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쌓아 만든 옛 저수지의 중수비와 둑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흘해왕 21년(330)에 “처음으로 벽골제를 만들었는데, 둘레가 1천 8백보”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이 지역이 신라 땅이 아닌 백제의 땅이었으므로 나중에 연도를 고쳐서 신라가 만든 것처럼 보이도록 해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실제로 만들어진 때는 백제 11대 비류왕 27년(330)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이후 신라 원성왕 6년(790)과 고려 현종 및 인종 21년(1143)에 고쳐 쌓은 후, 조선 태종 15년(1415)에 다시 쌓았다. 그러나 좋은 점보다 나쁜 점이 더 많다고 하여 없어지고 말았다.
지금 유적에는 일직선으로 약 3㎞ 정도의 둑만이 남아있는데, 1925년 ‘동진토지개량조합’에서 이 둑을 농사짓는데 필요한 물을 대는 통로로 고쳐 이용하면서 그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리게 되었다.
둑의 북쪽에는 조선시대에 벽골제를 다시 쌓고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 세운 비석이 있는데, 닳아서 글을 알아보기 어렵다. 1975년에는 저수지 물의 양을 조절하던 수문이 있던 자리 2곳을 발굴조사하였는데, 그 결과 대규모의 높은 수준의 측량기술이 이용된 공사였던 것이 밝혀졌다.
벽골제는 단순히 우리나라 최초의 저수지라는데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당시에 이미 이러한 저수지 축조가 가능할 정도의 고도로 발달된 토목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입증해 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과학기술사에서도 획기적인 사실을 제공해 주는 유적이다.
전문설명
김제시 부량면 포교리와 월승리에 걸쳐 있는 저수지의 중수비(重修碑) 및 제방을 말한다.
이 저수지는 벽골제(碧骨堤)라고 하는데, 이 벽골제의 축조시기에 대해서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신라 흘해왕 21년(330)에 "처음으로 벽골제를 축조하였는데, 둘레가 1천 8백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이 지역이 신라의 영토가 아니라 백제의 영토였으므로 후대에 신라기년(新羅紀年)으로 고쳐져서 신라가 축조한 것처럼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실제로 이 벽골제(碧骨堤)가 축조된 것은 백제의 11대 비류왕 27년(330)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뒤 벽골제는 원성왕 6년(790)에 증축한 바 있으며,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과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고려 현종 및 인종 때와 조선 태종(太宗) 15년(1415)에 개축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익이 적고 폐단이 많아 한때 폐지되기도 하였다.
유적은 현재 포교리에서 시작하여 월승리에 이르는 평지에 일직선으로 약 3km 정도의 제방이 남아 있으며, 제방에 부수된 시설로는 제방의 남단 수문지였던 경장거(經藏渠), 북단 수문지였던 장생거(長生渠), 그리고 중앙 수문지였던 거대한 석주(石柱) 등이 우뚝 서 있다. 그러나 1925년에 일제(日帝)에 의해 동진농지개량조합(東津農地改良組合)에서 이 제방을 관개용(灌漑用) 수로(水路)로 개조하여 이용함으로써 그 원형이 크게 훼손되었다.
한편, 1975년에 있었던 수문지(水門址) 2개소에 대한 발굴조사에 의하면 제방의 높이는 약 4.3m, 윗변의 너비는 7.5m, 밑변의 너비는 17.5m의 규모로 축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수문(水門)의 너비는 4.2m이며, 여기에 사용된 돌기둥의 높이는 5.5m이고, 돌기둥 1개의 무게는 약 8톤에 달하였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돌기둥의 안쪽에는 너비 20cm, 깊이 12cm의 홈이 남아 있는데, 여기에 목제둑판을 넣어 상하로 이동시키면서 방수량을 조절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수문(水門)의 외부로는 호안석(護岸石)이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으며 수로(水路)가 파괴되는 것을 방지하였다.
제방은 세 번에 걸쳐 판축된 것으로 밝혀졌는데, 그 판축토 아래에 두께 2cm정도의 흑색 식물탄화층이 있어 이 탄화물로 세 차례에 걸쳐 방사성탄소 측정을 해 본 결과 4세기라는 절대연대가 나와 문헌 기록과 일치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이 벽골제(碧骨堤)는 부분적인 개수공사는 있었지만 전장 3km에 달하는 제방과 수문의 돌기둥 및 그 바깥쪽에 있는 호안석(護岸石) 등은 시축(始築) 때부터 현재와 같은 규모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로써 볼 때 이 벽골제는 단순히 우리나라 최초의 저수지라는 데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에 이미 이러한 저수지 축조가 가능할 정도로 고도로 발달된 토목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입증해 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과학기술사에 획기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한편, 제방의 북쪽 기점인 포량리 근처의 초혜산(草鞋山) 정상 남단에는 조선시대에 건립한 벽골제 중수비(重修碑)가 남아 있다. 비신(碑身)은 점판암제로 되어 있는데,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불가능할 정도이다. 석비(石碑)의 크기는 높이 6.4척(尺), 너비 3.4(尺)이다.
김제벽골제전경 벽골제수문 벽골제비 벽골제비및비각 벽골제 전경1 벽골제 전경2 벽골제 전경3 벽골제비 정면 벽골제비 후면 비각
비각과 벽골제 전경
장생거 수문 전경 장생거 장생거 수문뒤 둑방에서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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