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때 청에 패배해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고, 청태조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은 비석이다. 조선 인조 17년(1639)에 세워진 비석으로 높이 3.95m, 폭 1.4m이고, 제목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 되어있다.
조선 전기까지 조선에 조공을 바쳐오던 여진족은 명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 급속히 성장하여 후금을 건국하고, 더욱더 세력을 확장하여 조선을 침략하는 등 압력을 행사하면서 조선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였다. 나라의 이름을 청으로 바꾼 여진족이 조선에게 신하로서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하자 두 나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결국 인조 14년(1636) 청나라 태종은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직접 조선에 쳐들어와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남한산성에 머물며 항전하던 인조가 결국 청나라의 군대가 머물고 있는 한강가의 삼전도 나루터에서 항복을 하면서 부끄러운 강화협정을 맺게 되었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도록 조선에 강요했고 그 결과 삼전도비가 세워졌다. 비문은 이경석이 짓고 글씨는 오준이 썼으며,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제목은 여이징이 썼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몽골글자, 오른쪽에는 만주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져 있어 만주어 및 몽골어를 연구하는데도 중요한 자료이다.
전문설명
인조 17년(1639) 12월 8일(음력) 건립된 비로서 전체의 높이 5.7m,비신의 높이 3.95m,폭 1.4m이며, 제액(題額)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 되어 있다.
이 비석이 세워지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광해군 때의 조선과 청나라 양국 관계로 거슬러올라간다.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조선에 대해 조공을 바쳐오던 여진족(만주족)은 임진왜란 때 조선과 명나라가 큰 피해를 입게 된 것을 기화로 누르하치의 영도 아래 급속히 세력을 확장, 숙원이던 부족 통합에 성공하고 후금((後金), 뒤에 청(淸)으로 고침)을 건국하였다. 광해군 11년(1619)에 조선정부는 명의 군사동원 요청에 따라 병력을 만주 지방으로 파견, 후금의 군대와 사루 후 전투에서 대치했다가 곧바로 투항한 적이 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있은 뒤 조선과 후금 사이에는 긴장이 고조되어 인조 5년(1627)에는 후금의 군대가 조선에 쳐들어온 일이 있었다(소위 정묘호란(丁卯胡亂)), 조선이 청과 화약(和約)을 맺은 뒤에도 양국 관계는 원만하게 진전되지 못했는데, 인조 14년(1636) 후금이 청으로 국호를 바꾸면서 조선에 대해 칭신(稱臣)할 것을 강요함에 이르러 마침내 양국 관계는 단절되고 말았다. 이 해 12월 청의 태종은 10만대군을 이끌고 직접 조선에 쳐들어왔다(소위 병자호란(丙子胡亂)) 인조는 신하들과 더불어 남한산성에 들어가 청군과 대치했는데, 이듬해 1월 하순에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또한 비축한 식량도 바닥이 나자 50여 일간의 농성 끝에 부득이 1월 30일 청의 군영이 있는 한강가의 나루터인 삼전도(三田渡)에 나아가 청과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게 되었다.
이 병자호란이 수습된 뒤 청의 태종은 조선정부에 대해 삼전도에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도록 요구했다. 이에 조선은 장유(張維)·조희일(趙希逸) 등이 지은 글을 청에 보냈던 바 모두 그들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번번이 거부되었다. 마침내 인조의 특명으로 이경석(李景奭)이 지은 글이 받아들여져서 이를 비석에 새기도록 했다. 이에 따라 공조에서는 삼전도의 제단터에 제단을 높고 크게 증축한 다음 비석을 세웠는데, 글씨는 서예가로 이름 높던 오준(吳竣)이 썼고, 전자(篆字)로 된 '대청황제공덕비' 라는 제액은 여이징(呂爾徵)이 썼다.
이처럼 삼전도비는 비록 조선이 청에 대해 항복하게 된 경위와 더불어 청태종의 침략을 '공덕'이라고 예찬한 굴욕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으나, 한편 비석 표면의 왼쪽에는 몽고 문자, 오른쪽에는 만주 문자, 뒤쪽에는 한문으로 쓰여져 있어 만주어 및 몽고어 연구의 자료로서 크게 주목받고 있다.
삼전도비 전경 삼전도비 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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