 아니하고 천심(天心)에 합치하지 아니한 때문이다. 홀연히 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하니 사생(死生)에는 명(命)이 있는지라 다시 무엇을 한하랴. 사후에는 불교식에 의해 소화(燒火)하여 동해에 산골(散骨)하라"이르고 정월 13일에 돌아갔다. 시호(諡號)를 선덕(宣德)이라 하였다. |
제38대 원성왕(元聖王) |
재위기간 | 785 ~ 798 | 성(性) | 金氏 |
부(父) | 일길찬(一吉飡) 효양(孝讓) | 모(母) | 계오부인(繼烏夫人 朴氏) |
비(妃) | 연화부인(蓮花夫人 또는 淑貞夫人, 角干 神述의 딸 金氏) | 휘(諱) | 경신(敬信) |
원성왕(元聖王)의 휘(諱)는 경신(敬信)이며 내물왕(奈勿王)의 12세손(世孫)이다. 앞서 혜공왕(惠恭王) 말년에 역신(逆臣)이 발호할 때에 전왕(前王) 선덕(宣德)이 상대등의 직에 있어 군측의 악한을 숙청하기를 앞장서서 주장하였는데 경신(敬信)이 참여하여 난(亂)을 평정하는데 공이 있었으므로 선덕이 즉위함에 이르러 곧 상대등(上大等)이 되었다.
4년(788)에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두어 인재를 등용하였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예기(禮記), 문선(文選) 등을 읽어 그 뜻에 능통하고 논어(論語), 효경(孝經)에 밝은 자를 상품(上品), 곡례(曲禮), 논어(論語), 효경(孝經)을 읽은 자를 중품(中品), 곡례(曲禮), 효경(孝經)을 읽은 자를 하품(下品)으로 하고, 혹 오경(五經 : 易·詩·書·禮·春秋), 삼사(三史 : 史記·漢書·後漢書),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書)에 박통(博通)한 자는 초탁(超擢, 순서를 뛰어넘어)하여 등용하였다.
6년(790)에 김제(金堤) 벽골제(碧骨堤)를 증축, 농사를 장려하였다. |
제39대 소성왕(昭聖王) |
재위기간 | 798 ~ 800 | 성(性) | 金氏 |
부(父) | 인겸(仁謙, 元聖王의 太子) | 모(母) | 성목왕후(聖穆王后) 金氏 |
비(妃) | 계화부인(桂花夫人, 大阿飡 叔明의 딸 金氏) | 휘(諱) | 준옹(俊邕) |
소성왕(昭聖王)의 휘(諱)는 준옹(俊邕)이며 태자 인겸(仁謙)의 아들이다. 원성왕(元聖王) 원년에 그의 아들 인겸(仁謙)을 봉하여 태자(太子)로 삼았는데 7년에 죽으니 원성이 손자(孫子) 준옹(俊邕)을 궁중에서 길렀다. 원성왕 11년(795)에 태자가 되었다가 원성이 돌아가자 위(位)를 이었다. 재위 1년 7개월만에 승하하였다. 시호(諡號)를 소성(昭聖)이라 하였다. 이후부터 신라에서는 왕위 쟁탈전이 심해졌다. |
제40대 애장왕(哀莊王) |
재위기간 | 800 ~ 809 | 성(性) | 金氏 |
부(父) | 소성왕(昭聖王) | 모(母) | 계화부인(桂花夫人, 大阿飡 叔明의 딸 金氏) |
비(妃) | 朴氏 | 차비(次妃) | 아찬 주벽(阿飡 宙碧)의 딸 金氏 |
휘(諱) | 청명(淸明)·중희(重熙) | ||
애장왕(哀莊王)의 휘(諱)는 청명(淸明)이니 소성왕(昭聖王)의 태자이다. 즉위시 나이 13세이므로 아찬(阿飡) 병부령(兵部令) 언승(彦昇, 왕의 숙부)이 섭정하였다. 원성왕(元聖王)이 돌아갔을 때 당(唐) 덕종(德宗)이 지절사를 보내 조위하고 준옹(俊邕, 昭聖王)을 책봉하려 했으나 지절사 위단(韋丹)이 운주에 이르렀을 때 준옹(俊邕)이 죽었음을 듣고 귀환하였다.
2년(801)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과 문무대왕(文武大王)의 2묘(廟)를 별도로 세우고, 시조대왕(始祖大王), 명덕대왕(明德大王, 왕의 高祖), 원성대왕(元聖大王, 왕의 曾祖), 혜충대왕(惠忠大王, 왕의 祖), 소성대왕(昭聖大王, 왕의 皇考)을 5묘로 삼았다.
3년(802)에 가야산(加耶山) 해인사(海印寺)를 창건하고, 7년(806)에 왕이 하교(下敎)하여 불사(佛寺)를 새로 짓는 것을 금하고 오직 수즙(修葺, 重修)만을 허락하였다. 또 금수(錦繡)로 불사(佛事)에 사용하거나 금은(金銀)으로 기용(器用)을 만드는 것을 금하여 관리로 하여금 널리 포고 시행케 했다. |
제41대 헌덕왕(憲德王) |
재위기간 | 809 ~ 826 | 성(性) | 金氏 |
부(父) | 인겸(仁謙, 元聖王의 太子) | 모(母) | 성목왕후(聖穆王后) 金氏 |
비(妃) | 귀승부인(貴勝夫人, 角干 禮英의 딸) | 휘(諱) | 언승(彦昇) |
소성왕(昭聖王)의 동생이며, 원성왕(元聖王) 6년(790)에 당(唐)에 봉사(奉仕)한 후 대아찬(大阿飡)의 위를 받고, 다음 7년(791)에 역신(逆臣) 제공(悌恭)을 제압하고 잡찬이 되었으며 10년(794)에 시중(侍中)이 되고, 11년(795)에 이찬(伊飡)으로 재상(宰相)이 되고, 12년(796)에 병부령, 애장왕(哀莊王) 원년(800)에 각간(角干), 다음 2년(801)에 상대등(上大等)이 되었다가 애장왕(哀莊王)을 죽이고 즉위하였다.
13년(821)에는 백성들이 기근으로 인해 자손(子孫)을 팔아 생활하는 자가 있을 정도였다. |
제42대 흥덕왕(興德王) |
재위기간 | 826 ~ 836 | 성(性) | 金氏 |
부(父) | 인겸(仁謙, 元聖王의 太子) | 모(母) | 성목왕후(聖穆王后) 金氏 |
비(妃) | 장화부인(章和夫人, 定穆王后, 昭聖王의 딸) | 휘(諱) | 수종(秀宗)·경휘(景徽) |
흥덕왕(興德王)의 휘(諱)는 수종(秀宗)인데 뒤에 경휘(景徽)로 고쳤다. 헌덕왕의 동생이다. 헌덕왕11년(819) 상대등(上大等)이 되었으며, 헌덕왕14년(822) 부군(副君)이 되어 월지궁(月池宮)에 들어갔다. 즉위 원년(826) 12월에 왕비 장화부인(章和夫人)이 돌아가니 추봉(追封)하여 정목왕후(定穆王后)라 하고, 왕은 죽은 비(妃)를 사모하여 잊지 못하였다. 군신이 표(表)를 올려 새로 왕비를 맞을것을 청하니 왕이 말하기를 "척조(隻鳥, 한 마리 새)도 짝을 잃은 슬픔이 있거늘 하물며 좋은 배필(配匹)을 잃고 어떻게 재취(再娶)할 수 있겠는가"하며 군신들의 말을 따르지 않고, 또한 시녀(侍女)까지도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였다. 3년(828) 정월에 왕의 종제(從弟) 대아찬(大阿飡) 김우징(金祐徵)으로 시중(侍中)을 삼고, 4월에는 청해대사(淸海大使)에 궁복(弓福, 張保皐)을 임명, 진을 지키게 했다. 이 해에 대렴(大廉)이 당나라로부터 차(茶) 종자를 가져오니 왕은 그것을 지리산(地理山. 지금의 智異山)에 심게 했다. 차(茶)는 선덕여왕(善德女王) 때부터 있었지만 이 때에 이르러 성하였다. 11년(836)에 왕이 돌아가니 시호(諡號)를 흥덕(興德)이라 하고 유언에 의하여 장화부인(章和夫人)의 능(陵)에 합장(合葬)하였다. |
제43대 희강왕(僖康王) |
재위기간 | 836 ~ 838 | 성(性) | 金氏 |
부(父) | 이찬 김헌정(伊飡 金憲貞, 元聖王의 孫子) | 모(母) | 포도부인(包道夫人) |
비(妃) | 문목부인(文穆夫人, 大阿飡 忠恭의딸) | 휘(諱) | 제륭(悌隆) |
희강왕(僖康王)의 휘(諱)는 제륭(悌隆)이며 원성대왕(元聖大王)의 손자이다. 흥덕왕(興德王)이 돌아가자 흥덕왕의 종제(從弟) 균정(均貞)과 종제 헌정(憲貞)의 아들인 제륭(悌隆)이 다 각기 왕이 되려고 하였다. 이 때 시중(侍中) 김명(金明, 후에 閔哀王)과 아찬(阿飡) 이홍(利弘), 배훤백(裴萱伯) 등은 제륭(悌隆)을 받들고 아찬(阿飡) 우징(祐徵)은 조카(姪) 예징(禮徵)·김양(金陽)과 함께 그 아버지 균정을 받들어 동시에 궐내(闕內)로 들어가 서로 싸우다가 김양은 화살에 맞아 우징과 함께 도망가고 균정(均貞)은 해를 입으니 그 후 제륭(悌隆)이 즉위하게 되었다. 아찬(阿飡) 우징(祐徵)은 앞서 아버지 균정(均貞)의 피해로 인하여 원한된 말을 퍼뜨리니, 김명(金明)과 이홍(利弘) 등은 이에 분노하였다. 5월에 우징(祐徵)은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처자와 함께 황산진구(黃山津口)로 달아나 배를 타고 청해진대사 궁복(弓福, 張保皐)에게로 가서 의지하였다. 6월에 균정(均貞)의 매서 이찬(伊飡) 예징(禮徵)과 아찬(阿飡) 양순(良順)은 도망하여 우징(祐徵)에게로 갔다. 3년(838) 정월에 상대등(上大等) 김명(金明)과 시중(侍中) 이홍(利弘) 등이 흥병작란(興兵作亂)하여 왕의 좌우를 살해하니 왕은 스스로 온전치 못할 것을 알고 궁중에서 목을 매어 돌아갔다. 시호(諡號)를 희강(僖康)이라하고 소산(蘇山)에 장사하였다. |
제44대 민애왕(閔哀王) |
재위기간 | 838 ~ 839 | 성(性) | 金氏 |
부(父) | 대아찬(大阿飡) 충공(忠恭) | 모(母) | 귀보부인(貴寶夫人, 宣懿太后 朴氏) |
비(妃) | 윤용왕후(允容王后 金氏) | 휘(諱) | 명(明) |
원성왕(元聖王)의 증손(曾孫)이다. 일찍이 여러 번 벼슬하여 상대등(上大等)이 되었는데 시중 이홍(利弘)과 함께 희강왕(僖康王)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2년(839) 김양(金陽)등 6명의 장수와 함께 정월 달벌(達伐, 大邱)에 도착하니 왕은 이를 알고 이찬(伊飡) 대흔(大昕)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가서 막게 하였으나, 김양(金陽)의 군이 크게 이겼다. 이 때 왕은 서교 대수(西郊 大樹) 아래에 있었으나 좌우 근신(近臣)이 다 달아나므로 혼자 서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월유택(月遊宅, 離宮)으로 달려 들어오니 김양(金陽)의 병사가 왕을 찾아 살해하였다. |
제45대 신무왕(神武王) |
재위기간 | 839 | 성(性) | 金氏 |
부(父) | 상대등(上大等) 균정(均貞) | 모(母) | 진교부인(眞矯夫人, 憲穆太后 朴氏) |
비(妃) | 정계부인(貞繼夫人, 眞從太后) | 휘(諱) | 우징(祐徵) |
원성왕(元聖王)의 손자(孫子)인 균정(均貞)의 아들이며, 희강왕(僖康王)의 종제(從弟)이다. 민애왕(閔哀王) 2년(839)에 예징(禮徵) 등이 이미 궁궐을 확청한 후 예를 갖추어 왕을 맞아 즉위하게 한 것이다.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궁복(弓福, 張保皐)을 봉하여 감의군사(感義軍使)를 삼는 동시에 그에게 식읍(食邑) 2,000호를 봉하여 주었다. 이홍(利弘)은 화를 두려워하여 처자(妻子)를 버리고 산으로 도망하였으나 왕이 기병(騎兵)을 보내 추포(追捕)하였다.
즉위년 7월에 왕이 병들어 누웠는데 꿈에 이홍(利弘)이 활을 쏘아 왕의 등을 맞혔다. 꿈을 깨자 왕은 등에 종기가 나서 이 달에 돌아가니 시호(諡號)를 신무(神武)라 하고 제형산(弟兄山) 서북쪽에 장사하였다. |
제46대 문성왕(文聖王) |
재위기간 | 839 ~ 857 | 성(性) | 金氏 |
부(父) | 신무왕(神武王) | 모(母) | 정계부인(貞繼夫人) |
비(妃) | 소명왕후(炤明王后, 魏昕의 딸) | 휘(諱) | 경응(慶膺) |
신무왕(神武王)의 태자(太子)이다. 이 때는 신라의 쇠퇴기로 귀족들간에 왕위쟁탈전이 성행하였으므로, 재위 연간에 많은 반란이 있었다.
3년(841)에 일길찬(一吉飡) 홍필(弘弼)이 모반하다 발각되어 해도(海島)로 도망갔는데 잡지 못했다.
7년(845) 3월 왕이 궁복(弓福)의 딸을 맞아들여 차비(次妃)로 삼으려 하니 조신(朝臣)들이 간하기를 궁복(弓福)은 해도(海島)사람이거늘 어찌 그 딸로 왕실의 배우(配偶)를 삼을까보냐고 하니 왕이 그말을 따랐다. |
제47대 헌안왕(憲安王) |
재위기간 | 857 ~ 861 | 성(性) | 金氏 |
부(父) | 상대등(上大等) 균정(均貞) | 모(母) | 조명부인(照明夫人, 大阿飡 忠恭의 딸 金氏) |
휘(諱) | 의정(誼靖),우정(祐靖) | ||
신무왕(神武王)의 배다른 형제이며, 어머니는 민애왕(閔哀王, 金明)의 아버지 충공(忠恭)의 딸 조명부인(照明夫人)이다. 왕은 문성왕(文聖王)의 고명(顧命)에 의하여 즉위하게 되었다.
4년(860) 9월에 왕이 임해전에서 여러 신하와 회연(會宴)하였는데 왕족 응렴은 15세의 나이로 참석하였다. 왕이 응렴의 심지가 바른 것을 알고 응렴에게 말하기를 " 나에게 두 딸이 있는데 형은 금년 20세, 아우는 19세니 안은 맘대로 취하라."하니 응렴은 곧장 집으로 돌아와 부모님께 여쭈었다. 부모님은 형은 용색이 아우만 못하니 부득이 취하게 되면 아우를 취하는게 좋겠다고 하고, 흥륜사의 승려는 형을 취하면 세 가지 이익이 있고 아우를 취하면 세 가지 손실이 있다고 하니 응렴은 왕에게 왕의 명대로 하겠다고하여 왕은 큰딸을 출가시켰다. |
제48대 경문왕(景文王) |
재위기간 | 861 ~ 875 | 성(性) | 金氏 |
부(父) | 아찬(阿飡) 계명(啓明, 僖康王의 아들) | 모(母) | 광화부인(光和夫人, 神武王의 딸) |
비(妃) | 영화부인(寧花夫人, 文懿王后, 憲安王의 큰딸 金氏) | 휘(諱) | 응렴(膺廉, 凝廉) |
희강왕(僖康王)의 아들인 아찬(阿飡) 계명(啓明)이 아버지이다.
3년(863) 2월에 국학(國學)에 행차하여 박사(博士) 이하의 교관(敎官)으로 하여금 경의(經義)를 강론(講論)케 한 후 차등을 두어 물품을 주었다. 그 후 어느 날 흥륜사(興輪寺)의 승(僧, 範敎使)에게 묻기를 일전에 말한 소위 세 가지 이익이 무엇인가하고 물으니 승려가 답하기를 "당시의 왕(憲安王)과 왕비가 그 뜻대로 된 것을 기뻐하며 총애가 점점 깊어졌던 것이 한 가지이며, 또 이로 인하여 왕위를 잇게 된 것이 둘째며, 앞서부터 구하려던 전왕(前王)의 둘째 딸을 마침내 취하게 된 것이 그 셋째의 이익이라."하니 왕이 대소(大笑)하였다.
7년(867) 정월에 임해전(臨海殿)을 중수(重修)하였다.
8년(868) 6월에는 황룡사탑(皇龍寺塔)에 낙뢰가 있었다,
11년(871) 유사(有司)에 명하여 황룡사탑을 개조케 하였다,
13년(873) 9월에 개조가 완료되었는데 9층으로서 높이는 22장(丈, 220尺, 약 66m)이었다. |
제49대 헌강왕(憲康王) |
재위기간 | 875 ~ 886 | 성(性) | 金氏 |
부(父) | 경문왕(景文王) | 모(母) | 문의왕후(文懿王后) |
비(妃) | 의명부인(懿明夫人) | 휘(諱) | 정(晸) |
경문왕(景文王)의 태자로, 왕은 성품이 총민(聰敏)하고 독서(讀書)를 좋아하여 눈으로 한 번 본 것은 다 입으로 외웠다고 한다.
3년(877) 정월에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송악에서 태어났다,
5년(879) 2월에 국학(國學)에 거동하여 박사(博士) 이하의 교관(敎官)에게 명하여 경의(經義)를 강론(講論)케 하였다. 3월에 왕이 나라 동쪽의 주군을 순행할 때,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네 사람이 어가(御駕) 앞에 나타나 가무(歌舞)를 했는데, 그 모양이 해괴하고 의관(衣冠)이 괴이하여 시인(時人) 산해(山海)의 정령(精靈)이라 하였다.(三國遺事 卷2 處容郞條의 處容說話와 유사)
11년(885)에 최치원(崔致遠)이 당(唐)에서 귀국하였다. |
제50대 정강왕(定康王) |
재위기간 | 886 ~ 887 | 성(性) | 金氏 |
부(父) | 경문왕(景文王) | 모(母) | 문의왕후(文懿王后) |
휘(諱) | 황(晃) | ||
경문왕(景文王)의 둘째 아들이다.
즉위 2년(887) 정월에 백고좌(百高座)를 황룡사(皇龍寺)에 베풀고 왕이 친행하여 청강(聽講)하였으며, 한주(漢州)의 이찬(伊飡) 김요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7월 재위 2년만에 병으로 죽으면서 누이동생인 만(曼, 眞聖女王)에게 전위(傳位)하였다. 시호(諡號)를 정강(定康)이라 하고 보리사(菩提寺) 동남(東南)에 장사하였다. |
제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 |
재위기간 | 887 ~ 897 | 성(性) | 金氏 |
부(父) | 경문왕(景文王) | 모(母) | 문의왕후(文懿王后) |
휘(諱) | 만(曼) | ||
경문왕(景文王)의 딸로 헌강왕(憲康王)과 정강왕(定康王)의 누이동생이다. 정강왕(定康王)이 후사(後嗣) 없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위홍이 죽으니 왕은 그를 추시(追諡)하여 혜성대왕(惠成大王)이라 하였다. 왕은 이후로 비밀리에 2, 3명의 소년(少年) 미장부(美丈夫)를 불러들여 음란(淫亂)하며 그들에게 요직(要職)을 주고 국정을 맡기기까지 하였다. 이로 인해 이들이 방자해지고, 뇌물이 오가고, 상벌이 공평치 못하고 기강이 문란해졌다. 5년(891) 북원(北原)에서 양길(梁吉)과 그의 부장(部將) 궁예(弓裔)가 봉기하자, 이를 토평(討平)하려다가 도리어 실패하였다,
6년(892)에 완산(完山:全州)에서 견훤(甄萱)이 일어나 후백제(後百濟)라 자칭하며 세력을 확보함으로써, 신라는 삼국이 정립하는 형세에 이르렀다.
9년(895) 여왕은 10월 헌강왕(憲康王)의 서자(庶子) 요(嶢)를 태자로 삼았다. 시호(諡號)를 진성(眞聖)이라 하고 황산(黃山)에 장사하였다. |
제52대 효공왕(孝恭王) |
재위기간 | 897 ~ 912 | 성(性) | 金氏 |
부(父) | 헌강왕(憲康王) | 모(母) | 의명태후(義明太后) 김씨 |
비(妃) | 이찬(伊飡) 예겸(乂謙)의 딸 김씨 | 휘(諱) | 요(嶢) |
헌강왕(憲康王)의 서자(庶子)로 진성여왕(眞聖女王)의 유언에 의하여 위를 이어받았다.
이듬해(3년, 899) 북원(北原)의 양길(梁吉)은 궁예가 자기에게 두 마음을 품고 있음을 꺼려 궁예를 치려하다 양길이 패하였다.
5년(901)에 궁예가 이윽고 왕이라 칭하였다. 8월에는 후백제왕 견훤(甄萱)이 대야성(大耶城)을 치려다가 성이 항복치 아니하므로 군사를 금성(錦城, 羅州) 남쪽으로 옮겨 연변의 부락을 약탈하였다.
8년(904) 궁예가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하고 연호(年號)를 무태(武泰) 원년이라 하였다,
9년 7월에 국도를 철원(鐵圓, 鐵原)으로 옮겼다. 11년(907)에 이르러서는 일선군(一善郡, 善山) 이남 10여 성을 견훤(甄萱)에게 다 빼앗기고, 북쪽의 땅도 또 궁예에게 빼앗겨 신라의 영토는 날로 축소되어갔다.
15년(911) 왕이 천첩(賤妾)에 침혹하여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으니 대신(大臣) 은영(殷影)이 간하였으나 듣지 아니하여 그 첩(妾)을 죽여 버렸다. 이 해에 궁예가 국호(國號)를 다시 고쳐 태봉(泰封)이라 하고 연호(年號)를 수덕만세(水德萬歲)라 하였다. |
제53대 신덕왕(神德王) |
재위기간 | 912 ~ 917 | 성(性) | 朴氏 |
부(父) | 대아찬 예겸(乂兼) | 모(母) | 정화부인(貞和夫人) |
비(妃) | 의성왕후(義成王后, 憲康王의 딸 金氏) | 휘(諱) | 경휘(景暉) |
신덕왕(神德王)의 성은 박씨이며 아달라왕(阿達羅王, 제8대)의 원손(遠孫)이다. 아버지 예겸(乂兼)은 일찍이 정강왕(定康王)을 섬겨 대아찬(大阿飡)이 되었다. 효공왕(孝恭王)이 돌아가고 아들이 없으므로 나라사람들이 추대하여 위(位)에 올랐다.
3년(914)에 궁예(弓裔)가 수덕만세(水德萬歲)를 고쳐 정개(政開) 원년이라 하였다.
5년(916) 견훤(甄萱)이 효공왕(孝恭王) 5년(901)에 이어 신덕왕(神德王) 5년(916)에 다시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
제54대 경명왕(景明王) |
재위기간 | 917 ~ 924 | 성(性) | 朴氏 |
부(父) | 신덕왕(神德王) | 모(母) | 의성왕후(義成王后, 憲康王의 딸 金氏) |
휘(諱) | 승영(昇英) | ||
경명왕(景明王)의 휘는 승영(昇英)이며, 신덕왕(神德王)의 태자이다.
3년(919)에 고려의 태조(太祖, 王建)가 국도(國都)를 송악(松岳)으로 옮겼다. |
제55대 경애왕(景哀王) |
재위기간 | 924 ~ 927 | 성(性) | 朴氏 |
부(父) | 신덕왕(神德王) | 모(母) | 의성왕후(義成王后, 憲康王의 딸 金氏) |
휘(諱) | 위응(魏膺) | ||
경명왕(景明王)의 아우이다. 경명왕(景明王) 원년(917) 이찬(伊飡)으로서 상대등(上大等)이 된 뒤, 신라 말의 혼란기에 즉위하였는데, 왕건(王建)과 견훤(甄萱) 등의 강대한 세력에 눌려 국왕다운 위엄을 떨치지 못하였다.
3년(926) 4월에 견훤(甄萱)이 고려에 볼모로 보냈던 그의 조카 진호(眞虎)가 갑자기 죽으니 견훤은 고려의 고의적인 살해라 하고 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침략했다. |
제56대 경순왕(敬順王) |
재위기간 | 927 ~ 935 | 성(性) | 金氏 |
부(父) | 이찬(伊飡) 효종(孝宗) | 모(母) | 계아태후(桂娥太后, 憲康王의 딸) |
휘(諱) | 부(傅) | ||
문성왕(文聖王)의 후손(後孫)이며, 927년 후백제 견훤(甄萱)의 침공으로 경애왕(景哀王)이 죽은 뒤 왕위에 올랐다. 재위 때는 각처에서 군웅(群雄)이 할거하여 국력이 쇠퇴하고, 특히 여러 차례에 걸친 후백제의 침공과 약탈로 국가의 기능이 마비되었다. 영토는 날로 줄어들고, 민심이 신흥 고려로 기울어지자 9년(935) 10월에 군신회의를 소집, 고려에 귀부(歸附)하기로 결정하고,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로 하여금 국서(國書)를 가지고 가서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이 때 왕자(麻衣太子)는 말하기를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천명(天命)이 있으니, 오직 충신(忠臣)과 의사(義士)와 더불어 민심을 수합하여 스스로 나라를 굳게 하다가 힘이 다한 후에 말 것이니, 어찌 1,000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쉽사리 남에게 내줄 것이랴"하고 통곡하며 왕을 사별(辭別)하고 곧 개골산(皆骨山)으로 들어가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마의(麻衣)와 초식(草食)으로 일생을 마쳤다. 경순왕(敬順王)은 고려 태조로부터 유화궁(柳花宮)을 하사 받았으며,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맞고 정승공(政承公)에 봉해졌으며, 경주(慶州)를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한편,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에 임명됨으로써 고려시대 사심관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경순왕(敬順王)은 고려 경종(景宗) 3년(978)에 돌아가니 시호(諡號)를 경순(敬順)이라 하였다. 능은 경기도 연천 장남면(長南面)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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