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244호 연천 경순왕릉

오늘의 쉼터 2008. 2. 20. 21:33



종     목 사적  제244호
명     칭연천 경순왕릉 (漣川 敬順王陵)
분     류 유적건조물 / 무덤/ 왕실무덤/ 고대
수량/면적 3,967㎡
지 정 일 1975.06.25
소 재 지 경기 연천군  백학면 고랑포리 산18-2
시     대통일신라
소 유 자국유
관 리 자연천군

일반설명

신라 56대 마지막왕인 경순왕(재위 927∼935)의 무덤이다.

927년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놀다 견훤의 습격을 받아 시해된 후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전쟁으로 인해 백성이 많은 피해를 입자 군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935년 평화적으로 신라를 고려에 넘겨주고 왕위를 물러난 신라 마지막 왕이다.

무덤의 높이는 약 3m, 지름 7m의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으로 판석을 이용해 둘레돌을 돌렸다. 고려시대 왕릉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담장인 곡장이 둘려져 있어 고려 왕실에서 왕의 예로서 무덤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왕릉 중 유일하게 경주 지역을 벗어나 경기도에 있다.


전문설명


신라(新羅) 제56대(第56代) 경순왕(敬順王)(재위(在位) 927-935)의 능(陵)이다.

경순왕(敬順王)의 성(姓)은 김(金), 휘(諱)는 부(傅), 문성왕(文聖王)의 6대손(代孫) 이창(伊滄) 효종(孝宗)의 자(子)이며 모(母)는 헌강왕(憲康王)의 여(女) 계아태후(桂俄太后)이다. 927년(年)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의 침공으로 경애왕이 사망(死亡)한 뒤 즉위(卽位)하였다.

경순왕의 재위시기(在位時期)는 나말(羅末) 전란시대(戰亂時代)로 영토(領土)는 왕건(王建)과 견훤(甄萱)에게 대부분 빼앗기고 각처에서 군웅(群雄)이 할거하여 국력(國力)이 쇠퇴하였다. 후백제(後百濟)의 침공과 약탈로 국가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었으며 민심(民心)이 신흥(新興) 고려(高麗)로 기울자 마침내 군신회의(群臣會義)를 열고 무고(無辜)한 백성들이 더 이상 괴롭힘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신라의 천년사직을 고려에 넘겨줄 뜻을 표하자 군신(群臣)들간에 찬반론(贊反論)이 있었으나 결국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에게 국서를 주어 고려 태조(太祖)에게 신라의 천년사직을 고려에 넘겨줄 뜻을 전하게 하였다. 그리고 나서 왕(王)은 신하를 거느리고 서울(慶州)을 떠나 고려 태조가 있는 송악으로 향했다. 태조는 궁동(宮東)의 갑제일구(甲第一區)를 주고 장녀(長女) 낙랑공주(樂浪公主)로서 그 아내를 삼게 하고 정승공(政丞公)을 봉하여 선일천석(線一千石)을 내리고 시종원장(侍從員將)도 모두 등용하였다. 신라(新羅)를 경주(慶州)라 고쳐 공(公)의 식읍(食邑)으로 하고 또 경주(慶州)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임명하였다. 공(公)이 고려(高麗) 경종(景宗) 3년(年)(978) 4월(月) 4일(日) 별세(別世)하자 시호(諡號)를 경순(敬順)이라 하고 왕(王)의 예(禮)로서 장례(葬禮)를 모시고 능(陵)을 조영(造營)하였으나 오랫동안 잊혀져 있다가 조선(朝鮮) 영조(英祖)때에 찾게 되었는데 신라왕릉중(新羅王陵中) 경주지역(慶州地域)을 벗어나 경기도(京畿道)에 있는 유일한 신라왕릉(新羅王陵)이다.

능(陵)의 시설은 봉분(封墳) 곡장(曲墻) 능비(陵碑) 장명등(長明登) 망주석(望柱石)이 있고 명문(銘文)으로는 능비명(陵碑鳴)이 「신라경순왕지릉(新羅敬順王之陵)」이라고 새겨져 있다.




연천 경순왕릉

연천 경순왕릉

연천 경순왕릉

연천 경순왕릉

연천 경순왕릉

연천 경순왕릉

경순왕릉비

비각 전경

비각과 재실

재실

전경1

전경2

전경3

전경4

비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