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역대왕계

▣ 신라왕계 상대 제1대 ~ 제28대 제1대 혁거세거서간 제2대 남해차차웅

오늘의 쉼터 2008. 5. 5. 15:20

 

 

 

 

 

 

 

 

 

 

 

  상대 중대 하대
3시기 구분은 '삼국사기'에 의함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
재위기간 B.C. 57 ~ A.D. 4 성(性) 朴氏
휘(諱) 혁거세(赫居世) 비(妃) 알영부인(閼英夫人)

시조(始祖)의 성(姓)은 박씨(朴氏)이며 휘(諱)는 혁거세(赫居世)이다. B.C. 57년(前漢 孝宣帝 五鳳 元年 甲子) 4월에 즉위하여 왕호(王號)를 거서간(居西干)이라 하고 국호를 서나벌(徐那伐)이라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일찍이 조선(고조선)의 유민(遺民)이 지금의 경상도 지방 산곡간(山谷間)에 흩어져 살면서,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취산진지촌(珍支村, 于珍村)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명활산고야촌(明活山高耶村) 등 육촌을 이루었는데 이것이 진한의 6부이다.(육촌에 관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은 아래 참고와 같다.)

고허촌장 소벌공(蘇伐公)이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 곁의 숲을 바라보니 말이 꿇어앉아 울고 있었다. 가보니 말은 보이지 않고 큰 알 하나가 있어 깨어 보니 그 속에 어린아이가 들어 있었다.

그 출생이 신이(神異)하여 육부사람들이 추존(推尊)하여 임금으로 세웠다. 알이 매우 커서 박과 같다하여 성을 박(朴)이라 하였다.

즉위 5년(B.C. 53) 정월 알영(閼英)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이에 앞서 용(龍)이 알영(閼英井)에 나타나 오른쪽 갈빗대에서 계집아이를 낳았는데, 우물 이름을 따라서 알영이라 하였다. 알영은 자랄수록 덕기(德氣)가 있으므로, 혁거세가 그녀를 비로 맞이하여 알영부인(閼英夫人)이라 하였다. 사람들은 이들을 이성(二聖)이라 불렀다.

 

즉위 21년(B.C. 37) 서울에 성을 쌓고 금성(金城)이라 했다,

 

즉위 26년(B.C. 32) 금성에 궁실(宮室)을 지었다.

 

30년(B.C. 28)에 낙랑인들이 침범해 왔으나 국경에 있는 백성들이 밤에 문을 닫지 않으며 곡식더미가

들에 즐비한 것을 보고 말하기를 "과연 도가 있는 나라다" 하고 부끄러워하며 스스로 물러갔다.

즉위 61년(A.D. 4)에 73세로 거서간(居西干)이 승하하자 담엄사(曇嚴寺) 북쪽 사릉(蛇陵)에 장사지냈는데, 지금 위치는 경주시 남천(南川)의 남쪽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紀異 第1 新羅始祖 赫居世王 조에 기록된 辰韓 6村
  1.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
    그 남쪽은 지금 담엄사(曇嚴寺)이다. 촌장은 알평(閼平)이니 처음에 하늘에서 표암봉에 내려왔으니 이가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의 조상이 되었다.(弩禮王 9년에 부를 두어 급량부라 했다. 고려 태조 天福 5년 庚子에 中興部라 이름을 고쳤다. 波潛, 東山, 彼上의 東村이 여기에 속한다.)
  2.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
    촌장은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처음에 형산(兄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사량부(沙梁部) 정씨(鄭氏, 三國史記에는 崔氏라 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南山部)라 하여 구량벌(仇梁伐), 마등오(麻等烏), 도북(道北), 회덕(廻德) 등 남촌(南村)이 여기에 속한다.
  3.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
    촌장은 구(俱, 또는 仇라 함) 예마(禮馬)이다. 처음에 이산(伊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점량부(漸梁部),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長福部)라 하여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西村)이 여기에 속한다.
  4. 취산진지촌(珍支村)
    촌장은 지백호(智伯虎)로 처음에 화산(花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본피부(本彼部) 최씨(崔氏, 三國史記에는 鄭氏라 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 한다. 시파(柴巴) 등 동남촌(東南村)이 여기에 속한다. 최치원(崔致遠)은 바로 본피부(本彼部) 사람이다. 지금은 황룡사(皇龍寺) 남쪽 미탄사(味呑寺) 남쪽에 옛 터가 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최후(崔侯)의 옛집임이 분명하다.
  5.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
    지금의 금강산(金剛山) 백률사(栢栗寺) 북쪽 산이다. 촌장은 지타이다. 처음에 명활산(明活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한기부(漢岐部) 또는 한기부(韓岐部) 배씨(裴氏)의 조상이다. 지금은 가덕부(加德部)라 하는데 상서지(上西知), 하서지(下西知), 내아(乃兒) 등 동촌(東村)이 여기에 속한다.
  6. 명활산고야촌(明活山高耶村)
    촌장은 호진(虎珍)이다. 처음에 금강산(金剛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다. 지금은 임천부(臨川部)라고 하는데 물이촌(勿伊村), 잉구미촌, 궐곡(闕谷) 등 동북촌(東北村)이 여기에 속한다.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재위기간 4 ~ 24 성(性) 朴氏
부(父) 혁거세(赫居世) 모(母) 알영부인(閼英夫人)
비(妃) 운제부인(雲帝夫人, 혹은 阿婁夫人)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적자(嫡子, 맏아들)이다. 신라가 정식으로 왕의 칭호를 쓰기 전에는 차차웅(次次雄) ·거서간(居西干) 또는 이사금(尼師今) ·마립간(麻立干) 등의 칭호를 사용하였으므로, 남해차차웅 또는 남해거서간이라고도 한다. 박혁거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즉위 3년(6)에 시조(始祖)의 사당(廟)을 세웠다.

 

5년(8)에 석탈해(昔脫解)가 뛰어난 인물임을 알고 맏사위로 삼았다,

 

7년(10)에 탈해를 대보(大輔)로 삼아 군국정사(軍國政事)를 맡겼다.

21년(24) 9월에 왕이 돌아가니 사릉원(蛇陵園) 안에 장사지냈다.
차차웅(次次雄)은 김대문(金大問)이 이르기를 방언(邦言)에 무(巫)를 의미하는 말인데,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히 하는 까닭으로 외경하여, 마침내 존장자를 자충(慈充)이라 하였다고 한다.

유리이사금(儒禮泥師今)
재위기간 24 ~ 57 성(性) 朴氏
부(父)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모(母) 운제부인(雲帝夫人)
비(妃) 갈문왕 일지(葛文王 日知)의 딸, 혹은 朴씨로 許婁王의 딸이라고도 함.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노례이사금(弩禮尼師今)이라고 하였다. 남해차차웅이 죽자 덕망이 높은 매제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양보하였으나 탈해가 말하기를 신기대보(神器大寶)는 나와 같이 용렬한 사람이 감당할 바 아니다하고 좌우와 더불어 그를 왕으로 받들어 세우고 호를 이사금(尼師今)이라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이사금은 방언으로 잇금이라 하는데 탈해가 이르기를 지혜가 있는 사람은 이(齒)가 많다하니 떡을 물어 시험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이사금의 의미에 대해서는 이견(異見)이 많다.

즉위 5년(28)에 민속(民俗)이 즐겁고 편안하여 《도솔가(兜率歌)》를 지었다,

 

즉위9년(32)에 6부(六部)의 이름을 고치고 성(姓)을 내려 주었다. 양산부(楊山部)를 양부(梁部)라 하여 그 성을 이씨(李氏), 고허부(高墟部)를 사량부(沙梁部)라 하여 그 성을 최씨(崔氏), 대수부(大樹部)를 점량부(漸梁部)라 하여 그 성을 손씨(孫氏), 우진부(于珍部)를 본피부(本彼部)하여 그 성을 정씨(鄭氏), 가리부(加利部)를 한지부(漢祗部)라 하여 그 성을 배씨(裵氏), 명활부(明活部)를 습비부(習比部)라 하여 그 성을 설씨(薛氏)로 하였다. 또 관(官)을 설치하여 17등급을 두었다.

 제1은 이벌찬(伊伐飡), 제2는 이척찬(伊尺飡), 제3은 잡찬, 제4는 파진찬(波珍飡), 제5는 대아찬(大阿飡), 제6은 아찬(阿飡), 제7은 일길찬(一吉飡), 제8은 사찬(沙飡), 제9는 급벌찬(級伐飡), 제10은 대내마(大奈麻), 제11은 내마(柰麻), 제12는 대사(大舍), 제13은 소사(小舍), 제14는 길사(吉士), 제15는 대오(大烏), 제16은 소오(小烏), 제17은 조위(造位)이다.

 6부를 정한 후 이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왕녀(王女) 두 사람으로 하여금 편을 나누어 가을 7월에 길쌈을 시작, 8월 15일이 되면 다소를 고사(考査)하여 지는 편이 주식(酒食)을 장만하여 이긴 편에 사례하고 가무와 유희를 즐기니 이를 가배(嘉俳)라 한다.

즉위 34년(57) 10월에 왕이 돌아가니 사릉원(蛇陵園) 안에 장사지냈다.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재위기간 57 ~ 80 성(性) 昔氏
부(父) 다파나국(多婆那國)의 왕 모(母) 여국(女國)의 왕녀
비(妃) 아효부인(阿孝夫人)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吐解)의 성은 석씨이며 비는 아효부인이다. 다파나국(多婆那國)의 왕과 여국(女國)의 왕녀 사이에 태어난 알이 궤짝에 담겨 표류하다가 B.C. 19년(박혁거세 39) 아진포(阿珍浦, 포항 迎日로 추정)에서 한 노파가 발견, 기른 것이 후에 탈해(脫解)왕이 되었다는 설화가 전한다.

전왕(前王, 儒理尼師今)이 유언하기를 "선왕(先王, 南解)이 말씀하시기를 아들(子)과 사위(壻)를 막론하고 나이가 많고 어진 사람으로 위(位)를 잇게 하라고 하셨다.

탈해(脫解)는 그 몸이 국척(國戚)에 관련되고 자리가 대신의 자리에 있고 여러 번 공명을 나타냈다.

나의 두 아들은 재주가 탈해에 훨씬 미치지 못하니 나의 뒤를 이어 탈해로 즉위케 하여 나의 유훈(遺訓)을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8년(南解王 5)에 왕의 사위가 되었다.

 

10년 대보(大輔)에 올라 군국정사(軍國政事)를 맡았다.

57년 유리왕이 죽자 선왕(先王) 남해왕의 유언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백제와 자주 충돌했으며, 왜국(倭國)과는 화친했다.

 

9년(A.D. 65), 금성(金城) 서편 시림(始林)에서 김알지(金閼智)를 얻어 시림을 계림(鷄林)이라 개칭하여 국호(國號)로 정했다,

 

11년(A.D. 67)에 주(州)에 주주(州主), 군(郡)에 군주(郡主) 등의 관직을 새로 만들었다.

 

21년(A.D. 77)에 황산진구(黃山津口)에서 가야(伽倻)와 싸워 크게 이겼다.

즉위 24년(A.D. 80) 왕이 돌아가시니 성 북쪽 양정구(壤井丘)에 장사 지냈다.

 

 

제5대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재위기간 80 ~ 112 성(性) 朴氏
부(父)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모(母) 갈문왕 일지(葛文王 日知)의 딸
비(妃) 사성부인(史省夫人, 葛文王 許婁의 딸로 金氏)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의 둘째 아들이다. 또는 유리왕의 동생인 내로(奈老)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처음에는 형인 일성(逸聖)을 왕으로 세우려 하다가 위엄과 현명함이 파사(婆娑)를 따르지 못한다하여 그를 세웠다.

즉위 15년(94)에 가야(伽倻)가 마두성(馬頭城)을 포위 공략하자 아찬 길원(吉元)을 보내 물리쳤다,

 

즉위 22년(101) 2월에 성(城)을 쌓아 월성(月城)이라 이름하고, 7월에 월성으로 이거(移居)하였다.

 

즉위 22년(102)에는 음집벌국(音汁伐國)· 실직곡국(悉直谷國)· 압독국(押督國) 등 세 나라를 합병하여 국세를 넓혔다,

즉위 29년(108) 가야를 공격, 비지국(比只國)·다벌국(多伐國)·초팔국(草八國) 등을 합병하는 등 현군으로서 추앙을 받았다.

즉위 33년(112) 10월에 왕이 돌아가니 사릉원(蛇陵園, 오릉) 안에 장사지냈다.

 

 

 

제6대 지마이사금(祗味尼師今)

재위기간 112 ~ 134 성(性) 朴氏
부(父)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모(母) 사성부인(史省夫人)
비(妃) 애례부인(愛禮夫人, 葛文王 摩帝의 딸로 金氏)

파사이사금의 적자이다.

 

즉위 4년(115) 2월에 가야(伽倻)가 남변(南邊)을 침범하자 7월에 왕이 친히 가야를 치기 위하여 보병(步兵)과 기병(騎兵)을 거느리고 황산하(黃山河, 양산과 김해 사이의 낙동강)를 지나다가 숲에 잠복하고 있던 가야 복병에 패하였다.

 

즉위 5년(116) 재차 출정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즉위 10년(121)에 왜인(倭人)이 동변(東邊)을 침범하였다,

 

즉위12년(123)에는 왜국(倭國)과 수교하였다,

 

즉위14년(125)에 말갈족(靺鞨族)의 침입을 백제의 도움을 받아 격퇴하였다.

즉위23년(134)에 왕이 돌아갔는데 아들이 없었다. 어디에 장사지냈는지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제7대 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
재위기간 134 ~ 154 성(性) 朴氏
부(父)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혹은 葛文王 日知의 아들이라고 함) 모(母) 이간생부인(伊干生夫人)
비(妃) 지소례왕(支所禮王-追尊)의 딸 朴氏

일성이사금은 유리왕의 장자(갈문왕 일지의 아들이라고도 함)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아버지가 노례왕(弩禮王)의 형, 혹은 지마왕(祗摩王)이고, 비(妃)는 □례부인(□禮夫人, 祗摩王의 딸)이며 어머니는 이간생부인(伊干生夫人)이라 적고 있다.

즉위 초 말갈족(靺鞨族)의 침입을 자주 받아 국력의 소모가 심하였다.

즉위 11년(144)에 영(令)을 내려 농(農)은 정치의 근본이요, 식(食)은 백성이 하늘로 여기는 것이라 하고 농사를 장려하여 제방을 수축하고 전지(田地)를 개간하는 등 농정(農政)에 진력하였다. 또 민간에서 금은주옥(金銀珠玉)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즉위 21년(154)에 왕이 돌아갔다.

일성왕(逸聖王)의 장지(葬地)에 관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으며 구전(口傳)에 의하여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제8대 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師今)
재위기간 154 ~ 184 성(性) 朴氏
부(父) 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 모(母) 지소례왕(支所禮王-追尊)의 딸 朴氏
비(妃) 내례부인(內禮夫人, 祗摩王의 딸 朴氏)

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의 장자이다.

 

즉위 4년(157) 처음으로 감물(甘勿)·마산(馬山)의 이현(二縣)을 두었고, 5년(158)에 죽령(竹嶺)을 열었다.

 

12년(165)에 아찬(阿飡) 길선(吉宣)이 모반(謀叛)하였다가 발각되자 백제로 도망하였다. 왕이 글을 보내 돌려보내기를 요구하였지만 백제가 허락지 아니하였다.

 

14년(167) 백제가 신라 서쪽의 두 성을 격파하여 1,000여 명의 백성을 잡아가자 군사 2만으로 백제를 치게하고 왕 또한 기병(騎兵) 8,000기(騎)를 거느리고 한수(漢水)로부터 육박하니, 백제가 크게 두려워하여 포로들을 돌려보내며 화친을 청하였다.

 

 20년(173)에는 왜국(倭國)의 여왕 히미코(卑彌呼)가 사신을 보내 내빙(來聘)하였다.

즉위 31년(184) 3월에 왕이 돌아갔다.

 

 

 

제9대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
재위기간 184 ~ 196 성(性) 昔氏
부(父) 각간 구추(角干 仇鄒, 탈해왕의 아들) 모(母) 지진내례부인(只珍內禮夫人 金氏)

발휘왕(發暉王)이라고도 하며, 석탈해(昔脫解)의 손자이다. 아달라(阿達羅)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왕은 풍운(風雲)을 보고 점을 쳐 미리 수재(水災)·한재(旱災)와 풍(豊)·흉(凶)이 있을 것을 알고, 또 남의 사(邪)·정(正)을 아는 까닭에 사람들이 성인(聖人)이라 하였다.

즉위 2년(185) 처음으로 좌우군주(左右軍主)의 군직(軍職)을 신설하여, 구도(仇道)·구수혜(仇須兮)를 군주로 삼았다. 이어 소문국(召文國, 경북 의성으로 추정)을 정벌하였다,

 

즉위 3년(186)에는 주·군(州郡)을 순행하여 민정을 살폈다. 모산성(母山城)·구양성(狗壤城) ·원산향(圓山鄕) 등에서 백제와 자주 충돌하여, 국경분쟁을 일으켰다.

즉위 13년(196) 4월에 왕이 돌아갔다.

 

 

제10대 내해이사금(奈解尼師今)
재위기간 196 ~ 230 성(性) 昔氏
부(父) 이매(伊買, 벌휴왕의 둘째 아들) 모(母) 내례부인(內禮夫人)
비(妃) 조분왕(助賁王)의 누이 昔氏

내해이사금(奈解尼師今)은 벌휴왕의 손자이다. 전왕(前王) 벌휴(伐休)의 태자 골정(骨正)과 둘째 아들 이매(伊買)가 앞서 죽고 태손(大孫, 嫡孫)이 어려 이매(伊買)의 아들 내해이사금(奈解尼師今)이 즉위하였다.

즉위 14년(209)에 포상팔국(浦上八國)의 침입을 받은 가락국(駕洛國, 加羅로 되어있다.)의 요청으로 구원병을 파견, 이들을 물리쳤는데 이 때 팔국의 장군을 죽이고 포로 약 6,000명을 빼앗아 돌려보내 주었다. 재위기간 중 자주 백제의 침입을 받았다,

 

즉위19년(214) 이벌찬(伊伐飡) 이음(伊音)을 시켜 백제의 사현성(沙峴城)을 공략하였다.

 

즉위23년(218)에는 자신이 지휘하여 장산성(獐山城)에 침입한 백제군을 격퇴하였다,

 

즉위29년(224)에는 이벌찬(伊伐飡) 연진(連珍)에게 명하여 백제군을 봉산(烽山) 아래에서 무찌른 뒤 그곳에 봉산성(烽山城)을 새로 쌓게 하였다. 재위기간 초기에는 백제의 침략으로 국내가 불안하였으나, 뒤에는 도처에서 백제군을 격파하여 신라의 국세를 널리 떨쳤다.

즉위 35년(230) 3월에 왕이 돌아갔다.

 

 

 

제11대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
재위기간 230 ~ 247 성(性) 昔氏
부(父) 갈문왕 골정(葛文王 骨正, 혹은 忽爭) 모(母) 옥모부인(玉帽夫人, 葛文王 仇道의 딸 金氏)
비(妃) 아이혜부인(阿爾兮夫人, 奈解王의 딸)

조분이사금의 성은 석씨이며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의 손자이다. 전왕(前王, 奈解王)이 유언하여 사위 조분(助賁)으로 위(位)를 잇게 한 것이다.

즉위 2년(231) 이찬(伊飡) 우로(于老)를 대장군으로 삼아 감문국(甘文國)을 정복하여 군(郡)으로 만들었다,

 

3년(232)에 왜구가 침입하자 경기(輕騎, 날랜 기병)를 보내어 격퇴했다,

 

7년(236)에는 골벌국(骨伐國)의 왕 아음부(阿音夫)가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였다.

 

11년(240)에 백제가 침입하고, 16년(245)에는 고구려가 침입하였다.

18년(247) 5월에 왕이 돌아갔다.

 

제12대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
재위기간 247 ~ 262 성(性) 昔氏
부(父) 갈문왕 골정(葛文王 骨正, 혹은 忽爭) 모(母) 옥모부인(玉帽夫人, 葛文王 仇道의 딸 金氏)

벌휴왕(伐休王)의 손자(孫子)로 골정(骨正)의 둘째 아들이다. 형인 조분왕(助賁王)이 후사(後嗣)가 없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즉위 3년(249) 왜인이 서불한(舒弗邯) 우로(于老)를 죽였다,

 

9년(255) 9월에 백제가 침입하자 일벌찬(一伐飡) 익종(翊宗)이 이를 괴곡(槐谷) 서쪽에서 맞아 싸우다가 도리어 익종(翊宗)이 적에게 죽었다.

15년(262) 12월 28일에 왕이 갑자기 병으로 돌아갔다.

 

 

 

제13대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
재위기간 262 ~ 284 성(性) 金氏
부(父) 구도(仇道) 모(母) 갈문왕 이칠(葛文王 伊柒)의 딸, 朴氏
비(妃) 광명부인(光明夫人, 助賁王의 딸, 昔氏)

미추이사금의 성은 김씨이며 김알지(金閼智)의 6세손이다. 알지(閼智)는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은 아도(阿道)를 낳고, 아도는 수유(首留)를 낳고 수유는 욱보(郁甫)를 낳고 욱보는 구도(仇道)를 낳았는데 구도는 곧 미추(味鄒)의 아버지이다. 조분왕(助賁王)의 사위로 김씨(金氏)로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 5년(266)과 22년(283)에 백제가 봉산성(烽山城)과 괴곡성(槐谷城)을 각각 공격해왔으나 모두 격퇴하였다.

 

11년(272) 영(令)을 내려 농사에 유해한 모든 것을 죄다 없애 버리게 하는 등 농업을 장려하고 내치(內治)에도 힘썼다.

23년(284) 10월에 왕이 돌아가니 대릉(大陵, 또는 竹長陵이라 함)에 장사지냈다.

 

 

 

 

제14대 유례이사금(儒禮尼師今)
재위기간 284 ~ 298 성(性) 昔氏
부(父)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 모(母) 갈문왕 내음(葛文王 奈音)의 딸, 朴氏

유례이사금[고기(古記)에는 제3대와 제14대 왕의 휘(諱)가 같아 유리(儒理), 혹은 유례(儒禮)라고 하니 어느 쪽이 옳은지 알 수 없다]은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의 장자(長子)로 어머니가 어느날 밤길을 가다가 별빛이 입 속으로 들어와 이로써 아이를 배었는데, 해산하던 밤에 이상한 향기가 집에 가득하였다고 한다.

즉위 3년(286)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다.

 

4년(287)부터 왜인의 침입이 잦아 변경이 매우 시끄러웠다.

 

10년(293)에 사도성(沙道城)을 개축하고 사벌주(沙伐州 : 尙州)의 호민(豪民) 80여 가(家)를 옮겼다.

14년(297)에 이서국(伊西國:淸道)이 금성(金城)을 공격해오므로 신라는 크게 군사를 내어 막아도 능히 물리치지 못하고 있던 차에 갑자기 이상한 군사가 오는데 그 수효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그들은 모두 귀에 댓잎을 꽂고 아군과 더불어 적을 쳐 깨뜨렸다. 그 후 그들이 간 곳을 알지 못하더니 누가 죽장릉(竹長陵, 味鄒王陵)에서 대나무잎(竹葉) 수만 개가 쌓여 있음을 보았다 한다.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三國遺事)》 미추왕(味鄒王)과 죽엽군(竹葉軍)조에도 나타나고 있다.

 

 

 

 

제15대 기림이사금(基臨尼師今)
재위기간 298 ~ 310 성(性) 昔氏
부(父) 이찬 걸숙(伊飡 乞淑) 모(母)  

조분왕(助賁王)의 손자로 기립왕(基立王)이라고도 한다.

즉위 3년(300)에 왜국과 교빙(交聘)하고 그 해 노령자와 빈민들을 구제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10년(307)에 국호(國號)를 다시 신라(新羅)로 하였다고 하였으나 국호를 신라로 정하기는 지증왕(智證王) 4년의 일이다.

13년(310) 6월에 왕이 돌아갔다.

 

 

제16대 흘해이사금(訖解尼師今)
재위기간 310 ~ 356 성(性) 昔氏
부(父) 각간(角干) 우로(于老) 모(母) 명원부인(命元夫人, 조분왕의 딸)

흘해이사금은 내해왕(奈解王)의 손자로 기림왕(基臨王)이 후사(後嗣) 없이 죽자 대신들의 추대로 즉위하였다.

즉위 3년(312)에 왜국 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들의 혼인을 청하므로 아찬(阿飡) 급리(急利)의 딸을 보내주었다.

 

즉위 21년(330) 비로소 벽골지(碧骨池)를 만들었는데 둑 길이가 1,800보(步)였다고 한다. 농사를 장려했다,

 

즉위 35년(344) 일본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했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격분한 일본이 국교를 단절하였다,

 

즉위 37년(346) 풍도(風島)에 이르러 변호(邊戶, 변방의 민가)를 약탈하고 금성(金城)을 포위하자 성문을 굳게 닫고 일본군의 식량이 떨어진 후 이를 격퇴하였다.

즉위 47년(356) 4월에 왕이 돌아갔다.

 

 

제17대 내물이사금(奈勿麻立干)
재위기간 356 ~ 402 성(性) 金氏
부(父) 각간 말구(角干 末仇) 모(母) 휴례부인(休禮夫人) 金氏
비(妃) 보반부인(保反夫人, 味鄒王의 딸) 김씨

내물이사금은 갈문왕 구도(葛文王 仇道)의 손자로, 아버지인 말구(末仇)는 미추왕(味鄒王)의 형제이다. 흘해왕(訖解王)이 돌아가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그 뒤를 이었다.

즉위 9년(364) 4월에 왜병의 큰 무리가 쳐들어오자 대적치 못할까 하여 초우인(草偶人:풀로 만든 허수아비) 수천을 만들어 옷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 토함산(吐含山) 기슭에 열지어 세우고, 용사 1,000명을 따로 부현(斧峴) 동쪽에 매복시켰다가 왜병을 전멸시켰다.

 

18년(373)에는 백제의 독산성주(禿山城主)가 남녀 300명을 이끌고 투항하자 이들을 받아들여 6부(部)에 분거(分居)하고, 이들을 돌려보내라는 백제왕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26년(381) 위두(衛頭)를 전진왕(前秦王) 부견(符堅, 前秦)에 보내어 우의(友誼)를 맺었다.

 

37년(392)에는 고구려(高句麗) 광개토왕(廣開土王)이 사신을 보내니 왕은 고구려가 강성한 까닭으로 이찬(伊飡) 대서지(大西知)의 아들인 실성(實聖)을 보내어 볼모로 삼았다. 다음해 왜적 침입으로 서울이 5일 동안 포위되었으나 이를 물리쳤다,

 

40년(395)에는 말갈(靺鞨)이 침입하자 이를 실직(悉直)에서 격파하였다.

 

42년(397) 7월에 하슬라(何瑟羅, 江陵) 지방에서 큰 흉년이 들자 죄인을 사면하고 백성의 세금을 1년 동안 면제하는 등 내외로 많은 치적을 남겼다. 46년(401) 7월에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갔던 실성이 돌아왔다.

47년(402) 2월에 왕이 돌아갔다.

 

 

 

 

 

제18대 실성이사금(實聖麻立干)
재위기간 402 ~ 417 성(性) 金氏
부(父) 대서지(大西知) 모(母) 이리부인(伊利夫人, 昔登保의 딸)
비(妃) 아류부인(阿留夫人, 味鄒王의 딸)

실주왕(實主王) 또는 실금(實金)이라고도 한다. 내물왕(奈勿王) 37년(392) 고구려에 볼모로 갔다가 내물왕 46년(401) 귀국, 내물왕(奈勿王)이 죽고 태자가 어리므로 추대 받아 즉위하였다.
즉위 원년(402)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일본에 볼모로 갔다,

 

 

즉위4년(405) 명활성(明活城)에 침입한 왜병(倭兵)을 물리쳤다,

 

즉위7년(408)에 대마도(對馬島) 정벌을 계획하였다가 서불한(舒弗邯) 미사품(未斯品)의 건의로 중지하였다.

즉위11년(412)에 내물왕의 아들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 수호(修好)를 맺었다,

즉위16년(417) 내물왕이 자신(實聖)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것을 원망하여 내물왕의 아들 눌지(訥祗)를 고구려 사람을 시켜 죽이려다가 오히려 눌지에게 살해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실성왕의 왕호(王號)가 <실성이사금(實聖尼師金)>으로 되어 있고,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실성마립간(實聖麻立干)>이라 하였다.

 

 

 

 

제19대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
재위기간 417 ~ 458 성(性) 金氏
부(父) 내물왕(奈勿王) 모(母) 보반부인(保反夫人, 味鄒王의 딸 金氏)
비(妃) 아로부인(阿老夫人, 實聖王의 딸 金氏)

눌지마립간은 내물왕의 아들이다. 내물왕 37년(392)에 실성(實聖)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더니, 후에 실성이 돌아와 왕이 되기에 이르러, 앞서 내물왕(奈勿王)이 자기를 외국에 볼모로 보낸 것을 원망하여 내물왕의 아들을 죽여 원수를 갚고자 자기가 고구려에 있을 때 서로 알던 사람을 불러서 그에게 비밀리에 알리기를 "눌지(訥祗)를 보거든 곧 죽여라" 하고, 눌지로 하여금 가서 중로(中路)에서 고구려 사람을 맞게 하였다. 고구려 사람은 눌지의 용모기상이 명랑하고 단아하여 군자의 풍이 있음을 보고 눌지에게 말하기를 "그대 나라의 임금이 나로 하여금 그대를 해치라 하였는데 지금 그대를 보니 차마 해칠 수 없다." 하고 이내 돌아가 버렸다. 눌지는 이를 원망하여 도리어 왕(實聖)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즉위 2년(418)에 고구려에 볼모로 간 동생 복호(卜好)가 제상(提上) 내마(奈麻)와 함께 돌아왔으며, 이 해 가을에는 또 다른 동생 미사흔(未斯欣)이 박제상의 도움으로 도망해 돌아왔다. 그러나 박제상은 일본을 속이고 미사흔을 빼돌린 사실이 발각되어 잡혀 죽었다. 미사흔의 귀국 이후 왜구의 침입이 있었으나 모두 막아냈다.

 

즉위 22년(438) 백성에게 우차(牛車)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즉위 39년(455)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자 백제와 공수동맹(攻守同盟)을 맺고 백제에 원병을 보냈다. 재위 기간에 고구려의 묵호자(墨胡子)가 처음으로 불교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즉위 42년(458)에 왕이 돌아갔다.

 

 

 

 

제20대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
재위기간 458 ~ 479 성(性) 金氏
부(父) 눌지왕(訥祗王) 모(母) 아로부인(阿老夫人, 實聖王의 딸 金氏)
비(妃) 미사흔(未斯欣)의 딸

자비마립간은 눌지왕의 장자로 눌지왕이 돌아가니 왕위에 올랐다.

 

즉위 2년(459) 4월에 왜인이 병선 100여 척으로 동변(東邊)을 습격하고, 월성(月城)을 에워싸니 사면에 시석(矢石, 화살과 돌)이 비오듯하는데 이를 격퇴하였다.

 

6년(463) 2월에도 왜인이 삽량성에 침입하자 왕이 벌지(伐智)와 덕지(德智) 등에게 명하여 대파시켰으며, 7월 대규모 열병식(閱兵式)을 거행하였다. 한편 왜인의 잦은 침범에 대비하여 연변(緣邊)에 두 성을 쌓았다.

10년(467)에는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전함(戰艦)을 수리하게 하였고,

 

13년(470)에 삼년산성(三年山城)을 쌓았다.

 

18년(475) 명활성(明活城)에 이거(移居)하였으며, 476∼477년 계속하여 왜병이 침입하였으나 매번 이를 격퇴하였다.

22년(479) 2월에 왕이 돌아갔다.

 

 

 

 

제21대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재위기간 479 ~ 500 성(性) 金氏
부(父) 자비왕(慈悲王) 모(母) 미사흔(未斯欣)의 딸 金氏
비(妃) 선혜부인(善兮夫人, 乃宿 伊伐飡의 딸)

자비왕(慈悲王)의 장자로 일명 조지(照知)·비처(毗處)라고도 한다. 어릴 때 효행이 있고, 또 스스로 겸공(謙恭)한 태도를 가졌다.

즉위 2년(480)에 말갈(靺鞨)이 신라의 북변(北邊)을 침공하고,

 

3년(481)에는 고구려와 말갈이 연합하여 북변(北邊)을 침공하여 호명(狐鳴) 등 7성(城)을 취하므로 백제(百濟)와 가야(伽倻)의 구원병과 더불어 막았다.

 

4년(482)에는 왜인이 해변을 침범하였다.

 

6년(484) 고구려가 다시 침공해왔으나 백제와 연합하여 이를 모산성(母山城)에서 격파하였으며,

 

8년(486)에도 왜인이 변경을 침입하였다. 이후에 백제와는 화평(和平)을 유지하여,

 

9년(487) 신궁(神宮)을 내을(奈乙)에 세웠고, 각 지방에 수역을 설치하였으며, 이듬해 왕이 월성(月城)으로 이거(移居)하였다.

 

12년(490)에 처음으로 시장(市場)을 개설하여 사방의 화물을 통하게 하였다.

 

15년(493)에 이벌찬(伊伐飡) 비지(比智)의 딸을 백제왕 모대(牟大, 東城王)에게 보냈다.

16년(494)에 장군 실죽(實竹) 등이 살수(薩水)의 들에서 고구려와 싸워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견아성(犬牙城)을 지키니 고구려 군사가 이를 포위하였다. 백제왕 모대(牟大, 東城王)가 신라군을 도와 고구려를 물리쳤다.

 

17년(495)에는 고구려가 백제의 치양성(雉壤城)을 포위 공격하자 장군 덕지(德智)를 보내 구원케 했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이듬해 고구려가 우산성(牛山城)을 침공하자 신라는 고구려군을 이하(泥河)에서 격파하였다.

22년(500)에 왕이 날이군(捺已郡)에 행행(行幸)하였는데, 군민 파로(波路)란 자의 딸이 있어 이름이 벽화(碧花)라 하고 나이는 16세로 국색(國色)이었다. 그 아비가 비단옷을 입혀 왕에게 바쳤다. 왕이 거두지 아니하다가 환궁 후에 연모하여 재삼 미행(微行)하여 여자를 가까이하니 백성들이 왕을 나무랐다. 왕이 크게 부끄러이 여겨 벽화를 맞아 별실에 두고 아들 하나를 낳기까지 하였다.
이 해(22년, 500) 11월에 왕이 돌아갔다.

 

 

 

 

제22대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재위기간 500 ~ 514 성(性) 金氏
부(父) 갈문왕(葛文王) 습보(習寶) 모(母) 조생부인(鳥生夫人, 訥祗王의 딸 金氏)
비(妃) 연제부인(延帝夫人, 伊飡 登欣의 딸 朴氏) 휘(諱) 지대로(智大路:智度路)

지증왕의 휘는 지대로(智大路) 혹은 지도로(智度路), 지철로(智哲老)라고도 한다. 내물왕(奈勿王)의 증손(曾孫)으로 전왕(炤知王)이 후사(後嗣)가 없이 돌아가자 위(位)를 이었다. 이때 왕의 나이가 64세였다.

즉위 3년(502)에 영(令)을 내려 순장(殉葬)을 금하였다. 전에는 국왕이 돌아가면 남녀 각 5명씩 순장(旬葬)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금지하였다. 또한 농사를 권장하고, 소를 밭 가는데 사용(牛耕法)하였다.

 

4년(504) 국호(國號)를 '신라(新羅)'로 개정하고, 왕을 뜻하는 마립간(麻立干)의 칭호를 폐지하고 정식으로 왕이라고 칭하게 하는 등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다. 국호 신라는 신(新)은 덕업(德業)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요, 라(羅)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다.

 

5년(504) 상복(喪服)제도를 제정하였고, 다음해에 주(州)· 군(郡)· 현(縣)을 정하고, 실직주(悉直州)에는 군주(軍主)를 두었다.

 

13년(512)에 하슬라주(何瑟羅主) 이사부(異斯夫)가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于山國)을 공취(攻取)하였다.

15년(514)에 왕이 돌아갔다. 시호(諡號)를 지증(智證)이라 하니 신라의 시법(諡法)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제23대 법흥왕(法興王)

재위기간 514 ~ 540 성(性) 金氏
부(父) 지증왕(智證王) 모(母) 연제부인(延帝夫人, 伊飡 登欣의 딸 朴氏)
비(妃) 보도부인(保刀夫人) 朴氏 휘(諱) 원종(原宗)

법흥왕의 휘는 원종(原宗)이며 지증왕의 장자이다. 왕은 신장(身長)이 7척(尺, 약 210cm)이고, 사람됨이 관후하고 사람을 사랑하였다.

즉위 4년(517)에 병부(兵部)를 설치하였다.

 

3년(516)에 처음으로 직관지(職官志)  두었다 하였다.

 

7년(520)에 율령(律令)을 반시(頒示)하고 백관(百官)의 공복(公服)을 제정하였다,

 

8년(521) 양(梁)나라에 사자를 보내 국교를 열었다.

 

9년(522) 가야국왕(伽倻國王)이 청혼하자,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누이를 출가시켰다.

 

11년(524)에 남부지방을 순행(巡行)하고 국토를 개척하여 군사당주(軍師幢主)를 두었다,

 

12년(525) 대아찬(大阿飡) 이등(伊登)으로 사벌주(沙伐州)의 군주(軍主)를 삼았다.

15년(528) 처음으로 불법(佛法)을 공인하였는데, 이에 앞서 눌지왕(訥祗王) 때에 묵호자(墨胡子)란 중이 고구려에서 와 불법을 전파하였으나 군신들이 믿지 아니하였다. 근신(近臣) 이차돈(異次頓, 혹은 處道라 함)의 순교(殉敎)로 인해 불교가 공인되었다.

 

16년(529)에 영(令)을 내려 살생(殺生)을 금하였다.

 

18년(531) 이찬(伊飡) 철부(哲夫)로 상대등(上大等)을 삼아 국사(國事)를 총지(總知)케 하였다. 상대등(上大等)이란 벼슬은 이 때 처음 시작되었다.

 

19년(532)에 금관(金官) 국주(國主) 김구해(金仇亥)가 신라에 항복해 왔다.

 

23년(536) 처음으로 연호를 칭하여 건원(建元) 원년이라 하였다.

27년(540) 왕이 돌아가니 시호(諡號)를 법흥(法興)이라 하고 애공사(哀公寺) 북봉(北峰)에 장사하였다.

 

 

 

 

 

제24대 진흥왕(眞興王)
재위기간 540 ~ 576 성(性) 金氏
부(父) 갈문왕 입종(葛文王 立宗) 모(母) 식도부인(息道夫人, 法興王의 딸)
비(妃) 사도부인(思道夫人, 朴氏) 휘(諱) 삼맥종 혹은 심맥부(深麥夫)
법호(法號) 법운(法雲)

진흥왕의 휘는 삼맥종이다. 지증왕(智證王)의 손자이며, 법흥왕(法興王)의 아우 갈문왕 입종의 아들이다. 법흥왕의 뒤를 이어 7세에 즉위할 때 왕태후(王太后), 즉 법흥왕비(法興王妃)가 섭정하였다.

즉위 2년(541) 이사부(異斯夫)를 병부령(兵部令)으로 삼아 내외(內外)의 병마사(兵馬事)를 맡게 하였다.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므로 허락하였다.

 

5년(544) 2월에 흥륜사(興輪寺)가 준성되었다. 3월에는 누구에게나 출가(出家)하여 중이 되는 것을 하락하였다.

 

6년(545)에 이사부(異斯夫)의 청을 받아들여 대아찬(大阿飡) 거칠부(居柒夫) 등에게 명하여 문사(文士)를 모아 국사(國史)를 꾸미게 했다.

12년(551) 정월에 연호(年號)를 고쳐 개국(開國)이라 하였다. 그해 3월에는 우륵(于勒)과 그의 제자 이문(尼文)을 불러들여 음악 연주를 들었다. 우륵은 가야국(伽倻國) 사람으로 가실왕(嘉悉王)이 12개월의 율을 본뜬 십이현금(十二弦琴)을 만들어 우륵으로 하여금 악곡(樂曲)을 제작케 하였는데 그 나라가 어지럽게 되자 우륵이 악기를 가지고 신라로 들어왔는데 그 악기의 이름이 가야금이다.

14년(553)에 소사(所司)에게 명하여 월성 동쪽에 신궁(新宮)을 짓게 했는데 그 곳에서 황룡(黃龍)이 나타나므로 왕이 수상히 여겨 이를 불사(佛寺)로 고치고 절 이름을 황룡(黃龍)이라 사(賜)하였다.

 

15년(554) 7월에 명활성(明活城)을 수축(修築)하였다. 이 해에 백제왕 명농(明濃, 聖王)이 가량(加良)과 더불어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하므로 장수를 보내 싸웠으나 이득을 보지 못하자 김무력(金武力)이 주병(州兵)을 이끌고 교전함에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우도도(高于都刀)가 갑자기 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16년(555) 10월에 북한산에 순행하여 강역을 정하였다. 23년(562) 이사부(異斯夫)와 사다함(斯多含)의 공으로 가야(伽倻)를 평정하고, 이어 주위의 침입에 대비, 한강 유역에 주군(州郡)과 강력한 군단을 설치하고, 이들 새로 개척한 땅에 순수비(巡狩碑)를 세웠는데, 창녕(昌寧) ·북한산 ·황초령(黃草嶺) ·마운령(磨雲嶺) 등의 비가 지금까지 전한다.

26년(565) 중국 진(陳)나라에서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觀)을 보내면서 아울러 불교의 경론(經論) 1,700여 권을 보내었다.

 

27년(566) 지원(祇園)·실제(實際)의 두 절을 지었으며, 같은 해에 황룡사(皇龍寺)도 준공했다.

 

29년(568)에 연호를 대창(大昌)이라 하였다가

 

33년(572)에 다시 홍제(鴻濟)로 고쳤다. 같은 해(572)에 전사한 병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팔관연회(八關筵會)를 개최하였다.

 

35년(574) 3월에 황룡사의 장륙상(丈六像)을 주성(鑄成)하니, 구리의 중량이 35,007근, 도금의 중량이 10,198푼이었다. 이것은 같은 절의 구층탑, 진평왕(眞平王)의 옥대(玉帶)와 함께 신라 삼보의 하나로 꼽힌다.

37년(576) 봄에 비로소 원화(源花)를 받들게 되었다. 처음에는 인재(人材)를 알지 못함을 유감으로 여겨 무리들 중에서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을 가렸(擇)으나 서로 시기하여 준정(俊貞)이 남모(南毛)를 자기 집으로 유인하여 술을 먹인 후 강물에 던져 죽여 버렸다. 이로 인해 준정도 사형에 처하게 되니 무리들은 화목을 잃어 해산되었다. 나라에서는 다시 아름다운 남자들을 뽑아 화랑(花郞)이라 하여 받들게 하니 무리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이 화랑제도의 창시는 신라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되었다. 진흥왕 때에 이르러서는 신라가 군사적 ·문화적으로 실력을 길러 장차 삼국을 통일하는 기반을 마련한 시기이다.
이해(576) 8월에 왕이 돌아가시니

시호(諡號)를 진흥(眞興)이라 하고 애공사(哀公寺) 북봉에 장사지냈다.
왕이 어려서 즉위하여 일심으로 불교를 받들어 말년에는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고 스스로 법운(法雲)이라 자칭하였다. 왕비도 그를 본받아 여승이 되어 영흥사(永興寺)에 거주하다가 돌아가니 나라사람들이 예로써 장사하였다.

 

 

 

제25대 진지왕(眞智王)
재위기간 576 ~ 579 성(性) 金氏
부(父) 진흥왕(眞興王) 모(母) 사도부인(思道夫人, 朴氏)
비(妃) 지도부인(知道夫人, 烏公의 딸) 휘(諱) 사륜(舍輪)·금륜(金輪)
진흥왕(眞興王)의 둘째 아들이다. 태자(太子)가 일찍 죽었으므로 진지(眞智)가 즉위한 것이다. 백제와 불화(不和)하여 자주 침공을 받았으나, 내리서성(內利西城) 등을 쌓아 방비를 굳게 하였다. 상대등(上大等) 거칠부(居柒夫)에게 국정을 맡겼으며, 중국의 진(陳)나라와 수교하여 화친을 도모하였다.

4년(579) 7월에 왕이 돌아가시니 시호(諡號)를 진지(眞智)라 하고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지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도화녀(桃花女)와 비형랑(鼻荊郞)條에 의하면 나라를 다스린지 4년에 주색에 빠져 음란하고 정사가 어지럽자 나라사람들은 그를 폐위시켰다고 적고 있다.

 

 

 

 

제26대 진평왕(眞平王)

재위기간 579 ~ 632 성(性) 金氏
부(父) 동륜(銅輪) 모(母) 만호부인(萬呼夫人, 葛文王 立宗의 딸)
비(妃) 마야부인(摩耶夫人, 葛文王 福勝의 딸) 휘(諱) 백정(伯淨, 白淨)

진평왕의 휘는 백정(白淨)이며 진흥왕의 태자 동륜(銅輪)의 아들이다.

 

즉위 6년(584년)에 연호(年號)를 건복(建福)이라 고쳤다.

 

11년(589)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진(陳)나라에 가서 불법(佛法)을 구하였다,

 

13년(591) 7월에 남산성(南山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2,854보(步)였으며, 15년(593)에는 명활성(明活城)과 서형산성(西兄山城)을 개축하였는데 그 둘레가 각각 3,000보와 2,000보였다.

618년 수나라가 망하자

 

43년(621) 당(唐)나라와 수교하여 고구려의 침공을 꾀했다. 대내적으로는 위화부(位和府)·선부서(船府署)·예부(禮部) 등의 관청을 신설하고 내정의 충실을 도모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원광(圓光)·담육(曇育) 등 명승을 중국에 보내어 수도하게 하는 등 불교를 진흥시키고 왕실을 튼튼히 하는 데도 힘썼다.

51년(629) 8월에 왕이 대장군(大將軍) 용춘(龍春)·서현(舒玄)과 유신(庾信)을 보내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침공케 하니, 고구려 사람들이 성에서 나와 진을 벌이니 군세(軍勢)가 매우 왕성하였다. 이 때 유신이 말에 올라 적진으로 곧장 달려 세 번 들어갔다가 세번 돌아나오는데 그 때마다 적장(敵將)을 베고 혹은 적기를 빼앗아 오므로 군사가 승세를 타서 북을 치고 고함지르며 진격하여 성을 항복시켰다.

54년(632) 정월에 왕이 돌아가니 시호(諡號)를 진평(眞平)이라 하고 한지(漢只)에 장사하였다.

 

 

 

 

제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기간 632 ~ 647 성(性) 金氏
부(父) 진평왕(眞平王) 모(母) 마야부인(摩耶夫人) 김씨
휘(諱) 덕만(德曼) 호(號) 성조황고(聖祖皇姑)

선덕왕의 휘는 덕만(德曼)이며 진평왕의 장녀이다. 진평왕(眞平王)이 후사가 없이 죽자 백성들의 옹립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즉위 3년(634)에 연호(年號)를 인평(仁平)이라 고쳤으며 분황사(芬皇寺)가 창건되었다.

 

4년(635) 당나라에 지절사(持節使)를 보내어 주국낙랑군공신라왕(柱國樂浪郡公新羅王)에 책봉되었다. 영묘사(靈廟寺)가 완성되었다.

5년 5월(三國遺事에는 겨울이라 함)에 대궐 서쪽 옥문지에(玉門池, 三國遺事에는 "靈廟寺玉門池"라 하였다.) 개구리 떼가 모여들어 왕이 말하기를 "개구리는 군사의 형상이므로 적이 침입한 것이다. 서남변에도 옥문곡(玉門谷, 三國遺事에는 "富山下 女根谷"이라 하였다.)이 있다 하니 혹 백제군이 그곳에 들어왔는지 알 수 없다." 하고 알천(閼川)과 필탄(弼呑)에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가서 수탐케 했는데, 과연 백제 장군 우소(于召)가 독산성(獨山城)을 침입하려고 군사 500을 이끌고 그곳에 잠복하여 있으므로 알천이 이를 잡아 죽였다.

11년(642) 8월에는 백제 장군 윤충(允忠)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대야성(大耶城)을 쳐 함락시키니, 도독(都督) 이찬 품석(伊飡 品釋)과 사지(舍知) 죽죽(竹竹), 용석(龍石) 등이 전사하였다. 이 때 도독 품석의 아내도 죽었는데 그는 김춘추(金春秋)의 딸이었다. 춘추가 그 소식을 듣고 기둥에 의지해 서서 종일토록 눈을 깜박이지 않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지 못했다.

14년(645) 정월에 김유신(金庾信)이 백제를 치고 돌아와 아직 왕을 뵙지 못한 때에 백제의 대군이 또 변경을 침범하니 왕이 그에게 명하여 막게 하였다. 유신이 적을 물리치고 아직 집에 돌아오지 못한 즈음에 또 백제가 침범한다는 급보가 있어 집에 들르지 못하고 서쪽으로 떠날 때 자기 집 앞을 지나게 되었다.

집안의 남녀들이 바라보고 눈물을 흘렸으나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갔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열전(列傳) 김유신(金庾信)조에는 전장에 나가는 길에 집 앞을 지나면서도 돌아보지도 않고 50보쯤 가다가 말을 멈추고, 장(漿)물을 집에서 가져오게 하여 마시며 "우리집 물이 아직도 예전 맛이 있다."고 했다.

16년(647) 정월에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이 서로 말하기를 왕은 정치를 잘 못한다 하고 모반하여 군사를 일으켰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이 해(16년, 647) 8월에 왕이 돌아가니 시호(諡號)를 선덕(善德)이라 하고 낭산(狼山)에 장사하였다.

여왕은 내정에서는 선정(善政)을 베풀어 민생을 향상시켰고 구휼사업에 힘썼으며 당나라의 문화를 수입하였다. 자장법사(慈藏法師)를 당에 보내어 불법(佛法)을 수입하였으며, 첨성대(瞻星臺)·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을 건립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선덕왕(善德王) 지기삼사(知幾三事)조에는 정관(貞觀, 당 태종의 연호) 6년 임진(壬辰, 632)에 즉위하여 16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에 미리 안 것이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당(唐) 태종(太宗)이 붉은빛, 자주빛, 흰빛의 세 가지 색으로 그린 모란과 씨를 서 되 보내 왔는데 왕이 그림을 보고 말하기를 "이 꽃은 필경 향기가 없을 것이다."하고 뜰에 심었는데 꽃이 질 때까지 과연 향기가 없었다.
둘째는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 겨울인데도 개구리들이 많이 모여들어 3~4일 동안 울어댔다. 왕이 알천(閼川)과 필탄(弼呑)에게 명하여 서교(西郊)로 가서 여근곡(女根谷)이 어딘지 찾아가면 반드시 적병이 있을 것이니 엄습해서 모두 죽이라고 했다. 두 각간(角干)이 명을 받들어 엄습하니 부산(富山) 아래 여근곡(女根谷)이 있고 백제군이 거기에 숨어 있으므로 모두 잡아 죽였다.
셋째는 왕이 아무 병도 없을 때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나는 아무 해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에 장사지내도록 하라."하였는데 신하들이 도리천이 어딘지를 몰랐다. 왕이 낭산(狼山) 남쪽이 도리천이라 일러주었는데 왕이 죽고 10여 년이 지난 뒤 능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가 세워지므로 불경(佛經)에 이르기를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했으니 그제야 대왕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 수가 있었다.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
재위기간 647 ~ 654 성(性) 金氏
부(父) 갈문왕 국반(葛文王 國飯) 모(母) 월명부인(月明夫人, 朴氏)
휘(諱) 승만(勝曼)

진덕왕의 휘는 승만(勝曼)이며 아버지 갈문왕 국반(葛文王 國飯)은 진평왕(眞平王)의 동생이다. 승만(勝曼)은 자질이 고우며 키가 7척이나 되어 손을 늘어뜨리면 무릎 아래까지 닿았다.

즉위 원년에 비담(毗曇)을 죽이고 모반에 연루된 자 30명을 죽였다. 연호(年號)를 태화(太和)라 하였다.

 

2년(648)에 김춘추(金春秋)를 중국 당(唐)나라에 보내어 백제 정벌의 원군을 요청하였다,

 

3년(649) 당나라를 본떠 중국의 의관을 입기 시작하였다.

 

4년(650) 법민(法敏, 김춘추의 아들. 文武王)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여왕이 친히 지은 《태평송(太平頌)》을 바치고, 같은 해에 당나라 연호인 영휘(永徽)를 쓰기 시작하였다,

 

5년(651)에 김춘추의 둘째아들 파진찬(波珍飡) 인문(仁問)을 당나라에 보내어 친교를 더욱 돈독하게 하였다. 한편 국내적으로는 명장 김유신(金庾信)으로 하여금 국력을 튼튼히 하여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8년(654) 3월에 왕이 돌아가니 시호(諡號)를 진덕(眞德)이라 하고 사량부(沙梁部)에 장사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