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년산성은 돌로 쌓은 산성으로 신라 자비왕 13년(470)에 쌓았으며, 소지왕 8년(486)에 고쳐 세웠다.
『삼국사기』에는 성을 쌓는데 3년이 걸렸기 때문에 삼년산성이라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고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오항산성으로,『신증동국여지승람』,『충청도읍지』에는 오정산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의 둘레는 약 1,800m이고 성벽은 납작한 돌을 이용해서 한 층은 가로 쌓기를 하고, 한 층은 세로 쌓기를 하여 튼튼하며,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다르다. 남쪽과 북쪽은 안팎을 모두 돌을 이용하여 쌓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문터는 4곳에 있으나 모두 그 형식이 다르다. 성내에는 연못터와 우물터가 있고 주위 암벽에는 글이 새겨 있다. 삼국시대에서 고려·조선시대까지의 토기조각과 각종 유물이 발견되어 성을 오랫동안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5세기 후반 신라의 성 쌓는 기술을 대표하는 산성으로 주변에는 수 천기의 무덤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돌을 이용하여 쌓은 대표적인 산성으로 평가되는 곳이다.
전문설명
삼년산성은 신라< 新羅 > 자비마립간< 慈悲麻立干 > 13년(470) 축성< 築城 >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완성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그후 소지< 炤知 >마립간 8년(486)에 실죽< 實竹 >이 3천 명의 인부를 징발해 개축< 改築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가 서북지방으로 세력을 확장하는데 가장 중요한 전초< 前哨 > 기지였다고 생각되고 있으며, 삼국통일< 三國統一 > 전쟁 때 태종< 太宗 > 무열왕< 武烈王 >(645∼661, 재위)이 당< 唐 >나라 사신 왕문도< 王文度 >를 이곳에서 맞이하기도 하였다. 고려< 高麗 > 태조< 太祖 > 왕건< 王建 >(918∼943, 재위)은 이 성을 점령하려다 크게 패하였던 때가 있었던 난공불락의 요새이다. 성벽< 城壁 >은 납작한 돌로 내외협축< 內外夾築 >을 하여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축산성< 石築山城 >으로 평가된다. 성의 둘레는 약 1.7km이고 성벽의 높이는 13m, 폭은 8∼10m에 이른다. 이 성에는 서문< 西門 >·북문< 北門 >·동문터< 同門址 >가 있고, 특히 성벽의 군데군데에 곡성< 曲城 >이 있어 우리나라 고대< 古代 > 축성법< 築城法 > 연구< 硏究 >에 매우 중요시되고 있다. 성내에는 아미지< 峨眉池 >란 커다란 연못이 있었고, 성 밖의 산능선에는 수많은 고분군< 古墳群 >이 있어 유서깊은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삼년산성 삼년산성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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