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시기(538-660)의 중심 사찰이 있던 자리다. 발굴조사 때 강당터에서 나온 기와조각 중 ‘태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太平八年 戊辰 定林寺 大藏唐草)’라는 글이 발견되어, 고려 현종 19년(1028) 당시 정림사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즉 고려시대에 백제사찰의 강당위에 다시 건물을 짓고 대장전이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림사의 주요 건물 배치는 중문, 오층석탑, 금당, 강당에 이르는 중심축선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놓이고, 건물을 복도로 감싸고 있는 배치를 하고 있다. 그러나 특이하게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형이 아닌, 북쪽의 간격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으로 되어있다.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절앞의 연못이 정비되어 있고,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1933년에 지어졌다. 백제 때에 세워진 5층석탑(국보 제9호)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다. 출토유물로는 백제와 고려시대의 장식기와를 비롯하여 백제 벼루, 토기와 흙으로 빚은 불상들이 있다.
전문설명
이 절터는 백제< 百濟 >가 부여< 扶餘 >로 왕도를 옮긴 시대 (538-660)의 중심사 사찰터이다. 경내에는 백제시대에 건립된 오층석탑< 五層石塔 >(국보 제9호) 과 고려시대에 조성된 석불좌상< 石佛坐像 >(보물 제108호)이 남아 있다. 이 절터는 몇 차례의 학술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절의 배치< 配置 >와 각 시대의 유물들이 수습< 收拾 >되었다. 특히 현재 석불좌상이 있는 건물터에서 발견된 기와 중에 "태평 8년 무진정림사대장당초< 太平八年 戊辰定林寺大藏唐草 >"라고 새겨진 글이 나와 고려시대에는 정림사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요< 遼 > 성종< 成宗 >의 태평 8년은 고려 현종< 顯宗 > 19년(1028)에 해당된다. 고려시대에 백제사찰의 강당 위에 다시 건물을 짓고 대장전< 大藏殿 >이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정림사의 중요 건물 배치는 중문< 中門 >, 오층석탑, 금당< 金堂 >, 강당< 講堂 >의 중심축선< 中心軸線 >이 남북 일직 선상에 놓이고, 이를 회랑< 回廊 >으로 두른 장방형< 長方形 >의 평면 위에 남북일탑식< 南北一塔式 > 가람배치< 伽藍配置 >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가람배치는 7세기 일본의 사찰가람에 영향을 주어 고대 일본의 사찰 가람배치의 본이 되었다. 발굴조사로 드러난 절앞의 연못이 정비되어 있고, 석불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건물은 1993년에 새로 세운 것이다. 백제시대와 고려시대의 막새기와를 비롯하여 백제벼루, 토기 등 사찰용품과 소조< 塑造 > 불상< 佛像 >들이 출토되어 당시의 문화생활을 알 수 있다.
부여정림사지 부여정림사지 부여정림사지 연지 부여정림사지 강당지 금당지 동편 건물지 박물관 내부전시실 박물관 내부전시실 박물관 내부전시실 박물관 내부전시실 박물관 내부전시실 북승방지 서편 건물지 석불좌상 대좌부분 석불좌상 두부 석불좌상 하대석부분 석불좌상 연못 전경 연못과 정림사지 전경 정림사지 박물관입구 정림사지 복원 모형 정림사지 오층석탑 정림사지 전경 정림사지 중문지1 정림사지 중문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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