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영이란 충청·전라·경상도의 삼도수군을 통할하는 통제사가 있는 본진을 말하는 것으로, 삼도수군통제영을 줄여서 표현한 것이다. 선조 26년(1593)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한산진영이 최초의 통제영이다.
지금의 통영시 관내에 통제영을 짓기 시작한 것은 선조 36년(1603) 때의 일이다. 제6대 이경준 통제사가 이곳에 터를 닦고 2년 뒤인 선조 38년(1605)에 세병관 (보물 제293호), 백화당, 정해정 등을 세웠다. 이곳은 고종 32년(1895) 각 도의 병영과 수영이 없어질 때까지 292년간 그대로 유지하다가 일제시대 민족정기 말살정책에 의해 세병관을 제외한 많은 건물이 사라졌다.
당시 건물 중 남아있는 것은 세병관 뿐이며, 1987년 복원된 수항루 1동과 안내판 4기, 그밖에 통제영지 대부분의 지역은 관공서, 주택이 들어 서 있다.
※(통제영지 → 통영 삼도수군통제영)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전문설명
통제영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그 이듬해인 선조 16년(1593) 삼도수군통제사 직제를 새로 만들어 전라좌수사에게 이를 겸임케 한 것에서 비롯되었으며, 통제사의 본영을 삼도수군통제영 또는 약칭으로 통제영, 통영이라 했으며, 임란당시 초대 통제사로 제수된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한산진영이 최초의 통제영이다. 선조 36년(1603) 제6대 이경준<李慶濬> 통제사가 통제영을 이 곳 두룡포[<頭龍浦>; 현 통영시 관내]로 정하고는 통제영터를 닦기 시작하여 2년만인 선조 38년(1605) 음력 7월 14일 세병관(보물 제293호), 백화당, 정해정 등을 창건하여 고종 32년(1895) 각도의 병영 및 수영이 폐영될 때까지 292년간 존속되었다. 한일합방 이후 일제의 민족정기 말살정책에 의해 세병관만 남겨두고 대·소 관아 100여동의 건물들이 모두 헐리고, 이후 학교, 법원, 검찰청, 세무서 등이 들어섰다. '75년 세병관 및 주변지역을 정비하고, '96년 지표조사를 실시하여 유구확인을 하였다. 당시의 통제영의 건물 중 현존하는 것은 보물 제293호로 지정된 "세병관<洗兵館>" 뿐이며, '87년에 복원된 수항루[<受降樓>; 매년 행하는 춘추군점때 가왜장으로부터 항복을 받는 의식을 행하던 곳]1동과 안내판 4기가 있다. 수항루를 지나 우측에는 지방유형 제112호인 두룡포기사비와 비각 건물이, 좌측에는 매표소 및 관리사 건물이 위치하고 있다. 통제사 내아인 운주당, 경무당 지역에는 창원지방법원 통영지원, 창원지방검찰청 통영지청 건물이, 통제사 집무실이었던 백화당과 관아에서 사용하던 각종 물품을 납품한 공고(12공방, 선자방)지역에는 통영초등학교가, 통제사 참모장의 군영인 중영 및 중영내아 등 지역에는 통영세무서가, 그 밖에 파취헌, 분뇨정 등 지역에는 충렬여자 중·상업고등학교가 각각 위치하고 있는 등 통제영지 대부분의 지역은 주요 관공서 건물이 들어서 있다. 통제영지는 동남향으로 통영 앞바다를 굽어 보는 지형으로 통제영지 주변일대는 일반 주택지로 되어 있다. 최근에 통제영지내에 있는 법원, 검찰청사, 세무서, 학교등 관공서 건물에 대한 이전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전경 제승당 통제영지전경 세병관(국보 제305호) 지과문 수항루('87년복원)입구우측 수항루 수항루후면 세병관측면 통제영터전경 제승당유허비 통제영지도 통제영지도 통영지도 통영지도(조선시대) 복원조감도 통제영어선(역사관내전시) 세병관 전경1 전경2 전경3 전경4 전경5 전경6 전경7 전경8 전경9 측면 통제영터전경1 통제영터전경2 통제영터전경3 수항루1 수항루2 수항루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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