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역대왕계

▣ 신라왕계 하대 제37대 ~ 제56대 제37대 선덕왕 제38대 원성왕 제39대

오늘의 쉼터 2008. 5. 5. 16:24

 

  상대 중대 하대
3시기 구분은 '삼국사기'에 의함
제37대 선덕왕(宣德王)
재위기간 780 ~ 785 성(性) 金氏
부(父) 해찬(海飡) 효방(孝芳) 모(母) 사소부인(四炤夫人 金氏, 聖德王의 딸)
비(妃) 구족부인(具足夫人, 角干 良品의 딸) 휘(諱) 양상(良相)
선덕왕(宣德王)의 휘(諱)는 양상(良相)이며, 내물왕(奈勿王)의 10세손(世孫)이다. 780년 혜공왕(惠恭王)이 성색(聲色)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자 이찬(伊飡) 김지정(金志貞)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상대등(上大等)으로 있던 양상이 김경신(金敬信)과 함께 김지정의 난을 진압하였다. 이 난 중에 혜공왕이 죽자 양상이 즉위하였다.

즉위 6년(785)에 당나라에 조공을 바쳤으며,  당의 덕종(德宗)이 검교대위계림주자사영해군사신라왕(檢校大尉鷄林州刺史寧海軍使新羅王)의 봉작을 주었다. 이 해에 왕이 병으로 누웠는데 증세가 점점 심해지므로 글을 써서 알리기를 "과인은 본질이 워낙 얇아 왕위에 야심이 없었고 추대를 도피치 못하여 부득이 즉위를 하였던 것인데 즉위 이래로 일이 순성(順成)치 못하고 민생이 곤궁하니 이는 다 나의 덕이 백성의 바램에 맞지 아니하고 천심(天心)에 합치하지 아니한 때문이다. 홀연히 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하니 사생(死生)에는 명(命)이 있는지라 다시 무엇을 한하랴. 사후에는 불교식에 의해 소화(燒火)하여 동해에 산골(散骨)하라"이르고 정월 13일에 돌아갔다. 시호(諡號)를 선덕(宣德)이라 하였다.

 

 

 

 

제38대 원성왕(元聖王)
재위기간 785 ~ 798 성(性) 金氏
부(父) 일길찬(一吉飡) 효양(孝讓) 모(母) 계오부인(繼烏夫人 朴氏)
비(妃) 연화부인(蓮花夫人 또는 淑貞夫人, 角干 神述의 딸 金氏) 휘(諱) 경신(敬信)

원성왕(元聖王)의 휘(諱)는 경신(敬信)이며 내물왕(奈勿王)의 12세손(世孫)이다. 앞서 혜공왕(惠恭王) 말년에 역신(逆臣)이 발호할 때에 전왕(前王) 선덕(宣德)이 상대등의 직에 있어 군측의 악한을 숙청하기를 앞장서서 주장하였는데 경신(敬信)이 참여하여 난(亂)을 평정하는데 공이 있었으므로 선덕이 즉위함에 이르러 곧 상대등(上大等)이 되었다.
선덕이 돌아가고 후사가 없으므로 족자(族子) 주원(周元)을 세우려 하였다. 주원은 그 집이 서울 북쪽 20리 되는 곳에 있었는데, 때마침 큰 비가 와서 알천의 물이 불어 주원이 건너오지 못하니, 상대등(上大等) 김경신으로 왕위를 계승케 했다.

즉위 2년(786) 당나라에 조공(朝貢)을 하고 신라왕의 책봉을 청하였다,

 

4년(788)에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두어 인재를 등용하였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예기(禮記), 문선(文選) 등을 읽어 그 뜻에 능통하고 논어(論語), 효경(孝經)에 밝은 자를 상품(上品), 곡례(曲禮), 논어(論語), 효경(孝經)을 읽은 자를 중품(中品), 곡례(曲禮), 효경(孝經)을 읽은 자를 하품(下品)으로 하고, 혹 오경(五經 : 易·詩·書·禮·春秋), 삼사(三史 : 史記·漢書·後漢書),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書)에 박통(博通)한 자는 초탁(超擢, 순서를 뛰어넘어)하여 등용하였다.

 

6년(790)에 김제(金堤) 벽골제(碧骨堤)를 증축, 농사를 장려하였다.

14년(798)에 왕이 돌아가니 시호(諡號)를 원성(元聖)이라 하였다. 유명(遺命)으로 영구(靈柩)를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소화(燒火)하였다.

 

 

 

 

제39대 소성왕(昭聖王)
재위기간 798 ~ 800 성(性) 金氏
부(父) 인겸(仁謙, 元聖王의 太子) 모(母) 성목왕후(聖穆王后) 金氏
비(妃) 계화부인(桂花夫人, 大阿飡 叔明의 딸 金氏) 휘(諱) 준옹(俊邕)

소성왕(昭聖王)의 휘(諱)는 준옹(俊邕)이며 태자 인겸(仁謙)의 아들이다. 원성왕(元聖王) 원년에 그의 아들 인겸(仁謙)을 봉하여 태자(太子)로 삼았는데 7년에 죽으니 원성이 손자(孫子) 준옹(俊邕)을 궁중에서 길렀다. 원성왕 11년(795)에 태자가 되었다가 원성이 돌아가자 위(位)를 이었다. 

재위 1년 7개월만에 승하하였다. 시호(諡號)를 소성(昭聖)이라 하였다. 이후부터 신라에서는 왕위 쟁탈전이 심해졌다.

 

 

 

 

제40대 애장왕(哀莊王)
재위기간 800 ~ 809 성(性) 金氏
부(父) 소성왕(昭聖王) 모(母) 계화부인(桂花夫人, 大阿飡 叔明의 딸 金氏)
비(妃) 朴氏 차비(次妃) 아찬 주벽(阿飡 宙碧)의 딸 金氏
휘(諱) 청명(淸明)·중희(重熙)

애장왕(哀莊王)의 휘(諱)는 청명(淸明)이니 소성왕(昭聖王)의 태자이다. 즉위시 나이 13세이므로 아찬(阿飡) 병부령(兵部令) 언승(彦昇, 왕의 숙부)이 섭정하였다. 원성왕(元聖王)이 돌아갔을 때 당(唐) 덕종(德宗)이 지절사를 보내 조위하고 준옹(俊邕, 昭聖王)을 책봉하려 했으나 지절사 위단(韋丹)이 운주에 이르렀을 때 준옹(俊邕)이 죽었음을 듣고 귀환하였다.

즉위 원년(800) 7월에 이름을 중희(重熙)로 고치고,

 

2년(801)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과 문무대왕(文武大王)의 2묘(廟)를 별도로 세우고, 시조대왕(始祖大王), 명덕대왕(明德大王, 왕의 高祖), 원성대왕(元聖大王, 왕의 曾祖), 혜충대왕(惠忠大王, 왕의 祖), 소성대왕(昭聖大王, 왕의 皇考)을 5묘로 삼았다.

 

3년(802)에 가야산(加耶山) 해인사(海印寺)를 창건하고, 7년(806)에 왕이 하교(下敎)하여 불사(佛寺)를 새로 짓는 것을 금하고 오직 수즙(修葺, 重修)만을 허락하였다. 또 금수(錦繡)로 불사(佛事)에 사용하거나 금은(金銀)으로 기용(器用)을 만드는 것을 금하여 관리로 하여금 널리 포고 시행케 했다.

10년(809) 왕의 숙부(叔父) 언승(彦昇)이 그 아우 이찬(伊飡) 제옹(悌邕)과 더불어 군사를 이끌고 궁중에 들어와 난(亂)을 일으키고 왕을 시해(弑害)하였으며 왕의 동생 체명(體明)도 시위(侍衛, 지키고 모심)하다가 해를 입었다. 왕을 추시(追諡)하여 애장(哀莊)이라 하였다.

 

 

 

제41대 헌덕왕(憲德王)
재위기간 809 ~ 826 성(性) 金氏
부(父) 인겸(仁謙, 元聖王의 太子) 모(母) 성목왕후(聖穆王后) 金氏
비(妃) 귀승부인(貴勝夫人, 角干 禮英의 딸) 휘(諱) 언승(彦昇)

소성왕(昭聖王)의 동생이며, 원성왕(元聖王) 6년(790)에 당(唐)에 봉사(奉仕)한 후 대아찬(大阿飡)의 위를 받고, 다음 7년(791)에 역신(逆臣) 제공(悌恭)을 제압하고 잡찬이 되었으며 10년(794)에 시중(侍中)이 되고, 11년(795)에 이찬(伊飡)으로 재상(宰相)이 되고, 12년(796)에 병부령, 애장왕(哀莊王) 원년(800)에 각간(角干), 다음 2년(801)에 상대등(上大等)이 되었다가 애장왕(哀莊王)을 죽이고 즉위하였다.

2년(810) 2월에 관리를 파견하여 국내의 저수지 제방을 수축(修築)케 하였다. 그러나 헌덕왕(憲德王)의 재위기간 동안 흉년과 재해로 인하여 백성들이 굶어 죽는 자가 많았다. 일본기약홍인7년조(日本記略弘仁七年條)에 일본으로 건너간 자가 300여 명이나 되었다고 기록되고 중국 절동(浙東)에 건너가 먹을 것을 구한 자가 많았다.

 

13년(821)에는 백성들이 기근으로 인해 자손(子孫)을 팔아 생활하는 자가 있을 정도였다.

14년(822) 3월 웅천주도독(熊川州都督) 헌창(憲昌)은 그 아버지 주원(周元)이 앞서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이유로 배반하여 국호(國號)를 장안(長安)이라 하고 연호(年號)를 경운원년(慶雲元年)이라 하고, 무진(武珍)·완산(完山)·청주(菁州)·사벌(沙伐)·국원경(國原京)·서원경(西原京)·금관경(金官京)의 수령과 관리를 협박하여 자기 소속으로 삼았다. 왕은 균정(均貞)·위공(衛恭)·제릉(悌凌) 등으로 하여 제압하였다. 이 해에 각간(角干) 충공(忠恭, 왕의 동생)의 딸 정교(貞嬌)를 맞아들여 태자비(太子妃)로 삼았다.

17년(825) 정월, 헌창의 아들 범문(梵文)이 고달산적(高達山賊) 수신(壽神) 등 100여 명과 함께 모반하여 도(都)를 평양(平壤, 지금의 서울 부근)에 정하려 하여 북한산주(北漢山州)를 공격하니, 도독(都督) 총명(聰明)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를 죽였다.

18년(826)에 우잠(牛岑) 태수 백영(白永)에게 명하여 한산(漢山) 이북의 여러 주군(諸州郡) 백성 1만명을 징발하여 패강(浿江) 장성(長城) 300리를 쌓게 하였다.
이해(826) 10월에 왕이 돌아가시니 시호(諡號)를 헌덕(憲德)이라 하고 천림사(泉林寺) 북쪽에 장사하였다.

 

 

 

 

제42대 흥덕왕(興德王)
재위기간 826 ~ 836 성(性) 金氏
부(父) 인겸(仁謙, 元聖王의 太子) 모(母) 성목왕후(聖穆王后) 金氏
비(妃) 장화부인(章和夫人, 定穆王后, 昭聖王의 딸) 휘(諱) 수종(秀宗)·경휘(景徽)
흥덕왕(興德王)의 휘(諱)는 수종(秀宗)인데 뒤에 경휘(景徽)로 고쳤다. 헌덕왕의 동생이다. 헌덕왕11년(819) 상대등(上大等)이 되었으며, 헌덕왕14년(822) 부군(副君)이 되어 월지궁(月池宮)에 들어갔다.

즉위 원년(826) 12월에 왕비 장화부인(章和夫人)이 돌아가니 추봉(追封)하여 정목왕후(定穆王后)라 하고, 왕은 죽은 비(妃)를 사모하여 잊지 못하였다. 군신이 표(表)를 올려 새로 왕비를 맞을것을 청하니 왕이 말하기를 "척조(隻鳥, 한 마리 새)도 짝을 잃은 슬픔이 있거늘 하물며 좋은 배필(配匹)을 잃고 어떻게 재취(再娶)할 수 있겠는가"하며 군신들의 말을 따르지 않고, 또한 시녀(侍女)까지도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였다.

3년(828) 정월에 왕의 종제(從弟) 대아찬(大阿飡) 김우징(金祐徵)으로 시중(侍中)을 삼고, 4월에는 청해대사(淸海大使)에 궁복(弓福, 張保皐)을 임명, 진을 지키게 했다. 이 해에 대렴(大廉)이 당나라로부터 차(茶) 종자를 가져오니 왕은 그것을 지리산(地理山. 지금의 智異山)에 심게 했다. 차(茶)는 선덕여왕(善德女王) 때부터 있었지만 이 때에 이르러 성하였다.

11년(836)에 왕이 돌아가니 시호(諡號)를 흥덕(興德)이라 하고 유언에 의하여 장화부인(章和夫人)의 능(陵)에 합장(合葬)하였다.

 

 

 

제43대 희강왕(僖康王)
재위기간 836 ~ 838 성(性) 金氏
부(父) 이찬 김헌정(伊飡 金憲貞, 元聖王의 孫子) 모(母) 포도부인(包道夫人)
비(妃) 문목부인(文穆夫人, 大阿飡 忠恭의딸) 휘(諱) 제륭(悌隆)
희강왕(僖康王)의 휘(諱)는 제륭(悌隆)이며 원성대왕(元聖大王)의 손자이다. 흥덕왕(興德王)이 돌아가자 흥덕왕의 종제(從弟) 균정(均貞)과 종제 헌정(憲貞)의 아들인 제륭(悌隆)이 다 각기 왕이 되려고 하였다. 이 때 시중(侍中) 김명(金明, 후에 閔哀王)과 아찬(阿飡) 이홍(利弘), 배훤백(裴萱伯) 등은 제륭(悌隆)을 받들고 아찬(阿飡) 우징(祐徵)은 조카(姪) 예징(禮徵)·김양(金陽)과 함께 그 아버지 균정을 받들어 동시에 궐내(闕內)로 들어가 서로 싸우다가 김양은 화살에 맞아 우징과 함께 도망가고 균정(均貞)은 해를 입으니 그 후 제륭(悌隆)이 즉위하게 되었다.
아찬(阿飡) 우징(祐徵)은 앞서 아버지 균정(均貞)의 피해로 인하여 원한된 말을 퍼뜨리니, 김명(金明)과 이홍(利弘) 등은 이에 분노하였다. 5월에 우징(祐徵)은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처자와 함께 황산진구(黃山津口)로 달아나 배를 타고 청해진대사 궁복(弓福, 張保皐)에게로 가서 의지하였다. 6월에 균정(均貞)의 매서 이찬(伊飡) 예징(禮徵)과 아찬(阿飡) 양순(良順)은 도망하여 우징(祐徵)에게로 갔다.

3년(838) 정월에 상대등(上大等) 김명(金明)과 시중(侍中) 이홍(利弘) 등이 흥병작란(興兵作亂)하여 왕의 좌우를 살해하니 왕은 스스로 온전치 못할 것을 알고 궁중에서 목을 매어 돌아갔다. 시호(諡號)를 희강(僖康)이라하고 소산(蘇山)에 장사하였다.

 

 

제44대 민애왕(閔哀王)
재위기간 838 ~ 839 성(性) 金氏
부(父) 대아찬(大阿飡) 충공(忠恭) 모(母) 귀보부인(貴寶夫人, 宣懿太后 朴氏)
비(妃) 윤용왕후(允容王后 金氏) 휘(諱) 명(明)

원성왕(元聖王)의 증손(曾孫)이다. 일찍이 여러 번 벼슬하여 상대등(上大等)이 되었는데 시중 이홍(利弘)과 함께 희강왕(僖康王)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즉위 원년(838)에 김양(金陽)은 군사를 모집하여 청해진(淸海鎭)으로 들어가 아찬(阿飡) 우징(祐徵)을 배알하였다. 우징은 이 때 궁복(弓福, 張保皐)에게 말하기를 "김명(金明, 閔哀王)은 임금을 죽이고 자립하였고 이홍(利弘)도 군(君)·부(父)를 함부로 죽였으니 하늘을 공대치 못할 원수이다. 원컨데 장군의 병력에 의하여 군(君)·부(父)의 원수를 갚고자 한다."하니 궁복도 명령에 복종하였다. 12월에 김양(金陽)은 청해진(淸海鎭)에서 평동장군(平東將軍)이 되었다

 

 

2년(839) 김양(金陽)등 6명의 장수와 함께  정월 달벌(達伐, 大邱)에 도착하니 왕은 이를 알고 이찬(伊飡) 대흔(大昕)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가서 막게 하였으나, 김양(金陽)의 군이 크게 이겼다. 이 때 왕은 서교 대수(西郊 大樹) 아래에 있었으나 좌우 근신(近臣)이 다 달아나므로 혼자 서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월유택(月遊宅, 離宮)으로 달려 들어오니 김양(金陽)의 병사가 왕을 찾아 살해하였다.

군신(群臣)이 고왕(故王)을 예로 장사하고 시호(諡號)를 민애(閔哀)라 하였다.

 

 

제45대 신무왕(神武王)
재위기간 839 성(性) 金氏
부(父) 상대등(上大等) 균정(均貞) 모(母) 진교부인(眞矯夫人, 憲穆太后 朴氏)
비(妃) 정계부인(貞繼夫人, 眞從太后) 휘(諱) 우징(祐徵)

원성왕(元聖王)의 손자(孫子)인 균정(均貞)의 아들이며, 희강왕(僖康王)의 종제(從弟)이다. 민애왕(閔哀王) 2년(839)에 예징(禮徵) 등이 이미 궁궐을 확청한 후 예를 갖추어 왕을 맞아 즉위하게 한 것이다.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궁복(弓福, 張保皐)을 봉하여 감의군사(感義軍使)를 삼는 동시에 그에게 식읍(食邑) 2,000호를 봉하여 주었다. 이홍(利弘)은 화를 두려워하여 처자(妻子)를 버리고 산으로 도망하였으나 왕이 기병(騎兵)을 보내 추포(追捕)하였다.

 

즉위년 7월에 왕이 병들어 누웠는데 꿈에 이홍(利弘)이 활을 쏘아 왕의 등을 맞혔다. 꿈을 깨자 왕은 등에 종기가 나서 이 달에 돌아가니 시호(諡號)를 신무(神武)라 하고 제형산(弟兄山) 서북쪽에 장사하였다.

 

 

제46대 문성왕(文聖王)
재위기간 839 ~ 857 성(性) 金氏
부(父) 신무왕(神武王) 모(母) 정계부인(貞繼夫人)
비(妃) 소명왕후(炤明王后, 魏昕의 딸) 휘(諱) 경응(慶膺)

신무왕(神武王)의 태자(太子)이다. 이 때는 신라의 쇠퇴기로 귀족들간에 왕위쟁탈전이 성행하였으므로, 재위 연간에 많은 반란이 있었다.

즉위 원년(839)에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궁복(弓福, 張保皐)의 공을 치하하여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 삼고 겸하여 장복(章服)을 내렸다.

 

3년(841)에 일길찬(一吉飡) 홍필(弘弼)이 모반하다 발각되어 해도(海島)로 도망갔는데 잡지 못했다.

 

7년(845) 3월 왕이 궁복(弓福)의 딸을 맞아들여 차비(次妃)로 삼으려 하니 조신(朝臣)들이 간하기를 궁복(弓福)은 해도(海島)사람이거늘 어찌 그 딸로 왕실의 배우(配偶)를 삼을까보냐고 하니 왕이 그말을 따랐다.

8년(846) 봄에 궁복(弓福)이 자기의 딸을 비로 들이지 않은 것을 원망하여 청해진에서 의거하여 반기를 들었다. 조정에서는 그를 치자니 혹 불의의 환이 있을지 모르고 그대로 두자니 그 죄는 용서할 수 없으므로 우려에 쌓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때 무주(武州, 지금의 光州) 사람 염장(閻長)이란 자가 나서 궁복(弓福)에 접근하여 목을 잘랐다.

19년(857) 9월에 왕이 병환으로 편치 못하니 유조를 내리기를 "과인이 미미한 자질로 숭고한 자리에 처하여 위로는 하늘에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고 아래로는 백성의 기대를 잃을까 염려하여 조석으로 긍긍함이 마치 연못의 얼음을 건넘과 같다. 지금 역질에 걸려 정신이 혼몽하니 조로(朝露, 아침이슬)보다 먼저 사라질지 모르겠다. 조종의 대업은 주군(主君)이 없어서는 아니되니, 서불한(舒弗邯) 의정(誼靖)은 선황(先皇)의 영손(令孫)으로 과인의 숙부이거니와, 효우(孝友)가 있고 명민(明敏)하고 관후하고 인자하여, 나는 이 무거운 짐을 풀어 현덕(賢德, 즉 誼靖)에게 맡기려한다."하고 7일만에 돌아가니 시호(諡號)를 문성(文聖)이라 하고 공작지(孔雀趾)에 장사하였다.

 

 

 

 

제47대 헌안왕(憲安王)
재위기간 857 ~ 861 성(性) 金氏
부(父) 상대등(上大等) 균정(均貞) 모(母) 조명부인(照明夫人, 大阿飡 忠恭의 딸 金氏)
휘(諱) 의정(誼靖),우정(祐靖)

신무왕(神武王)의 배다른 형제이며, 어머니는 민애왕(閔哀王, 金明)의 아버지 충공(忠恭)의 딸 조명부인(照明夫人)이다. 왕은 문성왕(文聖王)의 고명(顧命)에 의하여 즉위하게 되었다.

즉위 3년(859) 4월에 교지를 내려 제방을 수리하여 완전하게 복구케 하는 동시에 농사를 권장하였다.

 

4년(860) 9월에 왕이 임해전에서 여러 신하와 회연(會宴)하였는데 왕족 응렴은 15세의 나이로 참석하였다. 왕이 응렴의 심지가 바른 것을 알고 응렴에게 말하기를 " 나에게 두 딸이 있는데 형은 금년 20세, 아우는 19세니 안은 맘대로 취하라."하니 응렴은 곧장 집으로 돌아와 부모님께 여쭈었다. 부모님은 형은 용색이 아우만 못하니 부득이 취하게 되면 아우를 취하는게 좋겠다고 하고, 흥륜사의 승려는 형을 취하면 세 가지 이익이 있고 아우를 취하면 세 가지 손실이 있다고 하니 응렴은 왕에게 왕의 명대로 하겠다고하여 왕은 큰딸을 출가시켰다.

5년(861) 정월에 왕의 병환(病患)이 침중하여 좌우에 말하기를 "과인이 불행히 아들이 없고 딸만 있으니, 우리나라 고사(故事)에 비록 선덕(善德, 제27대)과 진덕(眞德, 제28대) 두 여주(女主)의 예가 있었으나 이는 빈계의 신(牝鷄 晨, 婦人이 外事에 참여하는 것을 비유)에 가까운 것이니, 사위 응렴(應廉)은 나이는 비록 적으나 노성(老成)한 덕이 있으니 경들이 위(位)를 세워 섬기면 반드시 조종(祖宗)의 영서(令緖)를 떨어뜨림이 없을 것이므로 과인은 죽어도 썩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 달 29일에 왕이 돌아가시니 시를 헌안(憲安)이라 하고 공작지(孔雀趾)에 장사하였다.

 

 

 

제48대 경문왕(景文王)
재위기간 861 ~ 875 성(性) 金氏
부(父) 아찬(阿飡) 계명(啓明, 僖康王의 아들) 모(母) 광화부인(光和夫人, 神武王의 딸)
비(妃) 영화부인(寧花夫人, 文懿王后, 憲安王의 큰딸 金氏) 휘(諱) 응렴(膺廉, 凝廉)

희강왕(僖康王)의 아들인 아찬(阿飡) 계명(啓明)이 아버지이다.

즉위 2년(861) 8월 입당사(入唐使) 아찬(阿飡) 부량(富良) 등의 일행이 바다에 익사하였다.

 

3년(863) 2월에 국학(國學)에 행차하여 박사(博士) 이하의 교관(敎官)으로 하여금 경의(經義)를 강론(講論)케 한 후 차등을 두어 물품을 주었다. 그 후 어느 날 흥륜사(興輪寺)의 승(僧, 範敎使)에게 묻기를 일전에 말한 소위 세 가지 이익이 무엇인가하고 물으니 승려가 답하기를 "당시의 왕(憲安王)과 왕비가 그 뜻대로 된 것을 기뻐하며 총애가 점점 깊어졌던 것이 한 가지이며, 또 이로 인하여 왕위를 잇게 된 것이 둘째며, 앞서부터 구하려던 전왕(前王)의 둘째 딸을 마침내 취하게 된 것이 그 셋째의 이익이라."하니 왕이 대소(大笑)하였다.

4년(864) 2월 왕이 감은사(感恩寺)에 나아가 바다에 망제(望祭)하였다,

 

7년(867) 정월에 임해전(臨海殿)을 중수(重修)하였다.

 

8년(868) 6월에는 황룡사탑(皇龍寺塔)에 낙뢰가 있었다,

 

11년(871) 유사(有司)에 명하여 황룡사탑을 개조케 하였다,

 

13년(873) 9월에 개조가 완료되었는데 9층으로서 높이는 22장(丈, 220尺, 약 66m)이었다.

14년(874) 5월 이찬(伊飡) 근종(近宗)이 모반(謀叛)하여 대궐을 범하였으나 금군(禁軍, 近衛隊)을 내어 격파하고 근종은 거열(車裂, 몸을 두 마차에 매어 左右로 찢는 형벌)에 처하였다. 이 해에 최치원(崔致遠)이 당(唐)에서 등과(登科)하였다.

15년(875) 7월 8일에 왕이 돌아가니 시호(諡號)를 경문(景文)이라 하였다.

경문왕(景文王)은 신라의 쇠퇴기에 등극하여 빈번히 일어나는 중앙귀족의 모반(謀叛)과 지방의 반란을 평정하기에 힘썼다. 한편 사신을 당(唐)나라에 파견하여 긴밀한 유대를 맺었고, 황룡사탑(皇龍寺塔)을 수축하는 등의 업적도 남겼으나, 재위 중에 천재지변(天災地變)이 많아 백성이 곤궁하였다.

 

 

 

제49대 헌강왕(憲康王)
재위기간 875 ~ 886 성(性) 金氏
부(父) 경문왕(景文王) 모(母) 문의왕후(文懿王后)
비(妃) 의명부인(懿明夫人) 휘(諱) 정(晸)

경문왕(景文王)의 태자로, 왕은 성품이 총민(聰敏)하고 독서(讀書)를 좋아하여 눈으로 한 번 본 것은 다 입으로 외웠다고 한다.

즉위 2년(876) 황룡사에서 승려를 모아 놓고 음식을 대접하고 백고좌(百高座)를 베풀고 경을 강설(講說)하니, 왕이 친히 가서 강의를 들었다.

 

3년(877) 정월에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송악에서 태어났다,

 

5년(879) 2월에 국학(國學)에 거동하여 박사(博士) 이하의 교관(敎官)에게 명하여 경의(經義)를 강론(講論)케 하였다. 3월에 왕이 나라 동쪽의 주군을 순행할 때,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네 사람이 어가(御駕) 앞에 나타나 가무(歌舞)를 했는데, 그 모양이 해괴하고 의관(衣冠)이 괴이하여 시인(時人) 산해(山海)의 정령(精靈)이라 하였다.(三國遺事 卷2 處容郞條의 處容說話와 유사)

6년(880) 9월 9일에 왕이 좌우근신(左右近臣)들과 더불어 월상루(月上樓)에 올라 사면(四面)을 바라보니, 서울의 민가는 즐비하게 늘어섰고 가락(歌樂)의 소리는 끊임없이 일어났다. 왕이 시중(侍中) 민공(敏恭)을 돌아다보고 말하기를, "내 들으니 지금 민가에서는 집을 기와로 덮고 짚으로 잇지 아니하며, 밥을 짓되 숯으로 하고 나무로써 하지 않는다 하니 사실이냐"고 물었다. 민공이 대답하기를 "신(臣)도 또한 그렇게 들었습니다."하며 왕의 성덕(成德)을 칭송하였다.

 

11년(885)에 최치원(崔致遠)이 당(唐)에서 귀국하였다.

12년(886) 7월에 왕이 돌아가시니 시호(諡號)를 헌강(憲康)이라 하고 보리사(菩提寺) 동남(東南)에 장사하였다.

 

 

 

제50대 정강왕(定康王)
재위기간 886 ~ 887 성(性) 金氏
부(父) 경문왕(景文王) 모(母) 문의왕후(文懿王后)
휘(諱) 황(晃)

경문왕(景文王)의 둘째 아들이다.

 

즉위 2년(887) 정월에 백고좌(百高座)를 황룡사(皇龍寺)에 베풀고 왕이 친행하여 청강(聽講)하였으며, 한주(漢州)의 이찬(伊飡) 김요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7월 재위 2년만에 병으로 죽으면서 누이동생인 만(曼, 眞聖女王)에게 전위(傳位)하였다. 시호(諡號)를 정강(定康)이라 하고 보리사(菩提寺) 동남(東南)에 장사하였다.

 

 

제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
재위기간 887 ~ 897 성(性) 金氏
부(父) 경문왕(景文王) 모(母) 문의왕후(文懿王后)
휘(諱) 만(曼)

경문왕(景文王)의 딸로 헌강왕(憲康王)과 정강왕(定康王)의 누이동생이다. 정강왕(定康王)이 후사(後嗣) 없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즉위 2년(888) 왕이 전부터 각간(角干) 위홍(魏弘)과 좋아지내더니, 이 때에 이르러서는 위홍을 내전(內殿)에 불러들여 일을 맡기고 그에게 명하여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함께 향가(鄕歌)를 수집케 하여 "삼대목(三代目)"이라 이름하였다.

위홍이 죽으니 왕은 그를 추시(追諡)하여 혜성대왕(惠成大王)이라 하였다. 왕은 이후로 비밀리에 2, 3명의 소년(少年) 미장부(美丈夫)를 불러들여 음란(淫亂)하며 그들에게 요직(要職)을 주고 국정을 맡기기까지 하였다. 이로 인해 이들이 방자해지고, 뇌물이 오가고, 상벌이 공평치 못하고 기강이 문란해졌다.

3년(889) 국내 여러 주군(州郡)에서 공부(貢賦, 공물)를 바치지 아니하여 국고(國庫)가 비고 궁핍하므로 왕이 사자를 보내어 이를 독촉하니 이로 인하여 도처에서 도적이 벌떼와 같이 일어났다.

5년(891) 북원(北原)에서 양길(梁吉)과 그의 부장(部將) 궁예(弓裔)가 봉기하자, 이를 토평(討平)하려다가 도리어 실패하였다,

 

6년(892)에 완산(完山:全州)에서 견훤(甄萱)이 일어나 후백제(後百濟)라 자칭하며 세력을 확보함으로써, 신라는 삼국이 정립하는 형세에 이르렀다.

8년(894) 2월에 최치원(崔致遠)이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올리니 왕이 기쁘게 받아들이고 최치원(崔致遠)을 배(拜)하여 아찬(阿飡)을 삼았다. 

 

9년(895) 여왕은 10월 헌강왕(憲康王)의 서자(庶子) 요(嶢)를 태자로 삼았다.

11년(897) 6월 실정에 대한 책임을 지고 태자에게 양위한 뒤 그 해 12월에 북궁(北宮)에서 돌아갔다.

시호(諡號)를 진성(眞聖)이라 하고 황산(黃山)에 장사하였다.

 

 

 

제52대 효공왕(孝恭王)

재위기간 897 ~ 912 성(性) 金氏
부(父) 헌강왕(憲康王) 모(母) 의명태후(義明太后) 김씨
비(妃) 이찬(伊飡) 예겸(乂謙)의 딸 김씨 휘(諱) 요(嶢)

헌강왕(憲康王)의 서자(庶子)로 진성여왕(眞聖女王)의 유언에 의하여 위를 이어받았다.

즉위 2년(898) 7월 궁예(弓裔)가 패서도(浿西道)와 한산주(漢山州)를 취하고 국도(國都)를 송악군(松岳郡, 開城)에 정하였다.

 

이듬해(3년, 899) 북원(北原)의 양길(梁吉)은 궁예가 자기에게 두 마음을 품고 있음을 꺼려 궁예를 치려하다 양길이 패하였다.

 

 5년(901)에 궁예가 이윽고 왕이라 칭하였다. 8월에는 후백제왕 견훤(甄萱)이 대야성(大耶城)을 치려다가 성이 항복치 아니하므로 군사를 금성(錦城, 羅州) 남쪽으로 옮겨 연변의 부락을 약탈하였다.

 

8년(904) 궁예가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하고 연호(年號)를 무태(武泰) 원년이라 하였다,

 

9년 7월에 국도를 철원(鐵圓, 鐵原)으로 옮겼다. 11년(907)에 이르러서는 일선군(一善郡, 善山) 이남 10여 성을 견훤(甄萱)에게 다 빼앗기고, 북쪽의 땅도 또 궁예에게 빼앗겨 신라의 영토는 날로 축소되어갔다.

 

15년(911) 왕이 천첩(賤妾)에 침혹하여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으니 대신(大臣) 은영(殷影)이 간하였으나 듣지 아니하여 그 첩(妾)을 죽여 버렸다.

이 해에 궁예가 국호(國號)를 다시 고쳐 태봉(泰封)이라 하고 연호(年號)를 수덕만세(水德萬歲)라 하였다.

16년(912) 4월에 왕이 돌아가니 시호(諡號)를 효공(孝恭)이라 하고 사자사(師子寺) 북쪽에 장사하였다.

 

 

 

제53대 신덕왕(神德王)
재위기간 912 ~ 917 성(性) 朴氏
부(父) 대아찬 예겸(乂兼) 모(母) 정화부인(貞和夫人)
비(妃) 의성왕후(義成王后, 憲康王의 딸 金氏) 휘(諱) 경휘(景暉)

신덕왕(神德王)의 성은 박씨이며 아달라왕(阿達羅王, 제8대)의 원손(遠孫)이다. 아버지 예겸(乂兼)은 일찍이 정강왕(定康王)을 섬겨 대아찬(大阿飡)이 되었다. 효공왕(孝恭王)이 돌아가고 아들이 없으므로 나라사람들이 추대하여 위(位)에 올랐다.

즉위 원년(912)에 아들 승영(昇英)을 세워 왕태자(王太子)로 삼았다.

 

3년(914)에 궁예(弓裔)가 수덕만세(水德萬歲)를 고쳐 정개(政開) 원년이라 하였다.

 

5년(916) 견훤(甄萱)이 효공왕(孝恭王) 5년(901)에 이어 신덕왕(神德王) 5년(916)에 다시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6년(917) 7월에 왕이 돌아가니 시호(諡號)를 신덕(神德)이라 하고 죽성(竹城)에 장사하였다.

 

 

 

제54대 경명왕(景明王)
재위기간 917 ~ 924 성(性) 朴氏
부(父) 신덕왕(神德王) 모(母) 의성왕후(義成王后, 憲康王의 딸 金氏)
휘(諱) 승영(昇英)

경명왕(景明王)의 휘는 승영(昇英)이며, 신덕왕(神德王)의 태자이다.

즉위 2년(918) 태봉(泰封)의 궁예(弓裔)가 인심을 잃어 왕건(王建)이 추대되고 궁예는 도망가다가 피살되었는데, 왕건은 연호를 천수(天授) 원년이라 칭하였다,

 

3년(919)에 고려의 태조(太祖, 王建)가 국도(國都)를 송악(松岳)으로 옮겼다.

4년(920) 왕이 고려 태조와 사신을 교환하고 우호를 닦았다. 이 해 10월에 견훤(甄萱)이 보병(步兵)과 기병(騎兵) 1만을 거느리고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자 경명왕(景明王)은 아찬(阿飡) 김률(金律)을 고려에 보내 왕건(王建)에게 원조를 구하였다. 왕건이 부장(部將)에 명하여 구원하게 하니 견훤이 이를 듣고 철수하였다.

5년(921) 정월 김률(金律)이 왕에게 고하기를 "고려왕이 묻기를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다고 하는데 장륙존상(丈六尊像), 구층탑(九層塔, 皇龍寺), 성대(聖帶)가 그것이다. 상(像)과 탑(塔)은 지금도 남아있는 줄 알지만 성대(聖帶)도 지금까지 있느냐고 하므로 신은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하니 왕이 군신들에게 물으니 아는 자가 없었다. 그 때 황룡사에 나이 90이 넘은 중이 말하기를 "전에 들으니 보대(寶帶)는 진평왕(眞平王)이 띠시던 것으로 지금 남고(南庫)에 보장(保藏)되어 있습니다." 하니 왕이 고(庫)를 살펴보게 하였으나 볼 수 없었고, 다음 날 재계제사(齋戒祭祀)한 후에야 그것을 보게 되었다. 그 띠는 금옥(金玉)으로 장식하고 길이가 매우 길어 보통사람은 띨 수가 없었다.

8년(924)에 왕이 돌아가니 시호(諡號)를 경명(景明)이라 하고 황복사(黃福寺) 북쪽에 장사하였는데,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사신을 보내어 조문(弔問)하였다.

 

 

 

 

제55대 경애왕(景哀王)
재위기간 924 ~ 927 성(性) 朴氏
부(父) 신덕왕(神德王) 모(母) 의성왕후(義成王后, 憲康王의 딸 金氏)
휘(諱) 위응(魏膺)

경명왕(景明王)의 아우이다. 경명왕(景明王) 원년(917) 이찬(伊飡)으로서 상대등(上大等)이 된 뒤, 신라 말의 혼란기에 즉위하였는데, 왕건(王建)과 견훤(甄萱) 등의 강대한 세력에 눌려 국왕다운 위엄을 떨치지 못하였다.

즉위 2년(925) 고울부(高鬱府, 永川)장군 능문(能文)이 고려 태조에게 투항하였으나 고울부가 신라 왕도에 가까웠던 까닭에 능문을 위로하여 돌려보냈다.

 

3년(926) 4월에 견훤(甄萱)이 고려에 볼모로 보냈던 그의 조카 진호(眞虎)가 갑자기 죽으니 견훤은 고려의 고의적인 살해라 하고 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침략했다.

4년(927) 고려 태조가 친히 백제를 치니 경애왕(景哀王)은 군사를 보내 도왔다. 9월에 견훤이 고울부에서 침범하므로 왕이 왕건에게 구원을 청하니 왕건은 정병 1만을 출동시켰으나 견훤은 구원병이 아직 오지 않을 것을 기회로 갑자기 신라 왕경을 쳐들어왔다. 왕은 비빈 종척(宗戚)과 더불어 포석정(鮑石亭)에서 잔치를 벌이던 중이라 적병이 닥침을 알지 못하였다. 견훤은 왕을 핍박하여 자진하게 하고 왕비를 강음(强淫)하고 왕의 족제(族弟) 김부(金傅)를 세워 국사를 대리케 하니 이가 곧 경순왕(敬順王)이다.경순왕(敬順王)은 시호(諡號)를 올려 경애(景哀)라 하고 남산(南山) 해목령(蟹目嶺)에 장사하였다.

 

 

 

제56대 경순왕(敬順王)
재위기간 927 ~ 935 성(性) 金氏
부(父) 이찬(伊飡) 효종(孝宗) 모(母) 계아태후(桂娥太后, 憲康王의 딸)
휘(諱) 부(傅)
문성왕(文聖王)의 후손(後孫)이며, 927년 후백제 견훤(甄萱)의 침공으로 경애왕(景哀王)이 죽은 뒤 왕위에 올랐다.

재위 때는 각처에서 군웅(群雄)이 할거하여 국력이 쇠퇴하고, 특히 여러 차례에 걸친 후백제의 침공과 약탈로 국가의 기능이 마비되었다. 영토는 날로 줄어들고, 민심이 신흥 고려로 기울어지자 9년(935) 10월에 군신회의를 소집, 고려에 귀부(歸附)하기로 결정하고,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로 하여금 국서(國書)를 가지고 가서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이 때 왕자(麻衣太子)는 말하기를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천명(天命)이 있으니, 오직 충신(忠臣)과 의사(義士)와 더불어 민심을 수합하여 스스로 나라를 굳게 하다가 힘이 다한 후에 말 것이니, 어찌 1,000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쉽사리 남에게 내줄 것이랴"하고 통곡하며 왕을 사별(辭別)하고 곧 개골산(皆骨山)으로 들어가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마의(麻衣)와 초식(草食)으로 일생을 마쳤다.

경순왕(敬順王)은 고려 태조로부터 유화궁(柳花宮)을 하사 받았으며,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맞고 정승공(政承公)에 봉해졌으며, 경주(慶州)를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한편,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에 임명됨으로써 고려시대 사심관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경순왕(敬順王)은 고려 경종(景宗) 3년(978)에 돌아가니 시호(諡號)를 경순(敬順)이라 하였다. 능은 경기도 연천 장남면(長南面)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