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진영으로, 이곳은 서울로 통하는 바닷길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대였던 곳이다. 처음 세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현종 7년(1666)에 강화에 포함되었다.
높직한 평지에 세운 포대인 돈대와 대포를 쏘는 포대, 그리고 포를 쏠 때 필요한 불씨를 보관하고 포병을 지휘하는 파수청이 있다. 돈대는 중요한 전략지에 있어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함대와 신미양요 때는 미국 함대와 싸웠다.
1980년에 행한 발굴조사 결과 7개의 포탄과 2개의 상평통보 등이 출토되었고 주춧돌과 화덕자리를 발견하였다.
전문설명
서해(西海)로부터 강화만(江華灣)을 거쳐 수도(首都)서울로 침입(侵入)하려는 어떠한 함대세력(艦隊勢力)도 인후(咽喉)의 지점(地點)인 손돌항(孫乭項)에 천험(天險)의 요새(要塞)를 이용(利用) 사전(事前)에 저지(沮止)하려는 군사적(軍事的) 요충(要衝)으로 덕포진(德浦鎭)이 창설(創設)되기는 임란(任亂)의 쓰라린 체험(體驗)을 겪은 선조조(宣祖朝)로 추정(推定)된다.
즉 이는 광해(光海)8(1616)년 5월 병자조(丙子條)에 '선왕조신설덕포(先王朝新設德浦)'란 기록(記錄)이 보이고 또한 현종(顯宗)7(1666)년 2월 무오조(戊午條)에 '이강화덕포진어통진철관진어풍덕정포진어교동이근읍육군315인분급삼진(移江華德浦鎭於通津鐵串鎭於豊德井浦鎭於喬洞以近邑陸軍315人分給三鎭)'이라고 나타나는 바 이는 즉 덕포진(德浦鎭)이 강화(江華)에 속(屬)해 있고 따라서 삼진(三鎭)은 교동(喬洞)과 가까운 읍(邑)이니 육군315명(陸軍315名)을 나누어 배치(配置)하라는 내용(內容)이다.
더욱이 강화(江華)는 서울과 가까운 도서(島嶼)임과 동시에 육지(육지)와 연결(連結)시키는 염하(鹽河)는 간만(干滿)의 차(差)가 심(甚)한 까닭으로 예로부터 전란(戰亂)을 당(當)하면 피난(避難)하는 고장이기도 하다. 그래서 고려(高麗) 고종(高宗)은 동왕(仝王)23(1236)년(年) 몽고군(蒙古軍)의 침입(侵入)을 받고 그곳으로 몽진(蒙塵)하였으며 또한 조선인조(朝鮮仁祖) 때도 정묘(丁卯)(1627)와 병자(丙子)(1636) 호란(胡亂)때 몽진(蒙塵)과 피난(避難)을 하여 쓰라린 전란(戰亂)을 겪은 곳이기도 하다.
그후 효종(孝宗)7(1656)년에는 월관진(月串鎭)을 비롯한 광성보(廣城堡) 그리고 정포보(井浦堡) 등(等)을 설치(設置)하는가 하면 숙종(肅宗)5(1679)년에는 수사(水使) 이 우(李 偶)가 각도(各道)의 승군(僧軍)으로 하여금 경강어구(京江於口)에 요새(要塞)를 만들고 강화(江華)의 요소(要所)마다에는 곽대(곽臺)와 포대(砲臺)를 설치(設置)하는 한편 통진(通津)의 문수산성(文殊山城)을 쌓아 해로(海路)로 침입(侵入)하는 적(敵)에 대비(對備)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동왕(仝王)8(1682)년 3월에는 월관진(月串鎭)이 이제까지는 주진(主鎭)이었으나 덕포진(德浦鎭)을 주진(主鎭)으로 승격(昇格)하여 영종(永宗)과 안흥진(安興鎭)을 관장(管掌)하게 하였다. 이어 동왕(仝王)20(1694)년 통진현(通津縣)이 도호부(道護府)로 승격(昇格)되면서 부(府)가 진무좌영장(鎭撫左營將)을 겸임(兼任)하게 됨에 따라 덕포진(德浦鎭)도 강화(江華)로부터 통진(通津)으로 그 예속(隸屬)이 변경(變更)되었고 따라서 영조(英祖)36(1760)년에 편찬(編纂)된 여지도서(輿地圖書) 통진부(通津府) 진보조(鎭堡條)에 따르면 덕포진(德浦鎭)에는 종삼품(從三品)의 수군첨사(水軍僉使)가 수군316명(水軍316名)을 지휘(指揮)했으며 부(府)에서 전속수영(專屬水營)의 거리(距離)는 남(南)으로 15리(15里)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 후(後) 정조(正祖)때에는 일시(一時) 만호직(萬戶職)으로 격하(格下)되기도 하였으나 김정호(金正浩)(?∼1864)가 지은 대동지지(大東地志) 통진(通津) 진보조(鎭堡條)에 따르면 수군첨사(水軍僉使)가 소속(所屬)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어 고종(高宗)8(1871)년 3월에 편찬(編纂)된 통진읍지(通津邑誌)에 의(依)하면 덕포진(德浦鎭)은 통어영(統禦營)에 속(屬)하게 되었으니 즉 군사상(軍事上)으로 통어영(統禦營)에 예속(隸屬)되고 행정상(行政上)으로는 통진관할권(通津管轄權)에 있었던 것으로 첨사(僉使) 1명(名)과 수군(水軍) 316명(名) 그리고 방선(防船) 2척(隻)·사후선(伺候船) 3척(隻)이 소속(所屬)되는 한편 건물(建物)로는 객사(客舍) 3간(間) 내외(內外) 진사(鎭舍) 9간(間), 삼문(三門)과 행랑(行廊)이 10간(間) 어변정(禦變亭) 10간(間)이 있었으며 그 후 신미양요후(辛未洋擾後)에 중건(重建)한 군기고(軍器庫) 3간(間)과 손돌항(孫乭項) 포대(砲臺)와 돈대(墩臺) 사이에는 방포사(傍砲士) 파수청(把守廳) 4간(間)을 건립(建立)하기도 하였다.
그 후 광무(光武)3(1899)년에 편찬(編纂)된 김포읍지(金浦邑誌) 및 지도성책(地圖成冊)에 따르면 고종(高宗)13(1876:병자(丙子))년 봄 손돌항(孫乭項)에 포대(砲臺) 15혈(穴)과 포대수직청(砲臺守直廳)을 두었다 하였으니 곧 이 포대(砲臺)가 1980년과 1981년에 발굴(發掘)과 복원(復元)을 시행(施行)한 현신안리(現新雁里) 포대(砲臺)인 바 때에 동왕(仝王)11(1874)년 5월 운현궁별주명(雲峴宮別鑄銘)의 중포4문(中砲4門)과 소포2문(小砲2門)이 고정포대(固定砲臺)에 거포(擧砲)된 채 발굴(發掘)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포대(砲臺)는 기미년(己未年)에 폐지(廢止)되었다 하였으니 즉 이는 동왕(仝王)32(을미(乙未):1895)년으로 새로이 천험(天險)의 지형(地形)을 이용(利用)한 전략적(戰略的) 요충지(要衝地)로서의 면모(面貌)를 갖춘지 19년만에 보람없이 폐쇄(閉鎖)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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