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충렬사는 임진왜란이 끝나던 해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충무공 이순신의 충의와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당으로 노량충렬사라고도 한다.
통영의 충렬사와 함께 ‘충열’이란 현판을 처음부터 같이 사용해 왔으며 인조 때 지어졌다. 충무공이 전사한 후 그의 시신이 한 때 이곳에 모셔졌는데 인조 10년(1632) 유림들이 옛 터에 작은 집을 짓고 제사를 지냈던 것이 최초의 사당이다.
충무공이 순국한지 60년이 되던 효종 9년(1658)에 좁고 초라한 옛집을 헐고 새집을 지었다. 그 후 현종 4년(1663)에 통영 충렬사와 함께 임금이 내려준 현판을 받게 되었다. 이런 사실들을 기록한 충무이공묘비가 사당 곁에 있으며, 비문은 현종 2년(1661)에 송시열이 썼고, 1663년에 박경지 등이 세운 것이다.
옛날에는 이 사당 곁에 호충암이란 암자가 있었는데, 화방사의 승려 10명과 승장 1명이 번갈아 와서 사당을 지켰다고 한다. 또한 공이 죽은 후 자운이란 승려가 공을 사모하여 쌀 수백섬을 싣고 와서 공을 위해서 제사를 지낸 것으로도 유명한데 자운은 원래 충무공의 밑에 있던 승병이었다. 충렬사는 충무공의 노량 앞바다를 지키고 있는 수호신의 사당이라 할 수 있다.
경내에는 비각·내삼문·외삼문·관리사 등이 있고 사당 뒤의 정원에는 충무공의 시신을 임시 묻었던 자리에 묘가 남아 있으며, 1948년 정인보가 쓴 충열사비가 있다.
전문설명
임진왜란이 끝나던 해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충무공 이순신의 충의와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당이다.
통영의 충렬사와 함께 충열(忠烈)이란 액호(額號)를 처음부터 같이 사용해온 이 사당이 창건된 것은 인조 때 일이었다. 이충무공이 관음포 앞바다에서 전사한 직후 그의 유구(遺軀)가 한 때 이곳에 안치되었는데, 1632년(인조 10) 이곳 유림들이 그 옛터에 작은 집을 짓고 제사를 지냈던 것이 그 최초의 사당이다. 그 후 공이 순국한지 일주갑(一周甲)이 되던 해인 1658년 (효종(孝宗)9) 통제사 정익(鄭익)이 좁고 초라한 옛집을 헐고 그 자리에 새집을 지으니 이것이 충렬사의 중건(重建)이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663년(현종(顯宗) 4) 이 사당은 통영 충렬사와 함께 사액(賜額)을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자세히 기록한 것이 현재 사당 곁에 있는 충무이공묘비(忠武李公廟碑)이며, 1661년(현종 2)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그 비문을 쓴 이비는 1663년에 통제사 박경지(朴敬祉)등이 세운 것이다. 여기에서 참고로 해 둘 것은 옛날 이 충렬사 곁에 호충암(護忠庵)이란 작은 암자가 있었는데, 가까운 화방사(花芳寺)의 승도 10명과 승장(僧將)1명이 번갈아 와서 사당을 지켰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의 「충렬사지(忠烈祠誌)」에 의하면, 이것을 수직(守直)하던 승장 유습(裕習)이란 사람의 꿈에 이충무공이 현몽한 내용의 일화가 실려 있다. 유습이 밤에 잠이 들었는데 공(公)이 나타나 그를 꾸짖기를“ 너는 왜 산을 순시하지 않느냐”고 하여 깜짝 놀라 일어나서 여러 승려들과 함께 횃불을 들고 산속을 돌아보니 사당 뒤에다 어떤 사람이 암장(暗葬)을 해 둔 것을 발견, 이튿날 이를 관가에 보고하여 조치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일화는 허튼 이야기가 아닌, 충무공의 영험(靈驗)이 그만큼 생생하게 이곳에 현현(顯現)하였음을 말해준다. 또한 충무공이 순국한 후 이곳에서는 자운 (紫雲)이란 승려가 매년 쌀 수백석을 가지고 노량바다에 와서 공을 위한 수륙재(水陸齋)를 올렸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자운은 임진왜란 초부터 충무공 휘하에 들어가 해상 의승장(海上 義僧將)으로 활약했던 승려로서 평소에 공을 흠모한 것이 순국한 뒤에는 그의 충의를 깊이 사모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곳 충렬사는 1973년 사적으로 지정된 후 현재 경내에서는 사당 외에 비각·내삼문·외삼문·관리사 등의 시설들이 보수 정화되어 있다. 그리고 사당 후원에는 충무공의 순국 직후 유구(遺軀)가 가장(假葬)되었던 자리에 가분묘(假憤墓)가 남아 있으며, 1948년 정인보가 쓴 것을 경남도청에서 세운「충렬사비(忠烈祠碑)」가 현지에 있다.
남해충렬사원경(노량바다) 남해충열사 남해충열사 남해충열사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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