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역대왕계

▣ 신라왕계 중대 제29대 ~ 제36대 제29대 태종무열왕 제30대 문무왕 제31

오늘의 쉼터 2008. 5. 5. 16:13

 

  상대 중대 하대
3시기 구분은 '삼국사기'에 의함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재위기간 654 ~ 661 성(性) 金氏
부(父) 이찬 용춘(伊飡 龍春, 또는 龍樹) 모(母) 천명부인(天明夫人, 眞平王의 딸 金氏)
비(妃) 문명부인(文明夫人, 舒玄의 딸, 金庾信의 동생) 휘(諱) 춘추(春秋)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휘는 춘추(春秋)이며 진지왕의 아들 이찬 용수(龍樹)의 아들이다. 진덕왕(眞德王)이 돌아가자 군신들이 알천(閼川) 이찬(伊飡)에게 섭정을 청하였더니 알천이 말하기를 "나는 늙고 덕행이 없으니 덕망이 높은 춘추공(春秋公)이야말로 제세의 영웅이라 할 수 있다."하니 군신들이 춘추(春秋)를 추대하여 왕위에 올랐는데 진골(眞骨)의 신분으로 군신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함으로써 신라 최초의 진골출신 왕이 되었다.

642년(善德女王 11) 백제의 침입으로 대야성(大耶城)이 함락되고 사위인 성주(城主) 품석(品釋)이 죽음을 당하자, 고구려와 힘을 합하여 백제를 치고자 연개소문(淵蓋蘇文)을 만났으나, 국경의 영토문제로 감금당했다가 돌아왔다. 웅변에 능하고 외교적 수완이 뛰어나서 사신으로 일본과 당(唐)나라에 다녀왔으며, 특히 당나라에는 여러 차례 왕래하면서 외교적 성과를 거두고 군사원조까지 약속 받아 삼국통일의 토대를 닦았다.

즉위 원년(654)에 이방부령(理方府令) 양수(良守)에게 명하여 율령(律令)을 상정(詳定)하게 하고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 조를 제정하여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당나라와 계속 친교를 맺어 깊은 신뢰를 얻고 개부의동삼사신라왕(開府儀同三司新羅王)에 책봉되었다.

 

7년(660)에 당나라에 원병을 청하여 당나라가 백제 정벌의 대군을 파견하자, 왕자 법민(法敏, 文武王)과 김유신(金庾信) 등에게 5만의 군사를 주어 당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8년(661) 백제 부흥군(復興軍)을 격파하고, 이어 고구려 정벌의 군사를 일으키다가  6월에 왕이 돌아갔다. 시호(諡號)를 무열(武烈)이라 하고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하고 묘호(廟號)를 올려 태종(太宗)이라 하였다.

그의 재위기간에 신라 왕권의 전제화(專制化)가 확립되었고, 또한 크게 성장한 귀족세력을 중심으로 당나라의 율령제도(律令制度)를 모방한 관료체계가 정비되었으며, 김유신의 매부(妹夫)가 됨으로써 경주김씨 왕실과 김해김씨와의 결합이 이루어졌고, 그의 직계자손으로 8대가 계속됨으로써 120년 동안 정치의 황금기를 맞게 되었다.
신문왕(神文王) 12년(692)에 당(唐) 중종(中宗)이 사신을 보내 조칙을 전하여 말하기를 "우리 태종문황제(太宗文皇帝)의 신공성덕(神功聖德)이 천고에 뛰어나 붕어(崩御)하던 날 묘호(廟號)를 태종(太宗)이라 했는데, 그대 나라 선왕(先王) 김춘추(金春秋)가 묘호를 같이 한 것은 매우 참람(僭濫, 함부로 어긋난)한 일이니 급히 고치라"하였다.

신문왕이 군신들과 논의하여 말하기를 "소국(小國)의 선왕 춘추의 시호(諡號)가 우연히 성조(聖祖)의 묘호(廟號)와 서로 부딪치게 되었으나 생각하면 선왕 춘추도 자못 현덕이 있고 공업이 많지 않다고 할 수 없다. 신민이 애모(哀慕)에 견디지 못하여 호(號)가 성조의 그것과 서로 저촉됨을 깨닫지 못하였다."하니 그 후에 다시 별칙(別勅)이 없었다.

 

 

 

 

 

제30대 문무왕(文武王)
재위기간 661 ~ 681 성(性) 金氏
부(父)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모(母) 문명부인(文明夫人, 舒玄의 딸, 金庾信의 동생)
비(妃) 자의왕후(慈儀王后, 波珍飡 善品의 딸) 휘(諱) 법민(法敏)

문무왕(文武王)의 휘(諱)는 법민(法敏)이며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맏아들이다. 어머니인 문명왕후(文明王后)는 김유신(金庾信)의 누이로 그 형(姉, 寶姬, 兒名은 阿海)이 꿈에 서형산정(西兄山頂)에 올라앉아 오줌을 누니 서울 안에 가득 찼다. 꿈을 깨어 아우(文姬, 兒名은 阿之)에게 이야기를 하였더니 아우는 언니의 꿈을 비단치마로 값을 치르고 샀다. 며칠 후 유신(庾信)이 춘추공(春秋公, 武烈王)과 공을 차다가 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려 집으로 데려와 주연을 베풀고 조용히 보희(寶姬)를 불러 춘추공의 옷고름을 꿰매게 하였다. 보희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오지 않고(三國遺事에는 사소한 일로 귀공자를 가까이 할 수 없다하여 그 자리에 나오길 사양했다.) 그 아우가 나와서 옷고름을 다는데, 그의 수수한 단장과 날씬한 옷맵시에 어여쁜 얼굴빛은 사람을 비추었다. 춘추가 보고 기뻐하여 이에 사내아이를 낳으니 이가 바로 법민(法敏)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문희가 옷고름을 달아 준 이후로 춘추공은 아지(阿之, 文姬)와 관계하고 이로부터 자주 왕래하였다. 유신은 누이가 임신한 것을 알고 불태워 죽인다고 온 나라에 소문을 내고, 선덕여왕(善德女王)이 남산에 거동한 틈을 타서 마당 한 가운데 나무를 쌓아 놓고 불을 질렀다. 연기가 나자 선덕여왕이 연유를 물으니 남편도 없이 임신한 문희를 유신이 불로 태워 죽인다고 아뢰니 왕이 그게 누구 소행이냐고 물었다. 이때 춘추공은 임금을 모시고 앞에 있다가 얼굴빛이 몹시 변하였다. 왕이 그것은 네가 한 짓이니 가서 구하라 하니 급히 말을 달려 왕명을 전해 죽이지 못하게 하고 그 후에 혼례를 올렸다.

법민(法敏)은 외모가 뛰어나고 머리가 총명하며, 지략(智略)이 많았다.

 

650년(眞德女王 4) 왕명으로 당(唐)나라에 가서 대부경(大府卿)이란 벼슬을 받았고,

 

654년(太宗武烈王 1) 파진찬(波珍飡)으로서 병부령(兵部令)이 되었다.

 

태종무열왕 2년(655)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660년 나·당(羅唐)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김유신(金庾信)과 함께 5만 군대를 거느리고 분전, 백제를 격멸하였다.

원년 661년 태종무열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고,

 

2년(662)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쳤으나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실패하였다.

 

3년(663) 당(唐)이 우리나라를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로 삼고 왕을 계림대도독(鷄林大都督)이라 하였다. 백제의 옛 장군 복신(福信)·부도(浮圖)·도침(道琛) 등이 옛 왕자 부여풍을 영립하여 백제 부흥을 시도하였으나 김유신 등으로 하여금 이를 저지하였다.

 

4년(664) 부인들의 의복을 당제(唐制)에 따르게 하였고, 또 당악(唐樂)을 수입하였다.

 

8년(668)에 다시 나 ·당연합군을 형성하여 고구려를 쳤는데, 왕의 동생 인문(仁問)은 당나라의 이적(李勣)과 합세하여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9월 21일 평양성을 에워싸니 고구려왕(寶藏王)이 항복하였다. 10월 22일에 김유신(金庾信)에게 태대각간(太大角干)의 벼슬을 내렸다.

 

13년(673) 7월 1일에 김유신(金庾信)이 죽었다.

 

14년(674) 2월에 궁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금(珍禽)과 기수(奇獸)를 길렀다.
당나라가 고구려의 옛 땅은 물론 백제의 옛 땅까지도 자국 영토로 삼으려 하자, 문무왕은 김유신에게 명하여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게 하였다. 고구려 유민(遺民)의 부흥운동을 원조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당나라에 대항 하였다, 이해부터(674) 당나라의 역술(曆術)을 본떠 신력(新曆)을 제정하여 사용하였다,

 

15년(675) 동인(銅印)을 만들어 중앙 백관(百官)과 지방의 주군(州郡)에서 사용하도록 하였다.

 

16년(676) 의상(義湘)으로 하여금 지금의 경북 영주 부석면(浮石面)에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게 하였다.

17년(677) 그 세력을 몰아내고 대동강·원산만 이남의 땅을 차지하는, 삼국통일(三國統一)의 대업(大業)을 완수하였다.

이때부터 한반도에 단일국가가 등장하였다. 문무왕은 당나라 문화를 수입하는 데 힘을 기울여다,

21년(681) 7월에 왕이 돌아가시니 시호(諡號)를 문무(文武)라 하였다. 유언에 의하여 동해구(東海口) 대석상(大石上)에 장사지냈다.

 

 

 

제31대 신문왕(神文王)
재위기간 681 ~ 692 성(性) 金氏
부(父) 문무왕(文武王) 모(母) 자의왕후(慈儀王后, 波珍飡 善品의 딸)
비(妃) 소판(蘇判) 김흠돌(金欽突)의 딸 金氏 차비(次妃) 신목왕후(神穆王后, 一吉飡 欽運의 딸 金氏)
휘(諱) 정명(政明) ·명지(明之) 자(字) 일초(日膳)

신문왕(神文王)의 휘(諱)는 정명(政明)이며 문무왕(文武王)의 장자이다. 665년(문무왕 5) 태자에 책봉되었다. 왕이 태자(太子)로 있을 때 비(妃)로 소판(蘇判) 김흠돌(金欽突)의 딸 김씨를 맞아들였는데 오래도록 아들이 없고 또 비(妃)의 아버지의 난(亂)에 죄를 입어 궁에서 내쫓겼다.

즉위 원년(681)에 김흠돌(金欽突)과 파진찬(波珍飡) 흥원(興元), 그리고 대아찬(大阿飡) 진공(眞功) 등이 모반하다 복주(伏誅)되었다. 비 김씨도 폐위시켰다.

 

2년(682)에 위화부령(位和府令) 2명을 두어 관리를 선거(選擧)하는 사무를 맡게 하고 6월에 국학(國學, 太學)을 창설(職官志에 의하면 眞德女王 5년에 이미 國學이 설치되었다고 하며 神文王 때의 설치는 國學의 개편으로 보인다)하여 학문을 장려하였다,

 

3년(683)에 일길찬(一吉飡) 김흠운(金欽運)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또 보덕왕(報德王) 안승(安勝)을 소판(蘇判)으로 기용하여 김(金)씨 성(姓)을 하사하였다,

 

4년(684) 안승의 족자(族子) 대문(大文)이 금마저(金馬渚)에서 모반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하고 그 땅을 금마군(金馬郡)으로 하고 고구려 유민들을 분산, 거주하게 하였다. 봉성사(奉聖寺)와 망덕사(望德寺)가 이때에 낙성되었다.

5년(685)에 9주를 정비하고 지방제도를 재정비하였으며,(九州 : 溟州, 良州, 朔州, 漢州, 尙州, 康州, 熊州, 武州, 全州. 五小京 : 南原京, 北原京, 西原京, 中原京, 金官京 ; 景德王 편제 기준) 9년(689)에는 녹읍(祿邑, 祿俸으로서 관리에게 주는 토지)을 폐지하고 조(租)를 주기로 개정함으로써 귀족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 강화를 도모하였다. 이 해에 왕이 서울을 달구벌(達句伐)로 옮기려 하였으나 실현시키지 못했다. 이 밖에도 일본과 당(唐)나라에 사신이 빈번하게 내왕하였고 문화의 흥륭(興隆)정책을 도모하여 설총(薛聰)과 강수(强首)와 같은 대학자가 배출되는 등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12년(692) 7월에 왕이 돌아가시니 시호(諡號)를 신문(神文)이라 하고 낭산(狼山) 동쪽에 장사지냈다.

 

 

 

제32대 효소왕(孝昭王)

재위기간 692 ~ 702 성(性) 金氏
부(父) 신문왕(神文王) 모(母) 신목왕후(神穆王后, 一吉飡 欽運의 딸 金氏)
휘(諱) 이홍(理洪)·이공(理恭)

효소왕(孝昭王)의 휘(諱)는 이홍(李洪)이며, 신문왕(神文王)의 태자(太子)이다.

 

즉위하자 당(唐)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로부터 신라보국대장군행좌표도위대장군계림주도독(新羅輔國大將軍 行左豹韜尉大將軍 鷄林州都督)에 봉해졌다. 법률(法律)을 관장하던 좌우이방부(左右理方府)의 명칭이 왕의 휘(諱)를 범하므로 좌우의방부(左右議方府)로 개칭하였다.

3년(694)에 김인문(金仁問, 武烈王의 次男)이 당(唐)에서 죽으니 그의 나이 66세였다. 모든 관제를 정비하고, 당(唐)·일본(日本) 등과 수교하였으며, 송악(松嶽)·우잠(牛岑)의 두 성(城)을 축조하였다,

 

4년(695)에 서시(西市)와 남시(南市)를 설치하였다. 입자월(立子月, 음력 11월)을 정월이라 정하였다가

 

9년(700)에 다시 입인월(立寅月, 1월)을 정월로 삼았고, 이찬(伊飡) 경영(慶永)의 모반(謀叛)을 평정하였다.

11년(702) 7월에 왕이 돌아가시니 시호(諡號)를 효소(孝昭)라 하고 망덕사(望德寺) 동쪽에 장사지냈다.

 

 

 

제33대 성덕왕(聖德王)
재위기간 702 ~ 737 성(性) 金氏
부(父) 신문왕(神文王) 모(母) 신목왕후(神穆王后, 一吉飡 欽運의 딸 金氏)
비(妃) 성정왕후(成貞王后, 蘇判 金元泰의 딸) 계비(繼妃) 소덕왕후(炤德王后, 角干 順元의 딸)
휘(諱) 융기(隆基) ·흥광(興光)
성덕왕(聖德王)의 휘(諱)는 흥광(興光)이다. 본명은 융기(隆基)였는데 당(唐) 현종(玄宗)의 휘(諱)와 같은 까닭으로 이름(諱)을 흥광(興光)으로 고쳤다. 효소왕(孝昭王)의 친동생이며, 신문왕(神文王)의 둘째 아들이다. 계비(繼妃)에게서 승경(承慶, 孝成王)과 헌영(憲英, 景德王)의 소생을 보았다.

15년(716)에 왕이 성정왕후(成貞王后)를 궁에서 내보내었는데, 왕의 외숙부인 이찬 김순원(金順元)은 그의 외숙부이자 성덕왕의 작은할아버지인 김개원(金愷元)을 움직여 15년에 김원태(金元泰)의 딸인 성정(成貞)왕후를 출궁시키고, 그 소생인 태자 중경(重慶, 諡는 孝 )을 시해하고(16년 6월) 나서 3년 후인 19년(720) 3월에 자신의 딸을 왕비로 입궁시켰다. 이 사람이 소덕(昭德)왕후 김씨이다.

16년(717)에 수충(守忠)이 당나라에서 가져온 문선왕(文宣王, 孔子)과 십철(十哲, 공자의 제자 10인), 72현(賢, 공자의 제자 중 6藝에 능통한 자)의 도상을 바치므로 대학(大學)에 모셨고, 이듬해에 처음으로 누각(漏刻, 물시계)을 만들었으며, 당나라 문화수입에 힘써 사신 왕래가 빈번하였다.

22년(723) 왕이 사신을 당에 보낼 때 미녀(美女) 포정(抱貞)과 정원(貞원) 2명을 바쳤는데, 당(唐) 현종(玄宗)이 이에 대해 말하기를 "여자들은 다 왕의 고자매(姑姉妹, 내종자매)로 본속을 이별하고 본국을 떠나 온 것이므로 차마 머물러 두고 싶지 않다."하며 되돌려 보냈다.

32년(733)에는 발해를 치고자 김사란(金思蘭)을 당나라에서 귀국시켜 군사를 내어 치게 했으나 마침 대설(大雪)이 1장(丈, 10자) 이상이나 와 길이 막히고 죽는 사졸(士卒)이 절반이 넘었으므로 공 없이 돌아왔다.

36년(737)에 왕이 돌아가시니 시호(諡號)를 성덕(聖德)이라 하고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장사하였다.

 

제34대 효성왕(孝成王)
재위기간 737 ~ 742 성(性) 金氏
부(父) 성덕왕(聖德王) 모(母) 소덕왕후(炤德王后, 伊飡 順元의 딸 金氏)
비(妃) 혜명부인(惠明夫人, 伊飡 順貞의 딸 金氏) 휘(諱) 승경(承慶)

효성왕(孝成王)의 휘(諱)는 승경이며, 성덕왕의 둘째아들이다.

2년(738) 당현종(唐玄宗)으로부터 개부의동삼사신라왕(開府儀同三司新羅王)에 책봉되고,

 

3년(739) 3월에 혜명(惠明)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고 5월에 동생 파진찬(波珍飡) 헌영(憲英)을 태자(太子)로 삼았다.

 

4년(740) 후궁(後宮)이 왕비의 질투로 살해된 것에 분개한 후궁의 아버지인 파진찬(波珍飡) 영종(永宗)이 모반하자 이를 평정했다.

6년(742) 왕이 돌아가시니 시호(諡號)를 효성(孝成)이라 하고 유명(遺命)으로 구(柩, 널)를 법류사(法流寺) 남쪽에서 화장(火葬)하고 유골(遺骨)을 동해에 뿌렸다.

 

 

 

제35대 경덕왕(景德王)
재위기간 742 ~ 765 성(性) 金氏
부(父) 성덕왕(聖德王) 모(母) 소덕왕후(炤德王后, 伊飡 順元의 딸 金氏)
비(妃) 伊飡 順貞의 딸 金氏 차비(次妃) 만월부인(滿月夫人, 舒弗邯 義忠의 딸 金氏)
휘(諱) 헌영(憲英)

경덕왕(景德王)의 휘(諱)는 헌영(憲英)이니 효성왕(孝成王)의 동생이다. 효성왕(孝成王)이 아들이 없으므로 헌영(憲英)을 세워 태자(太子)로 삼았던 까닭에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찬(伊飡) 김순정(金順貞)의 딸을 왕비(王妃)로 맞았으나,

 

즉위 2년(743)에 다시 서불한(舒弗邯) 김의충(金義忠)의 딸을 왕비(王妃)로 맞이하였다.
경덕왕(景德王) 때에 이르러 새로운 귀족들이 세력을 확장하여 왕권(王權)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에 경덕왕(景德王)과 행정 책임자였던 '중시(中侍)'는 왕권강화를 위해 관제정비와 개혁조치를 실시하였다.

 

3년(744)에 이찬(伊飡) 유왕(惟王)을 중시(中侍)로 삼은 이후, 대정(大正), 조량(朝良), 김기(金耆), 염상(簾相), 김옹(金邕), 김양상(金良相) 등 7인이 경덕왕(景德王) 때에 중시를 지냈다.

6년(747)에 중시의 명칭을 시중(侍中)으로 개칭하고, 국학(國學)에 제업박사(諸業博士)와 조교(助敎)를 두어 유학(儒學) 교육을 진흥시키고,

 

7년(748)에는 정찰(貞察) 1명을 두어 관리를 규찰하게 하여, 전제왕권 체제를 유지하려 하였다.

 

8년(749)에 천문박사 1명과 누각박사(漏刻博士) 6인을 두었다,

 

12년(753년) 다시 왔으나 오만하고 무례하다는 이유로 왕이 접견하지 않고 돌려보냈다는 기록으로 이를 알 수 있다.

17년(756)에는 율령박사 2인을 두었는데 이는 백성을 생각하는 이상적인 유교정치(儒敎政治)의 기술적인 분야를 발전시키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경덕왕(景德王)은 당나라와의 외교관계에 있어서는, 전통적 방법인 조공과 하정(賀正)의 사신을 11회나 당나라에 파견함으로써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일본(日本)과의 관계는 그리 원만하지 못하여 경덕왕(景德王)이 즉위하던 해에 일본(日本) 사신이 왔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16년(757)에 내외관리의 월봉을 없애고 다시 녹읍(祿邑)을 부활시켰다. 이것은 새로이 성장하는 귀족세력의 경제적인 욕구가 지금까지 세조(歲祖)만 받던 월봉을 혁파하게 하고, 녹읍의 부활을 제도화시킨 것으로 귀족세력이 강해지고 왕권이 약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해에 9주를 재정비하였다.

19년(760) 2월 궁중에 큰못을 팠고, 궁 남쪽 문천(蚊川) 위에 월정교(月淨橋)와 춘양교(春陽橋) 두 다리를 놓았다. 7월에 왕자(王子) 건운(乾運)을 봉하여 왕태자(王太子)를 삼았다.

24년(765) 6월에 왕이 돌아가시니 시호(諡號)를 경덕(景德)이라 하고 모지사(毛祗寺) 西岑(서쪽 봉우리)에 장사하였다.

 

 

제36대 혜공왕(惠恭王)
재위기간 765 ~ 780 성(性) 金氏
부(父) 경덕왕(景德王) 모(母) 만월부인(滿月夫人, 舒弗余 義忠의 딸 金氏)
원비(元妃) 신보왕후(新寶王后, 伊飡 維誠의 딸) 차비(次妃) 이찬(伊飡) 김장(金璋)의 딸
휘(諱) 건운(乾運)

혜공왕(惠恭王)의 휘(諱)는 건운(乾運)이며 경덕왕(景德王)의 적자이다. 비(妃) 신보왕후(新寶王后)의 입궁 연월은 전하지 않는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원비(元妃)는 각간 위정(角干 魏正)의 딸 신파부인(神巴夫人), 차비(次妃)는 각간 김장(角干 金將)의 딸 창창부인(昌昌夫人)이라 하였다.

왕이 즉위 때의 나이가 8세였으므로 태후(太后)가 섭정하였다. 당나라와 친교를 맺고 매년 사신을 파견하였다,

 

즉위 4년(768) 당나라 대종(代宗)으로부터 개부의동삼사신라왕(開府儀同三司新羅王)에 책봉되었다. 재위 중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나고 흉년이 들어 민심이 흉흉하였는데도, 사치와 음탕한 생활을 일삼아 궁중의 기강이 문란해졌다.

 

4년(768) 일길찬(一吉飡) 대공(大恭)의 모반을 비롯하여 혼란했다,

 

6년(770) 대아찬(大阿飡) 김융(金融)이 모반을 일으켰다,

 

11년(775)에 이찬(伊飡) 김은거(金隱居)가 모반을 일으켰다.

16년(780) 이찬(伊飡) 김지정(金志貞)이 반란을 일으키자 상대등(上大等) 김양상(金良相)이 이찬(伊飡) 김경신(金敬信)과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김지정(金志貞) 등을 제압했으나 왕과 후비(后妃)는 난병(亂兵)에게 피살되었다. 김양상(金良相) 등은 왕의 시호(諡號)를 혜공왕(惠恭王)이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