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때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순국한 유관순 열사의 유적으로, 생가와 매봉교회, 유적비 그리고 봉화를 올렸던 봉화터가 있다.
유관순 열사는 대대로 내려오는 선비가문에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6년에는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학당에 입학하였다. 다음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시위에 참가하였고, 일제의 휴교령으로 학교가 폐쇄되자 고향으로 내려와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하게 되었다. 이에 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날에 시위운동을 벌여 열사의 부모를 비롯하여 19명이 죽고 30명이 부상당했으며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다. 유열사는 모진 고문을 당하고 1920년 10월에 순국하였다. 시신은 서울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으나, 도시개발 과정에서 무덤을 잃어버렸다.
천안시에서는 유관순의 애국정신을 길이 추모하고 3·1운동의 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1972년에 사당을 세우고 열사의 초상을 모셨다. 봉화대와 봉화탑을 건립하여 매년 3월 마지막날에 봉화를 올림으로써 그 날을 기념하고 있다.
전문설명
유관순 열사는 1902년 3월 15일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 지령부락에서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소제(李少悌)의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내려오는 선비의 가문이며, 부친은 개화기에 일찍이 근대문명에 눈을 떠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고, 마을에 홍호학교를 설립하고 교회를 세워 독실한 기독교(基督敎) 가정을 이루었다. 이 같은 가정 분위기에서 생장한 유관순은 어려서부터 적극적이고도 의로운 성품을 지녀 부모에게는 효성스러웠고 형제와 친구에게는 우애가 남달랐다.
유관순은 1916년에 공주감리교 충청도교구에서 일하는 선교사 사부인의 주선으로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편입학하여 교비생으로 공부하였다. 고등과 1년생으로 진학한 1919년 3월 1일 일제의 탄압으로부터 벗어나 완전 자주독립을 이루려는 거족적 염원의 독립만세 함성이 3천리 강산을 울릴 때 유관순도 독립항쟁(獨立抗爭)의 선봉이 되었다. 그러나 무자비한 일제의 탄압으로 숙원을 이루지 못하였다. 총독부의 강제 휴교령으로 학교가 폐쇄되자 3월 13일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가지고 고향집으로 와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하게 되었다.
유관순은 사촌언니 예도와 함께 마을 어른들의 뜻을 모으고 천안읍 감리 교회와 천안 전도사 안창호(安昌鎬)를 찾아가 뜻을 전하여 쾌락을 받았으며 잣밭신학교 김구응도 적극 협력을 약속하였다. 이에 유관순은 본부를 지령리에 두고 사방 백리 안팎의 각 고을 사십여 마을을 포섭(包攝)하는 책임을 맡았다. 여우와 범도 나온다는 높은 재를 밤으로 몇 개씩 넘어 발이 짓물렀고 무서움이 엄습할 때면 찬송가와 기도로 힘과 용기를 북돋우었다. 20여일간 수고로이 돌아다니어 교회와 학교와 유림(儒林) 대표들과 각 지역의 대성씨(大姓氏)의 대표들을 만나 만세 시위운동에 적극 참여할 것을 약속 받았다.
마침내 음력 2월 그믐날 밤에 유관순은 매봉에 올라가 내일의 거사를 알리는 봉화를 높이 들었다. 이를 신호로 음력 3월 1일 장날에는 3천여의 군중이 모여 태극기를 들고 만세시위를 하였다. 만세시위는 헌병주재소와 약 50여보쯤 되는 곳에서 평화적으로 행해졌다. 시위대의 열기가 더해져가자 일본관헌들은 그 기세에 겁을 먹은 듯 시위대를 향하여 무차별 발포를 하였다. 이 발포로 유관순의 부모를 비롯한 19인이 그 자리에서 순국(殉國)하였고 30여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또한 일본(日本) 관헌들은 만세(萬歲) 참가자의 집에 불을 질러 유관순의 집도 모두 타버리고 말았다.
유관순은 천안헌병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나 자신이 주모자라고 주장하고 끝내 동지들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공주검사국으로 넘어가 재판을 받을 때는 한국인으로 일인의 재판(栽判)을 받을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서울복심법원에 상고, 재판에서 일경의 잔학상과 그의 정당성(正當性)을 또렷이 진술하였다. 최종 판결에서 7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수형생활을 하는 과정에서도 그는 밤낮없이 만세를 불렀고, 그때마다 악독한 고문을 받았다. 고문으로 인하여 온몸이 짓물러 있었으되 독립(獨立)에의 신념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던 그가 1920년 10월 12일 오전 8시 12분에 순국하였다. 서울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하였으나, 도시개발 중 그의 묘소가 유실되고 말았다.
1962년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되었다. 천안시에서는 유관순의 애국정신을 길이 추모하고 3·1운동의 빛난 얼을 선양하고자 1972년 10월 14일에 사우(祠宇)를 건립하고 서있는 모습의 영정을 모시었다. 1977년에는 아우내 거사의 숭고한 뜻을 선양하고자 봉화대와 봉화탑을 건립하고 매봉교회를 보수하였다. 1985년 3월 1일부터 1986년 8월 15일에 걸쳐 추모각을 확대 증축하고, 앉아있는 모습의 영정을 새로 제작하여 봉안하였다. 또한 1991년 12월 30일에는 병천면 용두리의 옛 집터에 유관순의 생가(生家)를 복원하였다.
유관순열사 유적 유관순열사 유적 유관순열사유적 봉화대와봉화탑 봉화탑 유관순열사유적추모각전경 유관순열사영정 유관순열사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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