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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대 문무왕(文武王) |
재위기간 | 661 ~ 681 | 성(性) | 金氏 |
부(父) |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 모(母) | 문명부인(文明夫人, 舒玄의 딸, 金庾信의 동생) |
비(妃) | 자의왕후(慈儀王后, 波珍飡 善品의 딸) | 휘(諱) | 법민(法敏) |
문무왕(文武王)의 휘(諱)는 법민(法敏)이며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맏아들이다. 어머니인 문명왕후(文明王后)는 김유신(金庾信)의 누이로 그 형(姉, 寶姬, 兒名은 阿海)이 꿈에 서형산정(西兄山頂)에 올라앉아 오줌을 누니 서울 안에 가득 찼다. 꿈을 깨어 아우(文姬, 兒名은 阿之)에게 이야기를 하였더니 아우는 언니의 꿈을 비단치마로 값을 치르고 샀다. 며칠 후 유신(庾信)이 춘추공(春秋公, 武烈王)과 공을 차다가 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려 집으로 데려와 주연을 베풀고 조용히 보희(寶姬)를 불러 춘추공의 옷고름을 꿰매게 하였다. 보희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오지 않고(三國遺事에는 사소한 일로 귀공자를 가까이 할 수 없다하여 그 자리에 나오길 사양했다.) 그 아우가 나와서 옷고름을 다는데, 그의 수수한 단장과 날씬한 옷맵시에 어여쁜 얼굴빛은 사람을 비추었다. 춘추가 보고 기뻐하여 이에 사내아이를 낳으니 이가 바로 법민(法敏)이다.
650년(眞德女王 4) 왕명으로 당(唐)나라에 가서 대부경(大府卿)이란 벼슬을 받았고,
654년(太宗武烈王 1) 파진찬(波珍飡)으로서 병부령(兵部令)이 되었다.
태종무열왕 2년(655)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660년 나·당(羅唐)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김유신(金庾信)과 함께 5만 군대를 거느리고 분전, 백제를 격멸하였다.
2년(662)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쳤으나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실패하였다.
3년(663) 당(唐)이 우리나라를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로 삼고 왕을 계림대도독(鷄林大都督)이라 하였다. 백제의 옛 장군 복신(福信)·부도(浮圖)·도침(道琛) 등이 옛 왕자 부여풍을 영립하여 백제 부흥을 시도하였으나 김유신 등으로 하여금 이를 저지하였다.
4년(664) 부인들의 의복을 당제(唐制)에 따르게 하였고, 또 당악(唐樂)을 수입하였다.
8년(668)에 다시 나 ·당연합군을 형성하여 고구려를 쳤는데, 왕의 동생 인문(仁問)은 당나라의 이적(李勣)과 합세하여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9월 21일 평양성을 에워싸니 고구려왕(寶藏王)이 항복하였다. 10월 22일에 김유신(金庾信)에게 태대각간(太大角干)의 벼슬을 내렸다.
13년(673) 7월 1일에 김유신(金庾信)이 죽었다.
14년(674) 2월에 궁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금(珍禽)과 기수(奇獸)를 길렀다.
15년(675) 동인(銅印)을 만들어 중앙 백관(百官)과 지방의 주군(州郡)에서 사용하도록 하였다.
16년(676) 의상(義湘)으로 하여금 지금의 경북 영주 부석면(浮石面)에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게 하였다. 17년(677) 그 세력을 몰아내고 대동강·원산만 이남의 땅을 차지하는, 삼국통일(三國統一)의 대업(大業)을 완수하였다. 이때부터 한반도에 단일국가가 등장하였다. 문무왕은 당나라 문화를 수입하는 데 힘을 기울여다, 21년(681) 7월에 왕이 돌아가시니 시호(諡號)를 문무(文武)라 하였다. 유언에 의하여 동해구(東海口) 대석상(大石上)에 장사지냈다. |
제31대 신문왕(神文王) |
재위기간 | 681 ~ 692 | 성(性) | 金氏 |
부(父) | 문무왕(文武王) | 모(母) | 자의왕후(慈儀王后, 波珍飡 善品의 딸) |
비(妃) | 소판(蘇判) 김흠돌(金欽突)의 딸 金氏 | 차비(次妃) | 신목왕후(神穆王后, 一吉飡 欽運의 딸 金氏) |
휘(諱) | 정명(政明) ·명지(明之) | 자(字) | 일초(日膳) |
신문왕(神文王)의 휘(諱)는 정명(政明)이며 문무왕(文武王)의 장자이다. 665년(문무왕 5) 태자에 책봉되었다. 왕이 태자(太子)로 있을 때 비(妃)로 소판(蘇判) 김흠돌(金欽突)의 딸 김씨를 맞아들였는데 오래도록 아들이 없고 또 비(妃)의 아버지의 난(亂)에 죄를 입어 궁에서 내쫓겼다.
2년(682)에 위화부령(位和府令) 2명을 두어 관리를 선거(選擧)하는 사무를 맡게 하고 6월에 국학(國學, 太學)을 창설(職官志에 의하면 眞德女王 5년에 이미 國學이 설치되었다고 하며 神文王 때의 설치는 國學의 개편으로 보인다)하여 학문을 장려하였다,
3년(683)에 일길찬(一吉飡) 김흠운(金欽運)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또 보덕왕(報德王) 안승(安勝)을 소판(蘇判)으로 기용하여 김(金)씨 성(姓)을 하사하였다,
4년(684) 안승의 족자(族子) 대문(大文)이 금마저(金馬渚)에서 모반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하고 그 땅을 금마군(金馬郡)으로 하고 고구려 유민들을 분산, 거주하게 하였다. 봉성사(奉聖寺)와 망덕사(望德寺)가 이때에 낙성되었다. |
제32대 효소왕(孝昭王) |
재위기간 | 692 ~ 702 | 성(性) | 金氏 |
부(父) | 신문왕(神文王) | 모(母) | 신목왕후(神穆王后, 一吉飡 欽運의 딸 金氏) |
휘(諱) | 이홍(理洪)·이공(理恭) | ||
효소왕(孝昭王)의 휘(諱)는 이홍(李洪)이며, 신문왕(神文王)의 태자(太子)이다.
즉위하자 당(唐)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로부터 신라보국대장군행좌표도위대장군계림주도독(新羅輔國大將軍 行左豹韜尉大將軍 鷄林州都督)에 봉해졌다. 법률(法律)을 관장하던 좌우이방부(左右理方府)의 명칭이 왕의 휘(諱)를 범하므로 좌우의방부(左右議方府)로 개칭하였다.
4년(695)에 서시(西市)와 남시(南市)를 설치하였다. 입자월(立子月, 음력 11월)을 정월이라 정하였다가
9년(700)에 다시 입인월(立寅月, 1월)을 정월로 삼았고, 이찬(伊飡) 경영(慶永)의 모반(謀叛)을 평정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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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대 효성왕(孝成王) |
재위기간 | 737 ~ 742 | 성(性) | 金氏 |
부(父) | 성덕왕(聖德王) | 모(母) | 소덕왕후(炤德王后, 伊飡 順元의 딸 金氏) |
비(妃) | 혜명부인(惠明夫人, 伊飡 順貞의 딸 金氏) | 휘(諱) | 승경(承慶) |
효성왕(孝成王)의 휘(諱)는 승경이며, 성덕왕의 둘째아들이다.
3년(739) 3월에 혜명(惠明)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고 5월에 동생 파진찬(波珍飡) 헌영(憲英)을 태자(太子)로 삼았다.
4년(740) 후궁(後宮)이 왕비의 질투로 살해된 것에 분개한 후궁의 아버지인 파진찬(波珍飡) 영종(永宗)이 모반하자 이를 평정했다. |
제35대 경덕왕(景德王) |
재위기간 | 742 ~ 765 | 성(性) | 金氏 |
부(父) | 성덕왕(聖德王) | 모(母) | 소덕왕후(炤德王后, 伊飡 順元의 딸 金氏) |
비(妃) | 伊飡 順貞의 딸 金氏 | 차비(次妃) | 만월부인(滿月夫人, 舒弗邯 義忠의 딸 金氏) |
휘(諱) | 헌영(憲英) | ||
경덕왕(景德王)의 휘(諱)는 헌영(憲英)이니 효성왕(孝成王)의 동생이다. 효성왕(孝成王)이 아들이 없으므로 헌영(憲英)을 세워 태자(太子)로 삼았던 까닭에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찬(伊飡) 김순정(金順貞)의 딸을 왕비(王妃)로 맞았으나,
즉위 2년(743)에 다시 서불한(舒弗邯) 김의충(金義忠)의 딸을 왕비(王妃)로 맞이하였다.
3년(744)에 이찬(伊飡) 유왕(惟王)을 중시(中侍)로 삼은 이후, 대정(大正), 조량(朝良), 김기(金耆), 염상(簾相), 김옹(金邕), 김양상(金良相) 등 7인이 경덕왕(景德王) 때에 중시를 지냈다.
7년(748)에는 정찰(貞察) 1명을 두어 관리를 규찰하게 하여, 전제왕권 체제를 유지하려 하였다.
8년(749)에 천문박사 1명과 누각박사(漏刻博士) 6인을 두었다,
12년(753년) 다시 왔으나 오만하고 무례하다는 이유로 왕이 접견하지 않고 돌려보냈다는 기록으로 이를 알 수 있다. 17년(756)에는 율령박사 2인을 두었는데 이는 백성을 생각하는 이상적인 유교정치(儒敎政治)의 기술적인 분야를 발전시키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경덕왕(景德王)은 당나라와의 외교관계에 있어서는, 전통적 방법인 조공과 하정(賀正)의 사신을 11회나 당나라에 파견함으로써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일본(日本)과의 관계는 그리 원만하지 못하여 경덕왕(景德王)이 즉위하던 해에 일본(日本) 사신이 왔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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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대 혜공왕(惠恭王) |
재위기간 | 765 ~ 780 | 성(性) | 金氏 |
부(父) | 경덕왕(景德王) | 모(母) | 만월부인(滿月夫人, 舒弗余 義忠의 딸 金氏) |
원비(元妃) | 신보왕후(新寶王后, 伊飡 維誠의 딸) | 차비(次妃) | 이찬(伊飡) 김장(金璋)의 딸 |
휘(諱) | 건운(乾運) | ||
혜공왕(惠恭王)의 휘(諱)는 건운(乾運)이며 경덕왕(景德王)의 적자이다. 비(妃) 신보왕후(新寶王后)의 입궁 연월은 전하지 않는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원비(元妃)는 각간 위정(角干 魏正)의 딸 신파부인(神巴夫人), 차비(次妃)는 각간 김장(角干 金將)의 딸 창창부인(昌昌夫人)이라 하였다.
즉위 4년(768) 당나라 대종(代宗)으로부터 개부의동삼사신라왕(開府儀同三司新羅王)에 책봉되었다. 재위 중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나고 흉년이 들어 민심이 흉흉하였는데도, 사치와 음탕한 생활을 일삼아 궁중의 기강이 문란해졌다.
4년(768) 일길찬(一吉飡) 대공(大恭)의 모반을 비롯하여 혼란했다,
6년(770) 대아찬(大阿飡) 김융(金融)이 모반을 일으켰다,
11년(775)에 이찬(伊飡) 김은거(金隱居)가 모반을 일으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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