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100호 양산 법기리도요지

오늘의 쉼터 2008. 2. 15. 15:15


종     목 사적  제100호
명     칭양산 법기리도요지(梁山法基里陶窯址)
분     류 유적건조물 / 산업생산/ 요업/ 도자기가마
수량/면적 1,749㎡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남 양산시  동면 법기리 산82
시     대조선시대
소 유 자사유
관 리 자양산시
일반설명

 오래 전부터 근처에 있는 창기마을의 이름을 붙인 ‘창기사발’을 만들던 가마터로 알려진 곳이며, 조선 중기인 16∼17세기경 지방에서 사용하던 백자를 만들던 곳이기도 하다. 마을 뒷산의 기슭에서 산 윗부분까지 가마터가 여러 곳이 남아있는데, 사적으로 지정된 이 곳은 사람들이 생활하는 집과 무덤들이 들어서면서 많이 훼손된 상태이다.

발견되는 그릇 조각들을 보면 마을 근처에 있는 가마터는 대체적으로 17세기의 것이고, 산 쪽에 있는 가마터는 대부분 16세기경의 것이다. 아마도 산 윗쪽에 가마를 먼저 만들기 시작하고, 이후에 점차 아래로 내려온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도자기의 형태는 대부분이 사발·대접·접시로, 만들어진 모양새가 거칠고 투박하여 좋은 질의 백자들은 아니었던 듯하다.

발견되는 백자들 가운데 굽의 형태나 백자의 질이 일반적인 다른 백자들과는 다른 종류가 보이는데, 이것은 일본의 주문을 받아 수출용으로 특별히 만들어진 찻잔으로 추정된다.

법기리가마터는 한국과 일본의 도자기 교류역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곳이다.


전문설명


법기리 요지는 오래전부터 인근 창기(昌基)마을의 이름을 딴 '창기사발'의 생산지로 구전되어온 곳으로, 조선 중기 16∼17세기경의 지방백자를 번조한 요지이다. 요지는 이곳에서 '대매지리산' 또는 '대매재'라고 불리는 법기리 마을 뒷산의 남쪽 사면에 있는 법기수원지(法基水源池)아래에서부터 본법(本法)부락 주위까지에 위치한다.

법기리 787번지 최말련씨 집(이 집은 바로 가마터 위에 있다)과 그 부근의 인가에서부터 782번지의 경작지 일대(현재 안내판이 세워진 곳) 및 그 산 위쪽까지 수기의 가마가 산재해 있는데, 현재 지정된 지역은 인가와 묘들이 들어서거나 경작지로 변해 퇴적층이 많이 훼손된 상태이다. 그러나 지정지역 바로 옆의 대나무밭(796번지)에는 비교적 양호한 퇴적층이 확인되고 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자편을 보면 마을 부근의 요지는 대체로 17세기 것이고, 산쪽의 요지는 16세기경의 것으로 산 위쪽에서 시작하여 점차 아래로 내려온 것으로 추정된다. 산 위쪽 요지에서 출토되는 백자편들은 만듦새가 거칠고 투박하며, 대접과 접시 종류가 대부분이다. 굽은 죽절굽이 많고, 모래나 내화토눈을 받쳐 구웠다. 이중에 간혹 거친 태토에 저화도번조로 표면이 마치 녹청자와 같은 것이 섞여 있어 주목을 끈다. 산 아래쪽 요지에서 출토되는 백자들 역시 거칠고 투박하게 만들었으며, 기종은 대부분 대접·완·접시류들이며, 그릇의 안바닥에 원각(圓刻)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고, 굽은 오목굽에 가까운 것과 죽절굽이 퇴화된 형식의 것이 존재하며, 간혹 높은 굽의 측면을 삼각형으로 오려낸 제기(祭器)의 굽 형태도 보인다. 받침은 내화토를 빚어 4∼5곳에 받쳐 구운 것과, 굵은 모래덩어리를 4∼5곳에 받쳐 구운 것 등이 보인다.

이곳에서 번조된 백자는 모두 지방수요의 중·하품백자로, 유색은 회백색이나 짙은 회색, 연두색 또는 갈색을 띠고 있다. 그러나 법기리 요지에서 번조된 백자류 중에는 굽의 형태나 백자질 등이 일반적인 백자와는 다른 부류가 있는데, 이들은 바로 일본의 주문을 받아 수출용으로 특별히 제작된 다기(茶器)로 추정되고 있다. 때문에 일본 수출용 다기를 전문적으로 생산했던 부산요(釜山窯)가 사라진 지금 법기리 요지는 한일도자교섭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양산법기리도요지

양산법기리도요지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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