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읍성은 1417년 무장진의 병마사에 마을을 다스리는 기능을 주어 무장진 병마사 김노(金蘆)가 쌓은 길이 약 1.2km의 평지성이다.
읍성의 남문인 진무루는 앞면 3칸·옆면 2칸의 2층 건물이며, 동문터도 잘 남아 있다. 성 주위를 둘러싼 물길인 해자는 폭 4m·길이 574m 정도로 그 흔적만 남아있다. 성 안의 건물로는 객사·동헌이 있다. 『문종실록』에 의하면 읍성의 둘레는 1,470척(약441m)·높이 7척(약2m)이며, 해자의 둘레는 2,127척(약638m)이고 문는 2개가 있으며, 성의 규모를 넓혀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장읍성은 조선시대 옛 읍성의 모습을 연구하고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전문설명
이 무장읍성(茂長邑城)은 단순히 옛 무장현(茂長縣)의 읍성(邑城)만을 가리키는 바 아니고, 성(城)과 아울러 그 안에 있던 당시의 무장고을, 즉 읍내(邑內)(읍치(邑治), 군현(郡縣)들 각급 (各級) 수령(守令)의 치소(治所) 마을) 전체를 가리킨다. 각칭(各稱)을 무장읍지(茂長邑址)(혹은 무장성읍(茂長城邑))라 해야 정확 명료할 것 같다. 다시 말해 사적(史蹟) 제 346호는 원(元) 무장읍지(茂長邑址) 전역(全域)을 이 안에 현존하는 객사(客舍)(전남지방 유형문화재 제34호), 동헌(東軒)(동상(同上) 제35호 ), 남문(南門) 및 토성(土城)(전남지방기념물 제11호)과 성외(城外)의 해자(垓字) 그리고 성밖에 상당거리 떨어져 있는 사직단지(社稷壇址) 여단지(여壇址)까지 포괄해 가리키는데, 이는 조선시대 읍치(邑治)(고을)의 한 유례로써 심히 희귀한 존재이다.
무장현(茂長縣) 경역(境域)은 원래 장사현(長沙縣)과 무송현(茂松縣)이었는데 여말(麗末)에는 왜구(倭寇)의 침입이 빈번하였다. 조선 태종 17년(1417)에 양현(兩縣)을 합쳐 무장현을 새로이 개설(開設)하고 왜구침습(倭寇侵襲)에 대비하여 진(鎭)을 두어 그 병마사(兵馬使)로써 현사(縣事)(수령(守令))를 겸임(兼任)케 하였다. 후일 이를 파(罷)하고 일반예(一般例)와 같이 현감(縣監)을 두었고, 왜정(倭政) 초(初) 1913년의 부군폐합(府郡廢合)으로 고창군(高敞郡)에 편입(編入)되었다. 태종 17년 처음 이곳에 읍치를 개설할 때 무장진병마사(茂長鎭兵馬使) 김시(金蓍)가 전라도 각 군현의 승려(僧侶)와 백성 2만 수천여명을 거느리고 와서 2월부터 5월에 걸쳐 읍성을 축조(築造)하고 여러 공공건물(公共建物)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남북(南北)으로 뻗은 사두봉(蛇頭峰)을 가운데로 하여 ㅁ자형으로 읍치(읍내)가 형성되어 있는데, 읍성등 중요 유적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
1. 읍성(邑城) 축조연대(築造年代)는 태종 17년이고, ○원(原)은 "석축 주이천육백삼십구척 고칠척 내유이천(石築 周二千六百三十九尺 高七尺 內有二泉):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및「여지도서(輿地圖書)」 "(이보다 앞서는 「문종실록(文宗實錄)」 1년 8월 병술조(丙戌條)에는 "읍성 주회일천사백칠십척 고칠척……해(해)자 주회이천일백이십칠척……(邑城 周回一千四百七十尺 高七尺…海(垓)字 周回二千一百二十七尺……)"이라한 바와 같이 석성(石城)이었으나 지금은 토성(土城)인데 (토성으로 개축(改築)한 까닭과 시기를 전하는 기록은 없음), 길이 약 1.2㎞, 높이 약 1∼2m, 폭(幅) 상부(上部) 약 1∼2m, 하부(下部)약 3∼5m의 장방형(長方形) 평지성(平地城)이다. ○ 거의 완형(完形)에 가까운 남문(진무루(鎭茂樓))과 동문지(東門址)(옹성지(甕城址))를 포함하여 대부분이 남아있는데 오직 남문 좌우측의 일부(약 230m)만이 훼손되어 없어졌다(도로개설 및 민가밀집지역(民家密集地域)). ○남문 주위에 석축이 남아 있고, 또 동문지의 토성단면(土城斷面)내부에 열석(列石)이 보이는데 이는 토성으로 개축하기(덮기) 이전의 석성(石城)의 구조로 짐작된다.
2. 해자 (垓字) ○흔히 성지(城池) 혹은 성호(城濠)라 하는 바와 같이 해자(호)는 방어목적(防禦目的)의 성곽(城郭)에 필히 병설(倂設)되었던 것인데도 현재 성과 함께 해자가 남아있는 예(경우)가 심히 드물다. ○무장해자(茂長垓字)는 남문의 동서 약 150m만 없어졌을 뿐, 폭(幅) 약4m로 , 길이 약574m에 이르는 흔적이 성 둘레에 완연(宛然)하다.
3. 객사(客舍) ○사두봉(蛇頭峰)남록(南麓)의 거의 읍내 중심에 자리잡고 있으며 정면 11칸, 측면 3칸, 건평(建坪)80평, 기단석축(基壇石築)고(高) 80㎝이다. ○관명(館名)은 송사관(松沙館)(무송(茂松) 장사(長沙)의 약(略))이고 조선후기에 지어졌음은 확실하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수년 전까지 면사무소로 사용된 까닭에 특히 내부구조의 변형이 심하였는데, 1990년에 원형에 가깝도록 일대수리(一大修理)를 가하였다.
4. 동헌(東軒) 당호(堂號)는 취백당(翠白堂)이고 성내의 서남쪽 현(現) 무장초등학교 교사(校舍)뒤편에 위치하며 정면 6칸, 측면 4칸, 건평 45평, 석축기단 고(高) 45㎝이다. ○ 인조(仁祖) 13년 (1635)에 창건되어 수차(數次)의 개건(改建)을 거쳤다 하고, 1983년에 크게 중건(重建)되었다. ○일정(日政) 초(初) 모든 고을에서 거의 종전(從前)의 동헌(여러 아사(衙舍)의 중심건물 )은 군청 또는 면소(面所)로, 객사(客舍)는 학교로 개조 사용되었는데 무장의 경우는 그 반대이다.
5. 진무루(鎭茂樓) ○읍성의 남문인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이층누문(二層樓門)으로 건평 4평이다. ○광해군 4년(1612)에 개건(改建)되어 여러 차례의 개수를 거쳤다 하고, 1984년에 크게 중창되었다.
6. 성황당지(城隍堂址) 및 사직단지(社稷壇址)여단지(여壇址) 상기(上記) 뚜렷한 유적외 , 모든 읍치(邑治)의 성내(城內)에 반드시 있었던 성황당지가 확인되고, 성밖에 필히 있었던 사직단지(22,730㎡)가 서북 약 1.5㎞ 지점인 무장면 월림리(月林里)에 , 여단지(23,206㎡)가 동북 약 2㎞ 지점인 무장면 도곡리(道谷里)에 확실히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각 고을에서 필수요건의 하나이던 향교(鄕校)가 타지방과 같이 성밖에 현존하고 있다.
1988년이래 여러 차례의 조사를 통해 무장읍지에는 현재까지 옛 고을(읍치)에서 2대 핵심 건물이던 객사와 동헌이 공존하고 있고, 또 읍성(토성)이 남문 및 동문(옹성)지와 함께 그 외주(外周)의 해자와 나란히 병존하고 있어서 다시 말해 객사와 동헌, 성곽과 해자가 같이 남아 있어서 심히 드물게 보는 중요한 유적지임이 분명해졌다. 뿐만 아니라 향청(鄕廳)· 연청(椽廳)· 내아(內衙)와 성황당· 사직단· 여단 등 여러 공존시설의 원위치도 옛 지도나 고노(古老)들의 증언을 통해 거의 확인할 수 있어서 1991년 2월에 사적 제 346호로 지정하였다. 더욱이 무장읍지는 신문물 전래이후 다른 고을의 경우와는 달리 성밖의 고창 ∼ 영광 간 대로변으로 신시가지가 형성 개발되고, 성내에 상기(上記) 여러 아사(衙舍)와 객사를 개조한 국민학교· 면사무소· 경찰지서 등 공존건물과 20호의 민가가 있을 뿐 현재 거의가 국공유(國公有)의 야산 (野山) ·농지(農地)· 운동장 등으로 남아있다. 위와 같이 여러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으므로 무장읍지는 오늘날 전국에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옛 우리 읍치(고을)의 전형을 조사 복원하는데 가장 알맞은 적지(適地)이다.
무장동헌 무장객사(송사관) 남문 토성 및 성황당지 남문(진무루) 남문과 서쪽 토성 남문과 옹벽 동쪽에서 바라 본 남문과 토성일대 동헌 전경 동헌(취백당) 무장객사(송사관) 전경 무장객사(송사관) 정면 발굴 현장 서쪽 토성에서 바라 본 남문일대 읍취루 동쪽 발굴 현장1 읍취루 동쪽 발굴 현장2 토성 외곽 토성 외곽에서 바라 본 동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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