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대에 위치한 미륵리사지는 석불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석굴사원터이다.
거대한 돌을 이용해 석굴을 쌓은 후 불상을 모셨으며, 위에 목조건물이 있었던 자취가 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조사결과 ‘미륵당초’라고 새겨진 기와가 나와 연대를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추정한다. 석불입상(보물 제96호)·5층석탑(보물 제95호)·석등·당간지주 등 중요한 문화재들이 남아있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가 망함을 슬퍼해 금강산으로 갔는데, 도중에 누이인 덕주공주는 월악산에 덕주사를 지어 남쪽을 바라보도록 돌에 마애불을 만들었고, 태자는 이곳에서 석굴을 지어 북쪽을 향해 덕주사를 바라보게 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북쪽을 바라보는 특이한 구조를 가진 절터이며, 석굴사원으로서 방식은 다르지만 석굴암을 모방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중원미륵리사지 → 충주 미륵대원지)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전문설명
이 사지(寺址)는 미륵대원지(彌勒大院址)라고도 하며 석조(石造)와 목구조(木構造)를 합성(合成)시킨 석굴사원(石窟寺院)으로 석굴(石窟)을 금당(金堂)으로 한 북향(北向)의 특이(特異)한 형식(形式)을 취한 유일(唯一)한 유적으로 유명하다. 현재 석굴(石窟) 상부(上部)의 목구조(木構造)는 남아있지 않으나 하부(下部) 석굴(石窟) 구조물(構造物) 중앙(中央)에는 주존불(主尊佛)인 미륵여래(彌勒如來)가 안치(安置)되어있으며 1977년 발굴(發掘)에 의해 전실(前室)에 해당되는 구역에서 초석(礎石)들이 발견(發見)되어 평면(平面)의 구조(構造)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석굴(石窟) 앞쪽에는 석등(石燈)을 비롯하여 오층석탑(五層石塔)·귀부(龜趺)·당간지주(幢竿支柱)·불상대좌(佛像臺座) 등 석조물(石造物)들이 많이 남아있는데 이들은 그 수법으로 보아 고려초기(高麗初期)인 10세기경(世紀頃)의 유물로 추정되고 있다.
발굴조사시(發掘調査時) 「미륵당(彌勒堂)」「명창삼년금당개개와(明昌三年金堂改蓋瓦)」등의 명문와(銘文瓦)가 출토(出土)되어 고려(高麗) 명종이십이년(明宗二十二年)(1192년) 금당(金堂)의 기와를 새로 이였음을 알 수 있으며 석굴(石窟)과 전실(前室)의 목구조(木構造)가 소실된 것은 13세기(世紀)였고 그 후 곧 복원(復元)되었다가 조선초기(朝鮮初期)에도 대중수(大重修)가 있었고 또다시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소실되었던 것을 18세기 때 다시 수리(修理)가 있었지 않았나 추정된다. 그 후 폐사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1936년에 있었던 큰 수해(水害)로 크게 피해를 입어 법등(法燈)이 끊기지 않았나 생각된다.
경내(境內)에는 현재 보물로 지정된 석불입상(石佛立像)과 오층석탑(五層石塔)이 있고 그 외에 석등(石燈)·삼층석탑(三層石塔)·귀부(龜趺)·당간지주(幢竿支柱)·불좌대(佛座臺) 등 많은 석조물(石造物)들이 남아있어 창건당시(創建當時)의 사격(寺格)을 말해주고 있다.
중원미륵리사지 중원미륵리사지 중원미륵리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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