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시 장동 계족산(해발420m)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축조된 테뫼식 산성이다. 이 산성은 백제가 쌓은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1998∼99년 발굴을 통해 신라에서 쌓은 것으로 밝혀졌다.
산성의 높이는 약 7∼10m 가량 되며, 동·서·남쪽에 문터를 만들었다. 성 안에서 삼국시대에 만든 큰 우물터가 발견되었고, 성내 건물터에서는 고려시대 기와편과 조선시대 자기편이 발견되어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쌓기 방법은 보은에 있는 신라 삼년산성(사적 제235호)과 같은 방식으로 쌓았다는 것이 발굴을 통해 밝혀졌고, 출토된 토기 중 가장 오래된 것이 6세기 중·후반의 신라토기임이 밝혀졌다. 이후에 나온 토기 형태도 백제계는 소수이며 다수의 신라계 토기가 보여, 한때 백제가 점령하긴 했지만 신라에 의해 만들어진 산성으로 조사되었다.
계족산성은 새로운 발굴 성과에 의해 신라가 쌓은 것으로 나타났으나 아직도 논란이 있으며, 6세기 중·후반 신라나 백제에 의해 만들어진 산성으로, 당시 대전지방이 가진 전략적 중요성을 보여준다.
전문설명
대덕 계족산성이 위치해 있는 곳은 대전시내 북쪽 대전직할시 대덕구 장동 산 85번지 일대이다.
동 유적은 백제시대(AD6C경) 산성으로서 대전지방의 진산인 계족산(해발 423.6m)에서 동북쪽으로 약 1.5Km 떨어진 계족산 지봉정상(해발 420m)을 따라 테뫼식으로 축조되었으며, 성체(城體)는 내탁(內托)공법에 의하여 자연할석(割石)의 외면(外面)을 맞추어 편축(片築)을 주로 하였고 동쪽의 산록을 가로질러 협축(夾築)된 곳도 있다.
문헌상(삼국사기)으로는 이곳에서 백제부흥군과 신라의 김유신·품일장군 등이 싸웠다는 기록이 있으며, 군사전략상 신라(新羅)(경주(慶州))에서 웅진(熊津)(공주(公州))에 이르는 웅진도로를 효과적으로 차단했던 백제부흥군의 주요거점 중 하나로 삼국쟁패 무렵에 있어서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성내에는 남문지(문폭 3.8m) 1개소와 당시의 우물지(직경 1.9m 원형) 1개소, 장대지(將臺址)(추정(推定))와 건물지 등이 남아 있고 성내 건물지에서 고려시대 와편과 조선시대의 자기편(磁器片)이 발견되고 있어 이 산성이 축조이후 고려, 조선시대까지도 계속 중요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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