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246호 경주 재매정

오늘의 쉼터 2008. 2. 20. 21:47


종     목 사적  제246호
명     칭경주 재매정 (慶州 財買井)
분     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주거건축/ 주거시설
수량/면적 5,481㎡
지 정 일 1976.01.07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교동 89-7
시     대신라
소 유 자공유
관 리 자경주시

일반설명

신라의 김유신 장군 집에 있던 우물이다.

화강암을 벽돌처럼 쌓아 올려 만들었는데, 이 일대가 장군의 집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 김유신 장군이 오랜 기간을 전쟁터에서 보내고 돌아오다가 다시 전쟁터로 떠날 때, 자신의 집 앞을 지나면서 가족들을 보지도 않고 우물물을 떠오게 하여 말위에서 마시고는, “우리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구나”하고 떠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1993년 발굴조사에서 재매정을 중심으로 사방 70m 지역을 발굴하였다. 우물의 깊이는 5.7m이며, 가장 넓은 부분은 1.8m이고, 바닥의 지름이 1.2m로 벽돌같이 다듬은 돌로 만들었다. 우물 옆에 비각이 있고 비각안에 조선 고종 9년(1872)에 이만운이 쓴 비석이 있다.


전문설명


경주시 교동 서쪽으로 한적한 밭 가에 신라의 명장 김유신(金庾信) 장군(將軍)의 저택으로 추정되는 집자리에 재매정(財買井)이란 신라의 샘이 하나 남아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진한조(辰韓條)에 신라 전성시대의 수도(首道) 서라벌(徐羅伐)을 말하고 있는데 당시 서라벌은 17만 8,936호에 1,360방(坊) 55리(理)에 부유한 저택으로 35체의 금입택(金入宅)이 있었으니 그것은 남택(南宅), 북택(北宅), 본피택(本彼宅), 양택(梁宅) 지상택(池上宅), 재매정택(財買井宅) (김유신공 (金庾信公)의 조종(祖宗)), 장사택(長沙宅), 상앵택(上櫻宅), 하앵택(下櫻宅), 수망택(水望宅), 천택(泉宅), 양상택(楊上宅), (양부(梁部)의 남(南)), 한기택(漢岐宅) (법류사(法流寺) 남(南)쪽), 비혈택(鼻穴宅) (법류사(法流寺)남쪽), 판적택(板積宅)(분황사(芬皇寺) 상방(上坊)), 별교택(別敎宅)(북천(北川)), 아남택(衙南宅), 김양종택(金楊宗宅)(양관사(梁官寺) 남(南)쪽), 곡수택(曲水宅)(북천(北川)), 유야택(柳也宅), 사하택(寺下宅), 사량택(沙梁宅) 정상택(井上宅), 이남택(里南宅), 사내곡택(思內曲宅), 지택(池宅), 시상택(寺上宅), 대숙택(大宿宅), 임상택(林上宅)(청룡지사(靑龍之寺) 동방유지(東方有池)), 교남택(橋南宅), 정하택(井下宅) 등이다. 이 중에 보면 재매정택(財買井宅)이 김유신공(金庾信公)의 조종가(祖宗家)로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삼국유사(三國遺事) 김유신조(金遺信條)를 보면 김유신 장군의 부인을 재매부인(財買夫人)이라 하였는데 재매정택(財買井宅)의 택호는 재매부인(財買夫人)에서 연유된 것이다.

우리는 지금 신라 왕경지(王京址)를 발굴조사하고 있지만 앞에 언급한 신라의 민가에 대한 아무런 조사연구도 이루어진 것이 없다. 신라의 민가지중(民家址中)에 유일하게 사적지(史蹟地)로 지정되어 있는 것이 재매정(財買井)이다. 그리하여 1991년부터 1993년까지 3년간에 걸쳐 국립 경주문화재 연구소가 재매정 지역을 발굴 조사하였다. 발굴결과 19개소의 건물지가 발굴조사 되었는데 그 중에 가장 큰집이 동서 3칸 남북3칸의 건물지(建物址)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옥사조(屋舍條)를 보면 진골(眞骨)의 집 방을「장광(長廣)이 24척(尺)을 넘지 못하고 당와(唐瓦 : 장식기와)를 덮지 않고 비첨(날아갈 듯이 높이 들린 처마)을 하지 않으며 조각한 현어(懸魚)를 달지 않으며 금(金), 은(銀), 유석(鍮石)과 오색(五色)으로 장식하지 않는다. 계석(階石)을 다듬어 만들지 않고 3중(三重) 돌층계를 하지 않으며 담장에는 보(梁)나 기둥을 설치하지 않고 석회를 바르지 않는다」하였다.

김유신(金庾信) 장군(將軍)은 그 부인이 태종 무열왕(太宗 武烈王)의 제 3녀(第 三女)(지소부인)였고 자신은 가야 왕족이었음으로 신라 진골(眞骨)의 품계에 해당하였다. 진골(眞骨)의 집의 규제하지 않는 사항을 보면 담장이 팔척(八尺)을 넘어도 되었고 중문(重門)과 사방문(四方門)을 낼 수 있었으며 마구는 말 5필 이상을 둘 수 있게 규제하지 않았다. 통일신라의 건축규제는 방의 크기에 두고 있는 것을 보면 민가가 큰집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93년 재매정(財買井) 지역 발굴조사는 재매정을 중심으로 사방 70m 지역을 발굴하였다. 발굴자는 재매정택(財買井宅)은 현 발굴지역의 동편이나 서편지역에 더 큰 건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문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발굴과정에서 재매정(財買井)의 신라 우물을 실축 조사하였다. 우물의 깊이는 570㎝이며 최대 직경이 180㎝이고 바닥직경 120㎝로 벽돌같이 다듬은 돌로 축조되어 있었다. 최상단인 우물 방틀은 이중 몰딩 처리된「ㄱ」자형 석재 2매를 조합하여 내부방공(內部方孔)의 크기는 110㎝×115㎝였다. 신라 우물의 방틀은 원형(圓形)인 것과 방형(方形)인 것과 팔각형인 것이 있다.

현재 재매정(財買井) 옆에는 유허비(遺虛碑)가 있는데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오임신(五壬申 1872年)에 경주부윤(慶州付尹) 이만운(李晩運)이 쓴 것이다.




재매정

재매정지 전경

표지석

비각

비석

재매정

재매정지전경

비각

재매정일각문

재매정지조사후남쪽전경

김유신장군유허비

우물방틀석재

우물방틀결구상태

제18건물지전경

발굴조사전전경

비석

재매정 가는길

재매정 대문

재매정 비석

재매정 우물1

재매정 우물2

재매정 우물3

재매정 편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