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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
재위기간 | 80 ~ 112 | 성(性) | 朴氏 |
부(父) |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 모(母) | 갈문왕 일지(葛文王 日知)의 딸 |
비(妃) | 사성부인(史省夫人, 葛文王 許婁의 딸로 金氏) | ||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의 둘째 아들이다. 또는 유리왕의 동생인 내로(奈老)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처음에는 형인 일성(逸聖)을 왕으로 세우려 하다가 위엄과 현명함이 파사(婆娑)를 따르지 못한다하여 그를 세웠다.
즉위 22년(101) 2월에 성(城)을 쌓아 월성(月城)이라 이름하고, 7월에 월성으로 이거(移居)하였다.
즉위 22년(102)에는 음집벌국(音汁伐國)· 실직곡국(悉直谷國)· 압독국(押督國) 등 세 나라를 합병하여 국세를 넓혔다, 즉위 29년(108) 가야를 공격, 비지국(比只國)·다벌국(多伐國)·초팔국(草八國) 등을 합병하는 등 현군으로서 추앙을 받았다. |
제6대 지마이사금(祗味尼師今) |
재위기간 | 112 ~ 134 | 성(性) | 朴氏 |
부(父) |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 모(母) | 사성부인(史省夫人) |
비(妃) | 애례부인(愛禮夫人, 葛文王 摩帝의 딸로 金氏) | ||
파사이사금의 적자이다.
즉위 4년(115) 2월에 가야(伽倻)가 남변(南邊)을 침범하자 7월에 왕이 친히 가야를 치기 위하여 보병(步兵)과 기병(騎兵)을 거느리고 황산하(黃山河, 양산과 김해 사이의 낙동강)를 지나다가 숲에 잠복하고 있던 가야 복병에 패하였다.
즉위 5년(116) 재차 출정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즉위 10년(121)에 왜인(倭人)이 동변(東邊)을 침범하였다,
즉위12년(123)에는 왜국(倭國)과 수교하였다,
즉위14년(125)에 말갈족(靺鞨族)의 침입을 백제의 도움을 받아 격퇴하였다. |
제7대 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 |
재위기간 | 134 ~ 154 | 성(性) | 朴氏 |
부(父) |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혹은 葛文王 日知의 아들이라고 함) | 모(母) | 이간생부인(伊干生夫人) |
비(妃) | 지소례왕(支所禮王-追尊)의 딸 朴氏 | ||
일성이사금은 유리왕의 장자(갈문왕 일지의 아들이라고도 함)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아버지가 노례왕(弩禮王)의 형, 혹은 지마왕(祗摩王)이고, 비(妃)는 □례부인(□禮夫人, 祗摩王의 딸)이며 어머니는 이간생부인(伊干生夫人)이라 적고 있다. 일성왕(逸聖王)의 장지(葬地)에 관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으며 구전(口傳)에 의하여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
제8대 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師今) |
재위기간 | 154 ~ 184 | 성(性) | 朴氏 |
부(父) | 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 | 모(母) | 지소례왕(支所禮王-追尊)의 딸 朴氏 |
비(妃) | 내례부인(內禮夫人, 祗摩王의 딸 朴氏) | ||
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의 장자이다.
즉위 4년(157) 처음으로 감물(甘勿)·마산(馬山)의 이현(二縣)을 두었고, 5년(158)에 죽령(竹嶺)을 열었다.
12년(165)에 아찬(阿飡) 길선(吉宣)이 모반(謀叛)하였다가 발각되자 백제로 도망하였다. 왕이 글을 보내 돌려보내기를 요구하였지만 백제가 허락지 아니하였다.
14년(167) 백제가 신라 서쪽의 두 성을 격파하여 1,000여 명의 백성을 잡아가자 군사 2만으로 백제를 치게하고 왕 또한 기병(騎兵) 8,000기(騎)를 거느리고 한수(漢水)로부터 육박하니, 백제가 크게 두려워하여 포로들을 돌려보내며 화친을 청하였다.
20년(173)에는 왜국(倭國)의 여왕 히미코(卑彌呼)가 사신을 보내 내빙(來聘)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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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대 내해이사금(奈解尼師今) |
재위기간 | 196 ~ 230 | 성(性) | 昔氏 |
부(父) | 이매(伊買, 벌휴왕의 둘째 아들) | 모(母) | 내례부인(內禮夫人) |
비(妃) | 조분왕(助賁王)의 누이 昔氏 | ||
내해이사금(奈解尼師今)은 벌휴왕의 손자이다. 전왕(前王) 벌휴(伐休)의 태자 골정(骨正)과 둘째 아들 이매(伊買)가 앞서 죽고 태손(大孫, 嫡孫)이 어려 이매(伊買)의 아들 내해이사금(奈解尼師今)이 즉위하였다.
즉위19년(214) 이벌찬(伊伐飡) 이음(伊音)을 시켜 백제의 사현성(沙峴城)을 공략하였다.
즉위23년(218)에는 자신이 지휘하여 장산성(獐山城)에 침입한 백제군을 격퇴하였다,
즉위29년(224)에는 이벌찬(伊伐飡) 연진(連珍)에게 명하여 백제군을 봉산(烽山) 아래에서 무찌른 뒤 그곳에 봉산성(烽山城)을 새로 쌓게 하였다. 재위기간 초기에는 백제의 침략으로 국내가 불안하였으나, 뒤에는 도처에서 백제군을 격파하여 신라의 국세를 널리 떨쳤다. |
제11대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 |
재위기간 | 230 ~ 247 | 성(性) | 昔氏 |
부(父) | 갈문왕 골정(葛文王 骨正, 혹은 忽爭) | 모(母) | 옥모부인(玉帽夫人, 葛文王 仇道의 딸 金氏) |
비(妃) | 아이혜부인(阿爾兮夫人, 奈解王의 딸) | ||
조분이사금의 성은 석씨이며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의 손자이다. 전왕(前王, 奈解王)이 유언하여 사위 조분(助賁)으로 위(位)를 잇게 한 것이다.
3년(232)에 왜구가 침입하자 경기(輕騎, 날랜 기병)를 보내어 격퇴했다,
7년(236)에는 골벌국(骨伐國)의 왕 아음부(阿音夫)가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였다.
11년(240)에 백제가 침입하고, 16년(245)에는 고구려가 침입하였다. |
제12대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 |
재위기간 | 247 ~ 262 | 성(性) | 昔氏 |
부(父) | 갈문왕 골정(葛文王 骨正, 혹은 忽爭) | 모(母) | 옥모부인(玉帽夫人, 葛文王 仇道의 딸 金氏) |
벌휴왕(伐休王)의 손자(孫子)로 골정(骨正)의 둘째 아들이다. 형인 조분왕(助賁王)이 후사(後嗣)가 없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9년(255) 9월에 백제가 침입하자 일벌찬(一伐飡) 익종(翊宗)이 이를 괴곡(槐谷) 서쪽에서 맞아 싸우다가 도리어 익종(翊宗)이 적에게 죽었다. |
제13대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 |
재위기간 | 262 ~ 284 | 성(性) | 金氏 |
부(父) | 구도(仇道) | 모(母) | 갈문왕 이칠(葛文王 伊柒)의 딸, 朴氏 |
비(妃) | 광명부인(光明夫人, 助賁王의 딸, 昔氏) | ||
미추이사금의 성은 김씨이며 김알지(金閼智)의 6세손이다. 알지(閼智)는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은 아도(阿道)를 낳고, 아도는 수유(首留)를 낳고 수유는 욱보(郁甫)를 낳고 욱보는 구도(仇道)를 낳았는데 구도는 곧 미추(味鄒)의 아버지이다. 조분왕(助賁王)의 사위로 김씨(金氏)로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다.
11년(272) 영(令)을 내려 농사에 유해한 모든 것을 죄다 없애 버리게 하는 등 농업을 장려하고 내치(內治)에도 힘썼다. |
제14대 유례이사금(儒禮尼師今) |
재위기간 | 284 ~ 298 | 성(性) | 昔氏 |
부(父) |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 | 모(母) | 갈문왕 내음(葛文王 奈音)의 딸, 朴氏 |
유례이사금[고기(古記)에는 제3대와 제14대 왕의 휘(諱)가 같아 유리(儒理), 혹은 유례(儒禮)라고 하니 어느 쪽이 옳은지 알 수 없다]은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의 장자(長子)로 어머니가 어느날 밤길을 가다가 별빛이 입 속으로 들어와 이로써 아이를 배었는데, 해산하던 밤에 이상한 향기가 집에 가득하였다고 한다.
4년(287)부터 왜인의 침입이 잦아 변경이 매우 시끄러웠다.
10년(293)에 사도성(沙道城)을 개축하고 사벌주(沙伐州 : 尙州)의 호민(豪民) 80여 가(家)를 옮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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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대 흘해이사금(訖解尼師今) |
재위기간 | 310 ~ 356 | 성(性) | 昔氏 |
부(父) | 각간(角干) 우로(于老) | 모(母) | 명원부인(命元夫人, 조분왕의 딸) |
흘해이사금은 내해왕(奈解王)의 손자로 기림왕(基臨王)이 후사(後嗣) 없이 죽자 대신들의 추대로 즉위하였다.
즉위 21년(330) 비로소 벽골지(碧骨池)를 만들었는데 둑 길이가 1,800보(步)였다고 한다. 농사를 장려했다,
즉위 35년(344) 일본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했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격분한 일본이 국교를 단절하였다,
즉위 37년(346) 풍도(風島)에 이르러 변호(邊戶, 변방의 민가)를 약탈하고 금성(金城)을 포위하자 성문을 굳게 닫고 일본군의 식량이 떨어진 후 이를 격퇴하였다. |
내물이사금은 갈문왕 구도(葛文王 仇道)의 손자로, 아버지인 말구(末仇)는 미추왕(味鄒王)의 형제이다. 흘해왕(訖解王)이 돌아가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그 뒤를 이었다. 18년(373)에는 백제의 독산성주(禿山城主)가 남녀 300명을 이끌고 투항하자 이들을 받아들여 6부(部)에 분거(分居)하고, 이들을 돌려보내라는 백제왕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26년(381) 위두(衛頭)를 전진왕(前秦王) 부견(符堅, 前秦)에 보내어 우의(友誼)를 맺었다. 37년(392)에는 고구려(高句麗) 광개토왕(廣開土王)이 사신을 보내니 왕은 고구려가 강성한 까닭으로 이찬(伊飡) 대서지(大西知)의 아들인 실성(實聖)을 보내어 볼모로 삼았다. 다음해 왜적 침입으로 서울이 5일 동안 포위되었으나 이를 물리쳤다, 40년(395)에는 말갈(靺鞨)이 침입하자 이를 실직(悉直)에서 격파하였다. 42년(397) 7월에 하슬라(何瑟羅, 江陵) 지방에서 큰 흉년이 들자 죄인을 사면하고 백성의 세금을 1년 동안 면제하는 등 내외로 많은 치적을 남겼다. 46년(401) 7월에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갔던 실성이 돌아왔다.
제17대 내물이사금(奈勿麻立干)
재위기간
356 ~ 402
성(性)
金氏
부(父)
각간 말구(角干 末仇)
모(母)
휴례부인(休禮夫人) 金氏
비(妃)
보반부인(保反夫人, 味鄒王의 딸) 김씨
즉위 9년(364) 4월에 왜병의 큰 무리가 쳐들어오자 대적치 못할까 하여 초우인(草偶人:풀로 만든 허수아비) 수천을 만들어 옷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 토함산(吐含山) 기슭에 열지어 세우고, 용사 1,000명을 따로 부현(斧峴) 동쪽에 매복시켰다가 왜병을 전멸시켰다.
47년(402) 2월에 왕이 돌아갔다.
제18대 실성이사금(實聖麻立干) |
재위기간 | 402 ~ 417 | 성(性) | 金氏 |
부(父) | 대서지(大西知) | 모(母) | 이리부인(伊利夫人, 昔登保의 딸) |
비(妃) | 아류부인(阿留夫人, 味鄒王의 딸) | ||
실주왕(實主王) 또는 실금(實金)이라고도 한다. 내물왕(奈勿王) 37년(392) 고구려에 볼모로 갔다가 내물왕 46년(401) 귀국, 내물왕(奈勿王)이 죽고 태자가 어리므로 추대 받아 즉위하였다.
즉위4년(405) 명활성(明活城)에 침입한 왜병(倭兵)을 물리쳤다,
즉위7년(408)에 대마도(對馬島) 정벌을 계획하였다가 서불한(舒弗邯) 미사품(未斯品)의 건의로 중지하였다. 즉위11년(412)에 내물왕의 아들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 수호(修好)를 맺었다, 즉위16년(417) 내물왕이 자신(實聖)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것을 원망하여 내물왕의 아들 눌지(訥祗)를 고구려 사람을 시켜 죽이려다가 오히려 눌지에게 살해되었다. |
제19대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 |
재위기간 | 417 ~ 458 | 성(性) | 金氏 |
부(父) | 내물왕(奈勿王) | 모(母) | 보반부인(保反夫人, 味鄒王의 딸 金氏) |
비(妃) | 아로부인(阿老夫人, 實聖王의 딸 金氏) | ||
눌지마립간은 내물왕의 아들이다. 내물왕 37년(392)에 실성(實聖)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더니, 후에 실성이 돌아와 왕이 되기에 이르러, 앞서 내물왕(奈勿王)이 자기를 외국에 볼모로 보낸 것을 원망하여 내물왕의 아들을 죽여 원수를 갚고자 자기가 고구려에 있을 때 서로 알던 사람을 불러서 그에게 비밀리에 알리기를 "눌지(訥祗)를 보거든 곧 죽여라" 하고, 눌지로 하여금 가서 중로(中路)에서 고구려 사람을 맞게 하였다. 고구려 사람은 눌지의 용모기상이 명랑하고 단아하여 군자의 풍이 있음을 보고 눌지에게 말하기를 "그대 나라의 임금이 나로 하여금 그대를 해치라 하였는데 지금 그대를 보니 차마 해칠 수 없다." 하고 이내 돌아가 버렸다. 눌지는 이를 원망하여 도리어 왕(實聖)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즉위 22년(438) 백성에게 우차(牛車)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즉위 39년(455)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자 백제와 공수동맹(攻守同盟)을 맺고 백제에 원병을 보냈다. 재위 기간에 고구려의 묵호자(墨胡子)가 처음으로 불교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
제20대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 |
재위기간 | 458 ~ 479 | 성(性) | 金氏 |
부(父) | 눌지왕(訥祗王) | 모(母) | 아로부인(阿老夫人, 實聖王의 딸 金氏) |
비(妃) | 미사흔(未斯欣)의 딸 | ||
자비마립간은 눌지왕의 장자로 눌지왕이 돌아가니 왕위에 올랐다.
즉위 2년(459) 4월에 왜인이 병선 100여 척으로 동변(東邊)을 습격하고, 월성(月城)을 에워싸니 사면에 시석(矢石, 화살과 돌)이 비오듯하는데 이를 격퇴하였다.
6년(463) 2월에도 왜인이 삽량성에 침입하자 왕이 벌지(伐智)와 덕지(德智) 등에게 명하여 대파시켰으며, 7월 대규모 열병식(閱兵式)을 거행하였다. 한편 왜인의 잦은 침범에 대비하여 연변(緣邊)에 두 성을 쌓았다.
13년(470)에 삼년산성(三年山城)을 쌓았다.
18년(475) 명활성(明活城)에 이거(移居)하였으며, 476∼477년 계속하여 왜병이 침입하였으나 매번 이를 격퇴하였다. |
제21대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
재위기간 | 479 ~ 500 | 성(性) | 金氏 |
부(父) | 자비왕(慈悲王) | 모(母) | 미사흔(未斯欣)의 딸 金氏 |
비(妃) | 선혜부인(善兮夫人, 乃宿 伊伐飡의 딸) | ||
자비왕(慈悲王)의 장자로 일명 조지(照知)·비처(毗處)라고도 한다. 어릴 때 효행이 있고, 또 스스로 겸공(謙恭)한 태도를 가졌다.
3년(481)에는 고구려와 말갈이 연합하여 북변(北邊)을 침공하여 호명(狐鳴) 등 7성(城)을 취하므로 백제(百濟)와 가야(伽倻)의 구원병과 더불어 막았다.
4년(482)에는 왜인이 해변을 침범하였다.
6년(484) 고구려가 다시 침공해왔으나 백제와 연합하여 이를 모산성(母山城)에서 격파하였으며,
8년(486)에도 왜인이 변경을 침입하였다. 이후에 백제와는 화평(和平)을 유지하여,
9년(487) 신궁(神宮)을 내을(奈乙)에 세웠고, 각 지방에 수역을 설치하였으며, 이듬해 왕이 월성(月城)으로 이거(移居)하였다.
12년(490)에 처음으로 시장(市場)을 개설하여 사방의 화물을 통하게 하였다.
15년(493)에 이벌찬(伊伐飡) 비지(比智)의 딸을 백제왕 모대(牟大, 東城王)에게 보냈다.
17년(495)에는 고구려가 백제의 치양성(雉壤城)을 포위 공격하자 장군 덕지(德智)를 보내 구원케 했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이듬해 고구려가 우산성(牛山城)을 침공하자 신라는 고구려군을 이하(泥河)에서 격파하였다. |
제22대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
재위기간 | 500 ~ 514 | 성(性) | 金氏 |
부(父) | 갈문왕(葛文王) 습보(習寶) | 모(母) | 조생부인(鳥生夫人, 訥祗王의 딸 金氏) |
비(妃) | 연제부인(延帝夫人, 伊飡 登欣의 딸 朴氏) | 휘(諱) | 지대로(智大路:智度路) |
지증왕의 휘는 지대로(智大路) 혹은 지도로(智度路), 지철로(智哲老)라고도 한다. 내물왕(奈勿王)의 증손(曾孫)으로 전왕(炤知王)이 후사(後嗣)가 없이 돌아가자 위(位)를 이었다. 이때 왕의 나이가 64세였다.
4년(504) 국호(國號)를 '신라(新羅)'로 개정하고, 왕을 뜻하는 마립간(麻立干)의 칭호를 폐지하고 정식으로 왕이라고 칭하게 하는 등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다. 국호 신라는 신(新)은 덕업(德業)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요, 라(羅)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다.
5년(504) 상복(喪服)제도를 제정하였고, 다음해에 주(州)· 군(郡)· 현(縣)을 정하고, 실직주(悉直州)에는 군주(軍主)를 두었다.
13년(512)에 하슬라주(何瑟羅主) 이사부(異斯夫)가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于山國)을 공취(攻取)하였다. |
제23대 법흥왕(法興王) |
재위기간 | 514 ~ 540 | 성(性) | 金氏 |
부(父) | 지증왕(智證王) | 모(母) | 연제부인(延帝夫人, 伊飡 登欣의 딸 朴氏) |
비(妃) | 보도부인(保刀夫人) 朴氏 | 휘(諱) | 원종(原宗) |
법흥왕의 휘는 원종(原宗)이며 지증왕의 장자이다. 왕은 신장(身長)이 7척(尺, 약 210cm)이고, 사람됨이 관후하고 사람을 사랑하였다.
3년(516)에 처음으로 직관지(職官志) 두었다 하였다.
7년(520)에 율령(律令)을 반시(頒示)하고 백관(百官)의 공복(公服)을 제정하였다,
8년(521) 양(梁)나라에 사자를 보내 국교를 열었다.
9년(522) 가야국왕(伽倻國王)이 청혼하자,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누이를 출가시켰다.
11년(524)에 남부지방을 순행(巡行)하고 국토를 개척하여 군사당주(軍師幢主)를 두었다,
12년(525) 대아찬(大阿飡) 이등(伊登)으로 사벌주(沙伐州)의 군주(軍主)를 삼았다.
16년(529)에 영(令)을 내려 살생(殺生)을 금하였다.
18년(531) 이찬(伊飡) 철부(哲夫)로 상대등(上大等)을 삼아 국사(國事)를 총지(總知)케 하였다. 상대등(上大等)이란 벼슬은 이 때 처음 시작되었다.
19년(532)에 금관(金官) 국주(國主) 김구해(金仇亥)가 신라에 항복해 왔다.
23년(536) 처음으로 연호를 칭하여 건원(建元) 원년이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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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대 진지왕(眞智王) |
재위기간 | 576 ~ 579 | 성(性) | 金氏 |
부(父) | 진흥왕(眞興王) | 모(母) | 사도부인(思道夫人, 朴氏) |
비(妃) | 지도부인(知道夫人, 烏公의 딸) | 휘(諱) | 사륜(舍輪)·금륜(金輪) |
진흥왕(眞興王)의 둘째 아들이다. 태자(太子)가 일찍 죽었으므로 진지(眞智)가 즉위한 것이다. 백제와 불화(不和)하여 자주 침공을 받았으나, 내리서성(內利西城) 등을 쌓아 방비를 굳게 하였다. 상대등(上大等) 거칠부(居柒夫)에게 국정을 맡겼으며, 중국의 진(陳)나라와 수교하여 화친을 도모하였다. 4년(579) 7월에 왕이 돌아가시니 시호(諡號)를 진지(眞智)라 하고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지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도화녀(桃花女)와 비형랑(鼻荊郞)條에 의하면 나라를 다스린지 4년에 주색에 빠져 음란하고 정사가 어지럽자 나라사람들은 그를 폐위시켰다고 적고 있다. |
제26대 진평왕(眞平王) |
재위기간 | 579 ~ 632 | 성(性) | 金氏 |
부(父) | 동륜(銅輪) | 모(母) | 만호부인(萬呼夫人, 葛文王 立宗의 딸) |
비(妃) | 마야부인(摩耶夫人, 葛文王 福勝의 딸) | 휘(諱) | 백정(伯淨, 白淨) |
진평왕의 휘는 백정(白淨)이며 진흥왕의 태자 동륜(銅輪)의 아들이다.
즉위 6년(584년)에 연호(年號)를 건복(建福)이라 고쳤다.
11년(589)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진(陳)나라에 가서 불법(佛法)을 구하였다,
13년(591) 7월에 남산성(南山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2,854보(步)였으며, 15년(593)에는 명활성(明活城)과 서형산성(西兄山城)을 개축하였는데 그 둘레가 각각 3,000보와 2,000보였다.
43년(621) 당(唐)나라와 수교하여 고구려의 침공을 꾀했다. 대내적으로는 위화부(位和府)·선부서(船府署)·예부(禮部) 등의 관청을 신설하고 내정의 충실을 도모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원광(圓光)·담육(曇育) 등 명승을 중국에 보내어 수도하게 하는 등 불교를 진흥시키고 왕실을 튼튼히 하는 데도 힘썼다. |
제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 |
재위기간 | 632 ~ 647 | 성(性) | 金氏 |
부(父) | 진평왕(眞平王) | 모(母) | 마야부인(摩耶夫人) 김씨 |
휘(諱) | 덕만(德曼) | 호(號) | 성조황고(聖祖皇姑) |
선덕왕의 휘는 덕만(德曼)이며 진평왕의 장녀이다. 진평왕(眞平王)이 후사가 없이 죽자 백성들의 옹립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4년(635) 당나라에 지절사(持節使)를 보내어 주국낙랑군공신라왕(柱國樂浪郡公新羅王)에 책봉되었다. 영묘사(靈廟寺)가 완성되었다. 집안의 남녀들이 바라보고 눈물을 흘렸으나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갔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열전(列傳) 김유신(金庾信)조에는 전장에 나가는 길에 집 앞을 지나면서도 돌아보지도 않고 50보쯤 가다가 말을 멈추고, 장(漿)물을 집에서 가져오게 하여 마시며 "우리집 물이 아직도 예전 맛이 있다."고 했다. |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 |
재위기간 | 647 ~ 654 | 성(性) | 金氏 |
부(父) | 갈문왕 국반(葛文王 國飯) | 모(母) | 월명부인(月明夫人, 朴氏) |
휘(諱) | 승만(勝曼) | ||
진덕왕의 휘는 승만(勝曼)이며 아버지 갈문왕 국반(葛文王 國飯)은 진평왕(眞平王)의 동생이다. 승만(勝曼)은 자질이 고우며 키가 7척이나 되어 손을 늘어뜨리면 무릎 아래까지 닿았다.
2년(648)에 김춘추(金春秋)를 중국 당(唐)나라에 보내어 백제 정벌의 원군을 요청하였다,
3년(649) 당나라를 본떠 중국의 의관을 입기 시작하였다.
4년(650) 법민(法敏, 김춘추의 아들. 文武王)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여왕이 친히 지은 《태평송(太平頌)》을 바치고, 같은 해에 당나라 연호인 영휘(永徽)를 쓰기 시작하였다,
5년(651)에 김춘추의 둘째아들 파진찬(波珍飡) 인문(仁問)을 당나라에 보내어 친교를 더욱 돈독하게 하였다. 한편 국내적으로는 명장 김유신(金庾信)으로 하여금 국력을 튼튼히 하여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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