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113호 통영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

오늘의 쉼터 2008. 2. 17. 22:42


종     목 사적  제113호
명     칭통영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 (統營 閑山島 李忠武公 遺蹟)
분     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역사사건/ 역사사건
수량/면적 528,034㎡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남 통영시  한산면 두억리 875
시     대조선시대
소 유 자통영충렬사
관 리 자통영시

일반설명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이 왜군을 크게 무찌른 한산대첩을 기념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역사적인 장소이다.

충무공은 무과에 급제하여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지내던 때 왜적의 침입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여수를 중심으로 배를 만들고 군비를 늘리는 등 일본의 침략에 대처하였다.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터지자 옥포대첩, 거북선이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노량진해전, 당항포해전, 한산대첩 등 곳곳에서 전승을 거두었고, 정유재란 때에는 명량대첩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가 죽은 후 1604년 선무공신 1등에 올랐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충무(忠武)’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한산대첩은 매우 불리하였던 전쟁의 상황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대표적인 해전으로, 육지에서의 행주성대첩·진주성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꼽히는 유명한 싸움이었다.

선조 25년(1592) 이곳에 제승당을 짓고, 26년(1593)부터 30년(1597)까지, 해군의 중심 진영으로 삼아 해상세력을 장악하고 나라의 어려움을 이겨나갔다. 그러나 선조 30년(1597)에 제승당을 포함한 이곳 군영이 모두 불에 타서 폐허가 되었다.

그 후 영조 15년(1739)에 제승당과 함께 ‘제승당유허비’를 세운 후 여러 차례 공사가 이루어졌고, 일제시대 때 지방 유지들에 의해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원래 제승당은 임진왜란 중 충무공이 부하들과 함께 작전계획을 세우고 일을 보던 ‘운주당’이란 건물 자리에 영조 때 집을 짓고 ‘제승당’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경내에는 제승당을 비롯하여 충무공의 영정을 모신 ‘충무사’와 ‘한산정’, ‘수루’ 등이 있으며, 산봉우리에는 한산대첩비와 함께 거북등대가 있다.


전문설명


이곳은 충무공< 忠武公 > 이순신< 李舜臣 > 장군< 將軍 >이 조선< 朝鮮 > 선조< 宣祖 > 25년(1592)에 일어난 임진왜란< 壬辰倭亂 >때 세계해전사상< 世界海戰史上 > 길이 빛나는 한산대첩< 閑山大捷 >을 이룬 후 제승당< 制勝堂 >을 짓고, 선조 26년(1593)부터 선조 30년(1597)까지 삼도< 三道 > 수군< 水軍 >의 본영< 本營 >으로 삼아 제해권< 制海權 >을 장악하고 국난< 國難 >을 극복< 克服 >한 유서깊은 사적지< 史蹟地 >다. 선조 30년(1597)에 일단 폐진되었던 제승당은 142년 후인 영조< 英祖 > 15년(1739) 통제사< 統制使 > 조경< 趙儆 >이 중건< 重建 >하고 유허비< 遺墟碑 >를 세운 이래 1959년 정부가 사적< 史蹟 >으로 지정< 指定 >하고 여러 차례 보수< 補修 >하여 왔다. 1975년 정부는 경역< 境域 >을 확장하고 보수하여 오늘의 모습으로 정화< 淨化 >하였다. 이곳에는 제승당을 비롯하여 공의 존영< 尊影 >을 모신 영당< 影堂 >과 유허비< 遺墟碑 >, 그리고 많은 송덕비< 頌德碑 >, 사정< 射亭 >, 수루< 戌樓 > 등 부속시설이 말끔히 단장되어 있어, 수려한 주변 경관과 더불어 당시 조선 수군본영의 면모를 되찾아 볼 수 있다. 공은 가셨어도 나라 사랑하시던 그 마음은 출렁이는 푸른 바다와 함께 언제까지나 살아 남아 조국 수호의 영원한 횃불이 되고 있다.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

한산도이충무공유적(제승당)전경

한산도이충무공유적

한산도이충무공유적

수루(제승당)

한산도이충무공유적원경

충무사

제승당정화기념비

비각

한산대첩기념비문

한산대첩기념비

우국애정도

사천해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