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란 금속공예의 일종으로 금속표면에 홈을 파고 금선(金線) 또는 은선(銀線)을 끼워넣어서 장식하는 기법을 말하며 이전에는 ‘실드리다’라는 말로 표현했다. 이러한 입사의 기술과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을 입사장이라고 한다. 입사공예의 유래는 정확하지 않으나, 기원전 1, 2세기경의 낙랑(樂浪) 출토유물에서 처음으로 선보였고, 신라의 고분에서 나온 유물로 보아 신라시대에는 매우 발달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입사에는 크게 두 가지 기법이 있는데, 하나는 고려시대부터 전해지는 전통방법으로 청동표면에 정(釘) 끝으로 홈을 파고 그 안에 은선을 박아넣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조선 중기 이후부터 전래된 철입사로 바탕 철의 표면을 넓게 정을 이용해 가로 세로로 쪼아 표면이 껄끄러워지면(거스러미) 그 위에 얇은 금·은판이나 선을 놓고 망치로 쳐서 금속에 붙이는 방법이다. 이 중 상감입사는 조각장이 하는 경우가 많았고, 철입사는 대부분 입사장이 담당하였다. 입사하는 문양은 매화, 난, 국화, 대나무, 학, 기린, 사슴, 박쥐, 호랑이, 소나무 등 전통적 소재가 많다.
고대부터 발전한 입사기법은 조선시대의 관영수공업자인 경공장(京工匠)의 입사장들에 의해 전해졌으나, 현대에 와서 그 기법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게 되었다. 기능보유자로 홍정실 씨가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전문설명
금속공예에는 많은 종류가 있는데 그 중에서 입사장은 고도의 기술과 경험이 필요한 세공(細工)에 속하는 부분이다.
한국의 입사공예는 이미 B.C. 1, 2세기경에 낙랑(樂浪) 출토유물에서 고도로 발달된 입사기교(入絲技巧)가 선보였다. 신라(新羅)의 고분(古墳)에서 나온 입사화문환두대도(入絲花紋環頭大刀)가 매우 가는 금은 입사로서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시대에도 입사기술이 매우 발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 와서는 문헌상에 입사기술이 보이고 유물도 많이 남아 있어서 현재 보물로 지정된 것도 적지 않다. 이 시기에 나전칠기(螺鈿漆器)와 상감청자(象嵌靑磁)가 성행했다. 나전칠기와 입사상감법(入絲象嵌法)은 기교상 유형상 유사점이 많다. 고려말에는 이를 바탕으로 상감청자기법이 나타나 한국청자를 대표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상감입사미술이 그대로 전수되어 그 조각의 문양이나 형태 등이 조선의 금속조각장들에게 전승되고 있었는데 그 역사를 청동기시대부터 따진다면 2천 년 가까운 세월이 된다. 조선시대는 더욱 금속공예의 수요가 많아져서 조선말기에는 경공장(京工匠)의 종류만도 무려 55종류나 된다. 그 중 금속공예에 관계되는 분야만도 12종에 80명이나 배정되어 전체의 3할이나 차지하고 있었다. 입사장만 하더라도 경공장 즉 서울의 공조(工曹)에 2인, 상의원에 4인의 사금장(絲金匠)이 있었고 지방에는 없었다. 이로 보아서 조선시대에는 각 관아(官衙)에서 특별히 입사장을 고용하여 전통적으로 그 기교를 계승함과 동시에 국가나 궁중에서 필요한 물건을 충당하였다.
한말 서울의 광교천변에 금은도가(金銀都家)가 밀집되어 있었는데 이곳에는 많은 금속조각장과 금은 입사장들이 있었다. 이들은 후에 이왕실미술품제작소를 거쳐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시 금은도가는 대공방과 소공방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대공방에서는 주로 주전자, 화병, 신선로, 담배향, 말안장 등의 장식품을 만들었고 소공방에서는 비녀, 가락지, 단추, 괴불, 방울, 노리개, 패물 등을 만들었다. 이런 금은도가에서 제품을 만들 때 금은 입사가 필요하였다.
입사의 기능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정 끝으로 기면을 파서 입사를 하는 방법이고 하나는 기면(器面) 전체를 입사할 수 있도록 바닥을 채바닥처럼 쪼아놓고 입사하는 것이다.
입사장-홍정실 입사장-홍정실 입사장-홍정실 입사장(입사제구) 은사꼬기 색내기 조이질 입사장 은박지자르기 철제화로표면에입사장면 조이질 은입사하는장면 금은입사주칠쟁반 정으로입사표면다듬기 철재은입사완자문담배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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