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시 군내면에 있는 산성이 있는 자리로 길이는 1,080m이다. 산성은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가 쌓았다고 전해지나, 조사결과 고구려 때 쌓은 성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여러 책에 고성(古城), 산성, 반월산성 등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대동지지』를 통하여 광해군 10년(1618)에 고쳐 쌓고, 인조 1년(1623)부터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연려실기술』, 『포천군읍지』, 『견성지』에서도 돌로 쌓았다는 기록과 함께 여러 가지 당시 성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현재 성의 옛 자취를 엿볼 수 있는 시설물로는 남쪽과 북쪽의 문터, 성벽 바깥쪽에 사각형 모양으로 덧붙여 만든 치성 4개소, 건물터 6곳, 배수시설이었던 수구터, 장수의 지휘대였던 장대터, 적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세웠던 망대터 등이 있다.
※(포천반월성지 → 포천 반월성)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전문설명
구전에 의하면, 동 반월산성은 궁예가 쌓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94년도에 지표조사를 실시(조사기관 : 강남대 한국학연구소 및 단국대 사학과)하였고, '95-'97까지 발굴조사 실시(단국대학교 박물관)결과 고구려때 축성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길이는 1,080m(북고남저, 서고동저)이고, 시설물로는 문지 2개소(남, 북문지), 치성 4개소(동, 남, 서, 북서치), 건물지 6개소, 우물지, 수구지, 장대지, 망대지 2개소가 있다. 문헌상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각종 지지류에 '고성(古城)', '산성(山城)', '반월산성(半月山城)', '청성(靑城)'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동지지에는 성지(고성)(城池(古城))이 현의 북쪽 1리에 있고, 성산은 사방으로 갈라지고 가파르며 여기에 옛성이 있고, 둘레가 1930척이며, 우물이 2개소이고, 광해군 10년(1618)에 영평에 감영을 두고 이 성을 수축하였으며, 중군을 설치하였고, 인조 원년(1623)에 혁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려실기술, 별집 17권, 변어전고에는 성산고성이 현 북쪽1리에 있다고, 돌로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포천군읍지에는 고성(古城)이 반월산성은 돌로 쌓은 것으로, 둘레가 1937척이고, 가운데 우물이 2개소 있고, 사방으로 갈라지고 가파르며 광해군 무오년(1618)에 산성을 개축하여 주진으로 삼았고, 중군을 설치하였다가 계해년(1623)에 혁파하였으며 지금은 폐해졌으나 수축하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견성지(堅城誌)의 기록에는 고성(古城)이 산성은 관아 뒤의 반월산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1937척이다. 언제 처음 축성하였는지 알 수 없다. 가운데 세개의 큰 우물이 있다. 사방으로 갈라져 있으며 가파른데, 천여명을 충분히 수용할 정도이다. 광해군 무오년에 판관 이성구(判官 李聖求)가 옛 터를 개축하였을 때 구리 숟가락과 쇠솥이 발굴되었다. 숟가락은 자루가 길고 굽으며, 솥은 형체가 좁고 길었는데, 몇 천년이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그 빛깔이 변하지 않았다. 지금은 폐해졌으나 개수하지 못하였다. 감호 양만길(鑑湖 楊萬吉)의 집이 산성 북쪽에 있다. 시에 이르기를, 『산 앞의 무너진 성가퀴는 옛 청성 터, 뿔피리는 늘 저녁 경치 개이기를 재촉하고, 파루를 알리는 두어 피리소리 산 그림자 속에서 들리며, 들구름 다 걷히자 저녁놀 밝아지네』라 하였다. 이 시로써 보건대 성 가운데는 옛날에 장영(將領)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포천 반월성 반월산성원경 서치성남벽하부및성벽노출상태 남문지원경(북쪽에서) 남문지내측서벽 남문지서측외벽전경 서치성전면노출전경 남문지내측동벽 북문지전경(북쪽에서) 토광지역전경 회곽도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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