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293호 정읍 전봉준 유적

오늘의 쉼터 2008. 2. 21. 20:02



종     목 사적  제293호
명     칭정읍 전봉준 유적 (井邑 全琫準 遺蹟)
분     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인물기념/ 생활유적
수량/면적 225㎡
지 정 일 1981.11.28
소 재 지 전북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458-1
시     대조선시대
소 유 자공유
관 리 자정읍시

일반설명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인 전봉준(1855-1895)이 살던 집이다.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전봉준은 조선 고종 27년(1890)인 30세 때 동학에 몸을 담아, 동학 제2대 교주인 최시형으로부터 고부지방의 동학접주로 임명되었다. 그는 관리들의 횡포에 맞서 농민과 동학교도들을 조직해 동학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옛집은 조선 고종 15년(1878)에 세워졌다. 앞면 4칸·옆면 1칸의 초가집으로 안채가 구성된 남향집이다. 동쪽부터 부엌·큰방·웃방·끝방 순서의 일(一)자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남부지역 민가 구조와는 다른 방향으로 되어 있는 특징을 보여준다.


전문설명


동학혁명(東學革命)의 지도자인 전봉준선생(全琫準先生)이 태어난 옛집으로, 그는 1854년(철종(哲宗)5)에 당시의 행정구역으로는 고부군(高阜郡) 궁동면(宮東面) 양교리(陽橋里)에 해당한 이 집에서 아버지 전창혁(全彰赫)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신분은 향반(鄕班)으로 자(字)를 명숙(明淑)이라 했는데, 몸집이 작아서 녹두(綠豆)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고, 얼굴모양이 녹두 같았다고도 한다. 그 후에 전봉준(全琫準)은 아버지처럼 서당의 훈장(訓長)을 할 정도로 학식(學識)도 있었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약을 팔아 생계를 꾀하거나 방술(方術)도 배웠다는 기록이 있다.

어려서 태어난 이곳을 떠나 태인현(泰仁縣) 산외면(山外面) 동곡리(東谷里)에서 살았을 때에는 세마지기(3두락(斗落))의 전답(田畓)을 가지고 있는 정도였고, 한때는 후일 동학(東學)의 지도자들이 된 김개남(金開男)·송희옥(宋喜玉)과 함께 전주(全州) 봉상면(鳳翔面) 구미리(龜尾里)에 살기도 하였다. 동학(東學)에는 30세때에 입도(入道)하여 고부(古阜)지방의 접주(接主)가 되고 1893년 고부군수(古阜郡守) 조병갑(趙秉甲)에게 폐정의 시정을 진정하기도 하였다. 이듬해에는 1,000여명의 군민(郡民)을 모아 고부군아(古阜軍衙)를 습격했는데, 이로부터 동학혁명(東學革命)이 본격적인 시작을 보게되었다.

이 옛집은 정면 4칸(間), 측면 1칸(間)의 초가집으로 안채가 구성되고 잡석으로 만든 축대 위에 남향하였다. 동쪽에서부터 부엌·큰방·웃방·끝방의 순서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남부지역의 민가구성(民家構成)과는 다른 방향으로 되어있는 특징을 보여준다. 큰방과 웃방의 사이는 장지로 간막이가 되어 있어서 필요한 때에 큰 공간으로 터놓을 수 있으며, 천정은 모두 연목(椽木)이 드러나 보인다. 두 개의 방 앞으로는 퇴마루를 놓았고, 방에서는 퇴살문으로 드나든다.




전봉준선생고택지

전봉준선생고택지

전봉준선생고택지

전봉준선생고택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