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245호 경주나정

오늘의 쉼터 2008. 2. 20. 21:37


종     목 사적  제245호
명     칭경주나정(慶州蘿井)
분     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주거건축/ 주거시설
수량/면적 5,901㎡
지 정 일 1975.11.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탑동 700-1
시     대신라
소 유 자국유
관 리 자경주시

일반설명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태어난 전설을 간직한 우물이다.

신라가 세워지기 전의 경주지역 일대는 진한의 땅으로 6명의 촌장들이 나누어 다스리고 있었다. 그 중 고허촌장인 소벌도리공이 양산 기슭 우물가에서 흰 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울고 있는 것을 발견하여 그곳으로 가보니 빛이 나는 큰 알이 하나 있었다. 알 속에서 남자아이가 태어나자 하늘에서 보내준 아이라고 생각하여 잘 길렀다. 박처럼 생긴 알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성을 박(朴)이라 하고, 세상을 밝게 한다는 뜻에서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고 하였다. 아이가 13살이 되던 해인 B·C 57년 왕의 자리에 올라 나라를 세우고 서라벌이라고 이름지었다.

이곳에 있는 비석은 조선 순조 2년(1802)에 박혁거세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


전문설명


오릉(五陵)에서 동남(東南)쪽을 바라보면 1㎞쯤 떨어진 소나무숲 속에 시조유허비(始祖遺墟碑) 옆에 우물이 있는데 이 우물을 나정(蘿井)이라 한다.

이곳은 신라(新羅)의 시조(始祖)인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탄강전설(誕降傳說)이 깃든 곳이다. 신라(新羅)의 건국신화(建國神話)에 대해서는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다 같이 언급되어 있으나 후자(後者)의 것이 더 상세하고 신화적(神話的)인데 그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한(前漢) 지절원년(地節元年) 임자((壬子) B.C 69) 3월, 초하룻날 신라(新羅) 건국(建國)의 주역(主役)들인 육촌(六村)의 촌장(村長)들이 각각(各各) 그 자제(子弟)를 거느리고 알천(閼川)옆의 언덕에 올라 회합을 갖고 육촌(六村)에는 다스릴 군주(君主)가 없어 백성들이 방일(放逸)하여지고 나태하여지니 유덕(有德)한 인물(人物)을 선출하여 군주(君主)로 모시고 도읍(都邑)을 정하자고 결정하였다. 이와같이 결정을 한 후에 그 일행(一行)이 높은 곳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니 양산(陽山)아래에 있는 나정(蘿井)이라고 하는 우물근처에 이상야릇한 기운(氣運)이 전광(電光)처럼 땅에 드리워져 있었고 백마(白馬)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경배(敬拜)하듯 하고 있었다. 이러한 광경을 바라본 일행(一行)은 모두 나정(蘿井)으로 달려가서 보니 그곳에는 붉은 색의 커다란 알(卵) 하나가 있었는데 백마(白馬)는 사람들을 보자 길게 울부짖으며 하늘에 올라가버렸다. 육촌(六村)의 사람들이 그 알을 쪼개어 보니 의외로 자태가 단정한 어린 사내아이 하나가 있었다. 나정(蘿井)에 모였던 육촌(六村)의 촌장(村長) 이하(以下) 모든 사람들은 모두 이상하게 여겨 동천(東川)에서 목욕시키니 어린아이의 몸에서 광채(光彩)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어울려 춤 추듯 놀고 천지(天地)가 진동(振動)하고 일원(日月)이 청명(淸明)해졌다.

모든 사람들은 이 어린아이가 세상을 밝게 한다해서 혁거세(赫居世)라 이름하고, 같은 날에 알영정(閼英井)에서 계룡(鷄龍)의 왼쪽 옆구리에서 태어난 계집아이 알영(閼英)과 함께 짝지워 남산서록(南山西麓)에 궁(宮)을 마련하여 놓고 봉양(奉養)하였다. 이성아(二聖兒)의 나이가 13세 되던 해인 오봉원연갑자(五鳳元年甲子)(B.C. 57)에 남아(男兒)를 왕(王)으로, 여아(女兒)를 왕후(王后)로 삼았으며 국호(國號)를 서라벌(徐羅伐)로 하였다. 육촌(六村)사람들은 혁거세(赫居世)가 태어난 알이 마치 박처럼 생겼다고 하여 그의 성(姓)을 박(朴)으로 하였다.




당간지주

경주나정 석재

경주나정 비석

경주나정 주춧돌

나정 건물터

나정 기타 유물 매장터

나정 전경

나정비 정면

나정비 후면

발굴 유구1

발굴 유구2

발굴 유구3

발굴 유구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