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339호 전주 경기전

오늘의 쉼터 2008. 2. 22. 12:47



종     목 사적  제339호
명     칭전주 경기전 (全州 慶基殿)
분     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제사유적/ 제사터
수량/면적 49,590㎡
지 정 일 1991.01.09
소 재 지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3가 102
시     대조선시대
소 유 자국유
관 리 자전주시

일반설명

조선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신 곳이다.

태종은 1410년 전주·경주·평양에 태조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를 모시고 어용전이라 하였다. 그 후 태종 12년(1412)에 태조 진전이라 부르다가 세종 24년(1442)에 와서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흥전으로 달리 이름을 지었다. 경기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6년(1614)에 다시 고쳐 지었다.

건물의 구성은 본전·헌·익랑 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를 내삼문과 외삼문으로 둘렀다.


※(경기전 → 전주 경기전)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전문설명


이곳은 조선(朝鮮) 이태조(李太祖)의 영정(影幀)을 봉안(奉安)한 곳이다.

전주(全州)는 원래 이왕조(李王朝)의 시조(始祖)인 신라(新羅) 사공(司空) 이한공(李翰公)의 발상지(發祥地)라 하여 전주이씨(全州李氏) 후손(後孫)들이 조상(祖上)을 받드는 성역(聖域)으로 삼아온 터전이기도 하다. 태종(太宗)은 1410년에 완산(完山)(전주(全州)), 계림(鷄林)(경주(慶州)), 평양(平壤) 3개소(3個所)에 태조(太祖) 강헌대왕(康獻大王)의 영정(影幀)을 봉안(奉安)하여 어용전(御容殿)이라 하였다. 그후 세종(世宗) 24년(1442)에는 전주(全州)에 경기전(慶基殿), 경주(慶州)에 집경전(集慶殿), 평양(平壤)에 영숭전(永崇殿)이란 호칭(呼稱)을 붙였다. 그러나 경기전(慶基殿)은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소실(燒失)되었고, 그후 광해군(光海君)6년(1614)에 중건(重建)된 것이다. 한편 영조(英祖)47년(1771)에는 경기전(慶基殿) 북(北)쪽에 조경묘(肇慶廟)를 세워 이왕조(李王朝)의 시조(始祖)인 이한공(李翰公)과 시조비(始祖비)인 경주김씨(慶州金氏)의 신위(神位)를 봉안(奉安)하였다.

현존(現存)하는 경기전(慶基殿) 건물(建物)의 배치(配置)는 남(南)쪽의 홍살문(紅箭門)을 지나 외삼문(外三門)을 들어서면 양측에 문간체(門間體)의 익사(翼舍)를 달아낸 내삼문(內三門)에 면(面)하게 되는데 그 통로(通路)는 전(塼)으로 바르게 깐 신도(神道)이다.

외삼문(外三門) 내정(內庭) 좌우(左右)로는 사고석 담장을 돌렸는데 동측(東側)에는 협문(夾門)을 두고 포장도(鋪裝道)를 전기(前記) 신도(神道)에서 이곳으로 연결하였다. 그리고 내삼문(內三門) 문간체에 양측으로 연결되는 담장에도 각기 1개소씩 일각문을 두었다. 내삼문(內三門)을 들어서면 그 북(北)쪽에 내·외삼문(內·外三門)과 남북축(南北軸)을 맞추어 정전(正殿)이 놓이고 그 동·서(東·西) 양측에 익사(翼舍) 또는 행각(行閣)이 연결되어 꺾이어 남향(南向)하다가 끊기어 그 나머지 부분을 담장으로 연결하여 폐쇄공간(閉鎖空間)을 이루고 있다.

정전(正殿)은 지대석(地臺石)과 면석(面石), 갑석(甲石)으로 이루어진 춤 높은 기단 위에 정면(正面) 3간(間), 측면(側面) 3간(間) 다포계(多包系) 형식(形式)의 맞배집인데 그 전면(前面)에 바로 붙여 춤이 약간 낮은 기단을 정전(正殿)기단과 접속시켜 앞으로 돌출시키고 그위에 첨각(添閣)을 두어 마치 능침(陵寢)의 丁자각(丁字閣)과 같은 평면(平面)을 하였다. 이 첨각기단(添閣基壇)의 동·서·남면(東·西·南面)에는 각 1개소씩 계단을 두어 전(塼)을 깐 포도(鋪道)와 연결되게 하였는데 남(南)쪽에는 폭(幅)이 넓은 신도(神道)와 연결되고 동·서(東·西)쪽은 폭(幅)이 아주 좁은 도로(道路)로 연결되어 한번 꺾이어 내삼문(內三門)쪽으로 향하였다. 정전(正殿)은 전면(前面)에는 띠살 사분합(四分閤)을 달고 측면(側面)에는 전퇴(前退)쪽으로 외짝의 띠살문을 달았으며 그외의 면은 심벽을 쳤다. 공포는 창방과 평방위에 배열한 내·외(內·外) 삼출목(三出目)의 다포형식(多包形式)인데 측면(側面)에는 포작(包作)을 배열하지 않은 것이 특이하다. 또 전면(前面)의 첨각(添閣)은 전·측면(前·側面)이 단칸으로 벽없이 트이었다. 공포는 주심포(柱心包) 형식(形式)이고 지붕은 전면(前面)에 풍판(風板)을 두고 정전(正殿)처마 밑으로 연결시켰다.

정전(正殿) 양측에 접속(접속)된 익사(翼舍)는 동서(東西)로 2간식(間式) 연결되다가 남북(南北)으로 뻗은 4간(間)짜리 행각(行閣)과 연결되었는데 이들은 내정(內庭)쪽으로는 트인 열주(列柱)를 보이고 외측(外側)으로는 벽체(壁體)로 막혀 있다. 또 정전(正殿), 익사(翼舍), 행각(行閣)의 기단(基壇)을 약간씩 단차(段差)를 두어 위계(位階)를 나타낸 것 같다. 이 행각(行閣)의 공포는 초익공(初翼工) 형식(形式)이다.

경기전(慶基殿)의 건물 배치에 대(對)하여 상세한 그림으로 그린 '경기전(慶基殿), 조경묘도형(肇慶廟圖形)'이 있는데 여기에는 현재(現在) 없어진 부속건물(附屬建物)들과 별전(別殿)이 있고 서남(西南)쪽에 전사청(典祀廳), 동·서재(東·西齋), 수복방(守僕房), 제기고(祭器庫) 등의 부속건물(附屬建物)이 배치되었으며 동북(東北)쪽에는 별전(別殿)과 그 앞에 조산(造山)을 두고 있는 광역(廣域)의 범위를 조영(造營)하였다




경기전(본전)

조경묘(본묘)

입구 전경

조경묘

좌측에서 바라 본 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