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선국사가 하룻밤 사이에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운주사는 나지막한 야산 분지에 있는 고려시대의 절터이다.
절을 처음 지은 연대는 정확히 알지 못하나, 고려 중기에서 말기까지 매우 번창했던 사찰로 보이며, 15세기 후반에 다시 크게 지어졌다가 정유재란으로 폐찰되었다. 운주사(雲住寺)는 ‘구름이 머무는 곳’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배를 움직인다’는 뜻의 운주사(運舟寺)로 불리기도 한다.
현재 돌부처 70구와 석탑 18기만이 남아 있으나, 조선 초기까지는 천 여 구의 불상과 탑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산과 들에 흩어져 있는 70여 구의 돌부처들은, 수 십 ㎝에서 10m 이상의 거대한 돌부처까지 그 크기가 매우 다양하다. 평면적이면서 토속적인 생김새에 어색하고 균형이 잡히지 않은 신체 구조는 고려시대 지방적인 특색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석탑 또한 그 모양이나 무늬의 표현방식이 매우 독특하여, 3층·5층·7층 등 층수도 다양하다. 둥근 공모양의 원형탑이나 호떡 모양의 돌을 올려놓은 듯한 원판형탑 등 특이한 모양의 탑도 있다. 또한 탑의 표면에 ‘X’, ‘◇’, ‘川’과 같은 기하학 무늬들이 새겨 있어 특이하다.
운주사에는 누운 부처(와불)가 있어 유명하다. 도선이 천불천탑을 하룻밤에 세울 때 맨 마지막으로 와불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는데, 공사에 싫증난 동자승이 닭이 울었다고 거짓말을 하여 불상을 세우지 못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운주사는 특이한 돌부처와 석탑이 모두 한 절 안에 있다는 점에서 천불천탑에 대한 독특한 신앙을 보여주는 좋은 예로서 우리나라 미술사와 불교사 연구에 중요한 곳이다.
전문설명
운주사는 돌로 된 석불< 石佛 >·석탑< 石塔 >이 1천구씩 있던 우리나라의 유일한 절로 유명하다. 현재는 석불 70구와 석탑 18기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동국여지승람< 『東國輿地勝覽 >』에는 석불·석탑 각 1천구씩 있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조선< 朝鮮 > 초기< 初期 >까지는 분명히 있었다고 생각된다. 현재 남아 있는 석불상은 10m의 거구에서부터 수십 cm의 소불< 小佛 >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의 불상들이 산과 들에 흩어져 있다. 이들 불상은 대개 비슷한 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평면적이고 토속적인 얼굴모양, 돌기둥 모양의 신체, 어색하고 균형이 잡히지 않은 팔과 손, 어색하면서도 규칙적인 옷주름, 둔중한 조각기법이 어느 불상에서나 볼 수 있는 특징인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고려시대< 高麗時代 >에 지방화된 석물상 양식과 비슷한 경향을 보여 주고 있어서 흥미로운 사실이다. 아마도 석인상< 石人像 >을 제작하던 석공< 石工 >들이 대거 동원되어 만든 고려석불상이라 하겠다. 석탑 18기도 산야< 山野 > 여기저기에 즐비하게 서 있는데 둥근 원형탑< 圓形塔 >, 원판형탑< 圓板形塔 > 같은 특이한 모양의 탑도 있으며, 3층, 5층, 7층 등 층수도 다양한 편이다. 일반적인 사각형탑들은 너비가 좁고 높이가 고준< 高峻 >하며, 옥개석< 屋蓋石 >이 평판적이어서 고려석탑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연꽃받침석들이 더러 보이는 것 또한 고려 양식의 특징이다. 특히 이 석탑에서 눈에 띄는 것은 기단< 基壇 >이나 탑신석< 塔身石 >의 면석< 面石 >에 'X', '◇', '川' 같은 기하학< 幾何學 > 무늬들이 돋을새김과 선새김 등으로 새겨져 있는 점이다. 이러한 기하학 무늬의 애용은 불상의 기하학적 주름과 더불어 이 운주사 유적의 가장 특징적인 양식으로 크게 주목된다. 이처럼 특이한 석불·석탑 천여기 씩이 한 절 안에 봉안되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예이어서 천불천탑< 千佛千塔 >에 대한 독특한 신앙< 信仰 >을 보여 주는 가장 중요한 유적으로 높이 평가되며, 아울러 미술사< 美術史 > 내지 불교사< 佛敎史 > 연구< 硏究 >에 크게 이바지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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