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견은 우리나라 전통무술의 하나로, 유연한 동작으로 손과 발을 순간적으로 우쭉거려 생기는 탄력으로 상대방을 제압하고 자기 몸을 방어하는 무술이다.
고구려시대 고분벽화에 택견을 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이미 행하여졌음을 알 수 있으며, 고려시대에 와서 무술로서 기술이 더욱 발달하여 무인들 사이에서 무예로 성행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대중화한 경기로 퍼져서 무인 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널리 행하게 되었다. 택견의 수련은 ①혼자익히기 : 기본자세(품), 서서익히기(품밟기, 활개짓, 발질과 손질), 나가며 익히기(활개짓, 손질, 발질) ②마주메기기 ③견주기(대걸이, 겨눔수)로 나눌 수 있다. 택견의 특징은 첫째, 손발과 몸 동작이 근육의 움직임과 일치하고, 유연하며 자연스럽게 주고 받을 수 있는 전통있는 무술이다. 둘째, 음악적이며 무용적인 리듬을 지니고 있어 예술성 짙은 무예이다. 셋째, 공격보다는 수비에 치중하고 발을 많이 움직인다.
택견은 동작이 유연하고, 자연스러워서 신체단련을 위한 보건체조나 스포츠로도 다각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전문설명
택견은 인류의 원시적인 호신술에서 나온 것으로 중국에서는 『한서 漢書 』「무제기 武帝紀」에 각저희(角抵戱)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구려 벽화의 무용총(舞踊塚)과 삼실총(三室塚)에 두 사람이 서서 손을 서로 앞에 내밀고 싸우는 자세를 하고 있는 그림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택견으로 보여진다. 이런 기예는 북방민족에 널리 퍼져 있던 것으로 벽화의 그림은 이것이 경기 종목으로 등장하였음을 암시해주는 것이다. 현재에도 평안도 사람이 소위 박치기를 잘하는 것은 고구려의 전통으로 민속에 남아 있는 택견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된다.
택견은 조선시대에도 한량(閑良) 액정패들이 전승하고 무희(武戱)로서 일반화되어 있었던 것은 조선시대의 그림 등에서도 볼 수 있다. 문헌에는 수박(手拍)·수박(手博)수벽타(手癖打) 등의 기록도 보이지만 오늘의 택견과는 다르다. 택견은 발을 많이 쓰고 있으며 주먹을 쥐지 않고 손을 편 채로 춤에 가까운 동작으로 하는 것으로 미루어 문헌에 보이는 탁견(托肩)· 각희(脚戱)가 여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근세에 서울 주변에는 택견을 하는 패들이 많이 있어서 성 안에 사는 패를 윗대패라 부르고 성 밖에 사는 패를 아랫대패라 불렀다. 같은 성내패라 할지라도 대궐에 가까운 쪽의 패를 다시 윗대패라 이르고 대궐에서 먼 변두리 패를 아랫대패라 하였으니 대궐에 가깝다는 데에서 상당한 긍지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윗대패의 한 사람으로는 송덕기(宋德基 1893년생)가 있었으나, 1987년 작고하였다. 그는 종로구 내수동에서 태어나 13세 무렵부터 사직동 뒷산에서 택견을 배웠으며 18세 때에 임호(林虎 당시 29세)에게서 배우고 20세 때에는 마을 택견꾼들과 함께 삼청동옥동애오개 등의 마을에서 경기를 했고 일생을 택견과 함께 살다가 갔다. 아랫대패로는 왕십리에 신재영(辛在榮 1882년생)강태진(1884년생)이 있었고 구리개패에 김홍식(金弘植 1882년생)이 있었다. 성 밖은 생활이 영세한 경우가 많았으나 사람들이 드세고 억세어서 택견에도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사람들의 관심이 다른 스포츠에 쏠리고 또 일찍이 택견을 배운 고로(古老)들은 사망했거나 활동할 수 없는 상태여서 거의 인멸의 지경에 이르고 있다. 기능보유자의 한 사람이었던 신한승은 하왕십리에서 태어나 아랫대패인 종조부 신재영으로부터 어려서 택견을 배웠고 1961년경부터는 윗대패인 송덕기옹에게 사사하여 성내와 성외의 양패를 계승했었는데 1987년 작고하였다. 현재는 정경화가 택견 보유자로 전승활동을 하고 있다.
택견의 특징을 들면 첫째, 손발과 몸 동작이 근육의 움직임과 일치하고, 유연하며 자연스럽게 공방할 수 있는 전통있는 무술이다. 둘째, 음악적이며 무용적인 리듬을 지니고 있어 예술성 짙은 유희이다. 셋째, 공격보다는 수비에 치중하고 발을 많이 움직여 각희(脚戱)란 이름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택견(물구나무쌍발차기) 는질러차기 밭장다리치며오금밟기 얼러메기기 칼잽기 낚시걸이 째차기 무릎밟고차기 후려갈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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